까마귀
홍용희
햇살이 유난히 부시던 오후, 창 너머 땅거미가 서서히 내린다. 팜트리의 메마른 가지에 서너 마리 까마귀가 살고 있다. 노을빛 하늘을 향해 활짝 날개를 펴 먹이를 물고 창공을 유유히 나른다. 숭고한 생명의 향연 한 면을 보는 듯하다. 자신이 받은 목숨을 여유 있게 즐기는 시간, 검은 까마귀 두세 마리가 번뜩이는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서서히 다른 쪽의 나무로 선회하는 모습이 좋기 때문이다. 또한 연암(燕巖)이 설파한 빛깔론을 되새긴다. 까마귀라 해서 오직 검은색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햇살 아래 반사되는 유금빛, 녹색빛, 자줏빛, 비취빛을 확인해보고 싶어 기회만 되면 각도를 바꿔가며 빛깔을 보곤 했다. 사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고정된 선입견을 지양하고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보라는 것이지만, 까마귀를 보면서 나도 까마귀 검은 깃털에 반사되는 여러 빛깔이 화려하기까지 한 것을 본다.
얼마 전이다. 긴박하고 짧은 까악까악 예사롭지 않은 까마귀 울음소리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봇대 바로 위 전선에 앉은 까마귀가 아스팔트에 쓰러져 있는 다른 까마귀를 보며 애끓는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 아래 아스팔트 바닥에 날지 못하는 까마귀 한 마리가 퍼덕이고, 어느 아주머니 한 분이 아스팔트에 있는 까마귀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아주머니가 살며시 한 손으로 잡으려 했으나 그놈은 안간힘을 다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우회전하는 자동차를 피하면서 까마귀에게 다가갔다. 두 손으로 두세 번 시도한 후 성공했다. 그리곤 아주머니는 까마귀를 안고서 골목길을 돌아갔다. 전선에 앉아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까마귀는 계속 안타까운 절규만 토했다. 그러다가 다른 전봇대의 연결된 전선으로 아주머니를 따라가서도 계속 애끊는 울음을 울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마도 그놈은 제 깃털을 타고 어느 작은 별나라로 갔으리라.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데, 구급차 소리가 요란했다. 다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응급차 소리는 연이어 왱왱, 빨간 경광등은 쉴새 없이 돌며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어둠 속의 경사진 언덕배기 아스팔트 주차장에서 응급 심폐소생술이 시행되고 있었다. 환자가 누워 있고 응급구조원 한 사람이 심장박동술을 시행하고, 다른 응급구조원은 엠뷰백으로 호흡을 불어넣고 있었다. 한동안 시행되더니, 응급 심폐소생술을 하던 그 자리, 그 환자의 몸 위에는 하얀 보자기가 길게 덮였다. 응급구조 대원들은 돌고 도는 핏빛 등을 남기고 돌아갔다. 또 하나의 별이 새의 깃털을 타고 피안으로 날아갔다.
밤하늘의 별은 빈센트 반 고흐를 떠올리게 한다. <별이 빛나는 밤><자화상><해바라기>등으로 고명한 고흐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시기 그림인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뒤, 자신에게 총 쏜 후 까마귀의 깃털을 타고 날아갔다. “슬픔은 영원할 것이다.”라던 그는 자살하기 직전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폭풍의 하늘에 휘감긴 보리밭의 전경을 그린 것으로 나는 충분한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편지했다. 세 갈래 길이 있는 밀밭에 나지막한 하늘을 뒤덮는 까마귀를 그림으로써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겠다는 의지이리라. 그렇다면 까마귀와 고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까마귀는 태양의 상징일 뿐 아니라 신의 사자의 역할을 하며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동물로 이해된다. 왜 고흐는 까마귀의 검은색에 의미를 두었으며, 까마귀의 역할에 어떤 기대를 했을까. 빨강·노랑·파랑 삼원색을 다 섞으면 검은색이 되듯이, 평생 그림 두 점 못 팔은 한 많은 인생, 그래도 열정을 보여주는 검은색으로 자신의 그림을 끝냈다. 거기에 자신의 고독과 절망을 다 섞으면 검은색이 되기에 까마귀를 그린 뒤에 그 깃털을 타고 피안으로 날아갔을까.
날마다 창밖에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나는 언제쯤 검은 깃털을 타고 피안으로 날아가게 될까. 나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때 내 가슴은 무슨 색일까. 검은색일까. 만약, 내게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난, 나를 알아볼까. 말을 할 수 있을까. 의식은 맑지만, 뜻대로 말을 할 수 없어 무척 답답할 때, 이럴 때가 온다면 나는 어떤 방법으로 소통할 것인가. 어느 정도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 응급 심폐소생술을 해서 더 살고 싶을까. 책상 옆에 있는 혈압계에 슬며시 눈이 간다.
지금도 창밖에는 까마귀들이 날고 있다. 까마귀는 저 푸른 창공을 향해 오묘한 빛깔로 유희하듯 선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