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과 지갑
홍용희
아침에 커튼을 열었다. 파란 하늘 사이로 엷은 구름은 강물처럼 흐르는 5월 아침이다. 집에 있기에는 아까운 날이다. 혼자 밖에 나와 아침 햇살이 비치는 도심 사이를 느렁느렁 걸어본다. 어느 꽃가게 앞에 놓여 있는 붉은 부겐빌레아가 눈앞에 와 닿는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꽃가게 안을 들여다보는데, 부근에 있는 아파트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같이 마실 가자고 수다를 떨어댄다.
처음으로 친구와 6가와 플라워에 있는 실내 짐(gym)에 갔다. 직원은 사용료가 20달러라고 하면서도 몇 가지 기본 정보를 제공하면 1회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돈내기는 싫고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주 중요한 정보를 요구하지 않아 기본적인 것만 제공한 후 무료 임시출입증을 받아 몇 가지 운동하기로 했다.
짐에서 나오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친구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높이 솟은 20여 층 빌딩 지하 아케이드에는 화려한 조명등과 사무용품, 운동용품, 미용실 등 여러 나라의 음식점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그 중 맥도날드 간판, 그것도 ‘빅맥 2개에 5달러’라는 단어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와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눈빛 하나로 빅맥이 결정되었다. 마음속으로 ‘한 개 값으로 두 개가 어딘데, 땅을 아무리 파봐라. 동전 한 닢 나오느냐’ 하며 당당하게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꽉 찼고 세 줄로 길게 서 있었다. 계산이 빨리 움직여 보이는 듯한 계산대 뒤에 섰다. 차례가 오자 커피 두 잔을 별도로 주문하고 나는 지갑에서 8불을 꺼내어 주었다. 그리고는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계산대 주변에 서성이며 영수증에 붙어있는 주문번호를 열심히 보며 나오는 음식을 확인했다. 식탁에서 햄버거를 먹고는 친구랑 편안한 마음으로 아파트 부근에 있는 그랜드팍에 들렸다. 검은 돌바닥에 놓여있는 나지막한 작은 분수를 배경으로 발레 자세로 사진을 찍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소녀 뒤로 보이는 분수는 춤을 추듯 살랑대며 쏟아내며 정겹게 보였다. 순간 인상주의 화가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의 그림이 생각났다. 더군다나 분수대 주변에 있는 란타나의 귀여운 꽃잎과 억새를 보며 나도 모르게 어깨까지 들썩여졌다.
금아는 ‘5월’을 모란의 달이고 신록의 달이라 했다. 무엇보다 5월은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고 했다. 그리고는 스물한 살 5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고 했다. 지금이 바야흐로 5월 중순이 아닌가. 이대로 아파트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친구에게 가까운 산타모니카 바닷가에 가서 5월의 백사장을 함께 거닐어 보자고 제안했다. 그야말로 불현듯 말이다. 친구와 메트로(Metro)에 갔다. 그런데 작년에 사둔 메트로 링크카드를 확인하기 위해 지갑을 찾는데 안 보였다. 가방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지갑만 쏙 빠져 있었다. 가방과 주머니를 몇 번이나 뒤지다가 퍼뜩 생각이 났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맥도날드 계산대에 두고 온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한 시간가량 친구랑 깔깔대며 수다를 떤 게 안타까웠다. 급히 친구랑 맥도날드에 갔다. 분실한 지갑에 대해 문의했다. “모른다!”는 대답뿐이다. 지갑을 주운 사람이 돌려주면 내게 전화할 것이고, 경찰에 분실신고부터 먼저 하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다리에 힘이 빠지고 속까지 아려왔다. 그 지갑이 어떤 지갑인가. 3년 전 큰아들이 첫 월급을 탔을 때 선물로 준 밤색 반 가죽 지갑이다. 그동안 모서리가 닳을까 봐 헝겊 주머니에 넣어 다닐 만큼 아끼던 지갑이다. 이렇게 사단을 만든 자신에 대해 화가 불쑥 났다. 지갑 속에는 저세상으로 먼저 간 남편의 사진과 여러 종류의 카드 등이 들어 있는데, 뭐 한다고 이런 실수를 했단 말인가.
평소 집에서 지갑을 아무 곳에 놓고, 둔 곳을 몰라 자주 찾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잘 사용하지 않는 내용물은 별도로 보관하리라 하면서도 습관처럼 들고 다닌 것이 후회되었다. 친구는 주운 사람이 우편함에 넣어 줄 것이라며 위로했다. 나 또한 그렇게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도 안 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항상 같이 있고 싶은 내 남편의 사진, 이제 더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사진이 들어 있는데 말이다. 지갑 속에 있는 남편의 얼굴에는 5월과 같은 연두색 사랑이 담겨 있다. 잃어버린 사진과 5월과 같은 서른 살 때의 나. 그동안 가끔 지갑 속의 사진을 보며 지금의 내 나이를 잊고 5월의 푸르름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다.
뉘엿뉘엿 지는 해는 서쪽 빌딩으로 넘어가고 지금은 8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지갑을 주었다는 전화가 없다. 해가 지자 낮에 들렸던 그랜드팍의 분수대에 남편의 그림자와 둘이서 밤 산책을 나섰다. 여러 분수대에서 쏟고 있는 크고 작은 오색 물결이 번득인다. 물에 비치는 어둠은 나비의 두 날개처럼 하늘거리다 하나가 된다. 분수는 강렬한 빛에서 어두운 빛으로 변하다 다시 화려하게 치솟고 있다. 물결과 함께 일렁이는 검은 환영 속에는 아픈 사연들이 애잔하게 일렁이고 있다.
나는 한 점의 정물(靜物)이 되어 빈 의자에 앉아 애련한 5월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