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문과 그리피스공원
홍용희
오늘, 보름날이다. 68년 만에 슈퍼문이라는 기사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컴퓨터를 열고 검색하니 오후 5시 30분에 달이 뜬다고 되어 있다. 시계를 보았다. 서둘면 슈퍼문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가까운 그리피스공원에 가기로 했다. 친구랑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그리피스공원으로 향했다. 천문대 가까이는 이미 긴 줄의 차들이 거북이처럼 오르내리고 있다. 아직 어둡기 전인데도 주차할 곳을 못 찾은 많은 차가 내려오고 있지만, 운수가 좋아 주차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며 끝까지 올라갔다.
서너 바퀴를 돌며 헤매도 자리가 없었다. 할 수가 없어 불법이지만 주차 금지판을 치우고 쓰레기 수거함 옆 공터에 차를 세웠다. 달뜨는 것을 잠시 보고 바로 내려가려는 생각에 그렇게 했다. 나의 마음은 조마조마해서 안달인데 친구는 느긋하기만 하다. 그러는 사이 팍 레인저 차가 파랗고 빨간 경광등을 번쩍이며 돌며 경고방송을 하고 있다. 깜짝 놀라 급하게 차를 빼는데 옆의 공간에 있는 다른 차가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잽싸게 주차했다. 그제야 느긋하게 마음이 놓였다.
시계를 보았다. 달이 떠오른다고 예보된 시간, 오후 5시 30분에 맞추어 온 셈이다. 멀리 사라져가는 해넘이의 뒷모습이 진한 듯 약한 듯 여운을 남긴다. 멀리 산타모니카 해변을 둘러싼 분홍빛 지평선 사이로 보이는 아스라한 야자수 나무의 정경이다. 어느 곳에서 떠오르는 큰 달을 볼 수 있을까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달이 떠오른다는 말이 들려온다. 슈퍼문이라더니 과연 지구를 담은 ‘쟁반같이’ 크고도 노란 달이 그리피스공원 동산 너머에서 늠름한 얼굴을 내밀고 서서히 하늘 높이 오르고 있다.
천문대 건물을 돌아 엘에이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갔다. 어둠 속의 도심이 훤하게 다 들어온다. 구획이 잘된 도심의 거리마다 번쩍이는 불빛들이 저마다의 빛을 발하고 있다.
밤이 여물어 간다. 밤이 깊어 갈수록 도심의 불빛은 영롱해진다. 하느님의 보석상자인가!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토파즈 등등의 색채가 반짝반짝,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을 들려주고 있다. 땅에서 빛나는 오색 별들이 첼로가 되어 그리움빛 연주를 하면 하늘의 별들이 트라이앵글이 되어 해맑은 소리로 화답한다. 지나가는 비행기의 노란빛이 클라리넷 정다운 색으로 참여하고 빌딩 첨탑의 붉은빛도 따뜻한 플롯 소리로 합세한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본향은 따로 있고, 사람은 비치는 본향의 그림자 세계에 산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도 인간의 본향은 하늘나라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윤회한다고 설파한다. 이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다 이별이라는 다리를 건너 이 땅에 왔다.
근대사회가 산업사회에서 출발한 이래 현대 인류는 과거 농경사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동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남을 시작으로 종국에는 영원한 이별의 강을 건너야 하기에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은 본능처럼 우리의 가슴에 녹아있다. 그래서 드보르작은 그리움을 신세계 교향곡에 담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움을 가슴에 담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발하는 불빛, 그 오색 불빛이 모이면 신세계 교향곡처럼 아름다운 화음이 되리라. 외로움, 괴로움, 무서움, 아픔, 슬픔 등도 잘 정제하면 어둠 속의 보석상자가 될 것이다. 지금은 플라톤의 그림자 세계가 아닌, 실제의 달빛 그림자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 산에 모여있다. 그들은 사라진 동무들과 모여 ‘옥 같은 시냇물 개천을 넘어 반딧불이를 쫓아서’ 즐기고 있으리라. 드보르작이 차용해서 쓴 흑인영가에서도 ‘고향’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Going home, going home / I'm just going home
Quiet light, some still day / I'm just going home
It's not far, just close by / Through an open door
Work all done, care laid by / Going to fear no more…."
슈퍼문은 어느새 하늘 가운데 떠있다. 접시 같은 보름달 속에 또 하나의 다른 세계가 있다. 친구와 함께 산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어둠 속 훤한 달빛에 그림자 나무가 새겨져 있다. 그림자 가무스름한 잎새를 밟으며 산길을 따라 올라간다. 산속 벤치마다 사람들이 앉아있다. 벤치에 누워있는 사람, 앉아서 얘기하는 사람, 모든 사람이 늦가을의 보름달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 귀가 번쩍 뜨이는 정다운 말소리가 들린다. 달빛 속에서 정선 아리랑이 흘러나오고, 한국어로 도란도란 담소하는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있다.
밤 나들이가 별로 없었던 내게 또 하나의 세계가 열려있다. 거긴 밤이 환히 열려 있는 신세계다. 이십 년 이곳과 가까운 곳의 도시에 살면서도 전혀 생각지 못한 새로운 세계다. 습관이라는 견고한 껍질에 쌓여있던 내가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니 새로운 세상이 여기에 열려있는 것이다.
슈퍼문을 즐기려는 차들은 계속 올라오고 있다. 내가 전혀 몰랐던 이러한 실루엣 세계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미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올라오는 사람마다 불빛의 교향악과 달빛에 취해 그리움 담은 서로의 마음 빛을 보여 줄 것이다. 달빛 타고 온 사랑이 그 마음들을 채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