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팍과 거북이
홍용희
아슴푸레 땅거미가 내리는 무렵, 집 부근에 있는 에코팍에 갔다. 이곳은 긴 아메바형의 거대한 호수를 중심으로 산책로가 있다. 이곳을 걷다 보면 지향점이 같은 사람과 어울려 함께 걷고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산책로를 활보하다 보면 팜추리, 망초, 란타나, 무궁화 등의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마음껏 뻗어 있다.
이곳 호수의 습지에는 알개, 갈대, 연꽃, 수련 등이 계획적으로 구획되어 있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지루하지 않게 각각의 자리에서 여러 형태의 군락을 만들어 놓았다. 호수에는 붉은 꼬리 독수리, 해오라기, 갈매기떼, 캐나디안 거위와 오리떼가 평온하게 생활한다. 이렇게 이곳에는 동식물들도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친척이 있는 우리네 인간관계처럼 살아가고 있다.
걷기 시작했다. 내게 눈인사를 해주지 않아도 사람과 함께 산책로를 활보하면 저절로 마음이 편해진다. 반 바퀴쯤 걷다 보니, 보랏빛 꽃송이가 뚝뚝 떨어져 있는 무궁화 꽃나무가 서너 그루 있는 곳에 닿았다. 오늘따라 무궁화 꽃송이가 많이도 떨어져 있다. 그 자리에 섰다. 산책객들 발에 뭉개져 있는 것 중 깨끗한 꽃 몇 송이를 주워 호숫가에 앉아 물 위에 던졌다.
수초 사이로 헤엄치는 거북가족이 보였다. 작은 거북이는 엄마 거북이처럼 보이는 큰 거북이 주위를 맴돌며 칭얼대는 듯한 장면이다. 꼭 아기가 엄마에게 뭘 해달라고 떼쓰는 것 같다. 어떤 놈은 마른 수련 잎에 앉아 고개를 쭉 빼고 사방을 둘러보는 거북이도 있다. 거북이도 무슨 생각을 하나보다. 거북이라는 단어 하나를 붙잡고 소소한 추억을 불러내 나의 감성을 흔들어 놓는다. 막내 아들아이가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동평화시장 건너편 청계천에는 애완동물 가계가 즐비해 있었다. 막내는 거북이를 사달라고 졸라댔지만 거절했다. 분비물도 많고 물을 잘 갈아주지 않으면 냄새가 심하기 때문이었다. 길거리에서 생떼를 쓰며 울어도 안되자, 아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찾느라 온 청계천을 헤맨 기억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삶의 과정이라고 이해해본다.
수련 위에 올라가 있는 거북이 한 마리가 등짝 안에 머리와 네 발까지 넣고 꼼짝도 않고 있다.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미동도 않고 있다. 등짝을 쳐다보고 있자니 오래된 기억들을 끄집어내게 한다. 마치 거북이가 시간의 마법에 걸리게 하는 듯싶다. 지난 세월을 생각해 보면 현실은 항상 아팠고, 과거는 그리 아프지 않았다. 미움과 증오는 퇴색되고 오로지 끈끈한 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발걸음을 옮겼다.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이 보여 말을 시켜보았다. 자신은 좀 전에 나왔는데 밤에 작황이 대체로 좋다고 했다. 이 에코팍의 물은 재활용이라 물빛이 어두운데도 이곳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농어, 송어, 매기를 잡아봤다며 자랑하기까지 한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거북이가 있던 곳에 다다랐다. 이젠 한두 마리가 아니라 떼살이로 모여 있다. 갑자기 고소설(古小說) 별주부전이 떠오른다. 조선 시대 말경 무능한 왕실과 부정부패한 신하로 그득한 세상을, 억측같이 살아가는 토끼로 상징되는 백성의 이야기, 세상살이의 속성을 나타낸 우화소설이다.
용궁의 임금이 병이 났다. 영악한 다른 신하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명을 받들지 않지만, 거북이는 우직하게 명을 받아들인다. 우여곡절 끝에 토끼를 만나게 된다. 거북이는 토끼를 보자 어렵사리 용궁으로 데려갔지만, 토끼의 지혜로 수중 궁궐을 탈출하고 만다. 서로가 속임으로 시작해서 속임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거북이는 용궁에서 현자가 필요하다는 속임으로 토끼를 데려가려 했고, 토끼는 간을 씻은 뒤 말리려고 나무에 걸어놓았기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에 임금도 거북이도 다 속아 넘어간다는 내용이다.
보통 거북이는 느리다. 움직임이 느리고 호흡도 느리다. 일 분에 세 번 내지 열 번 호흡한다. 무엇이든지 잘 먹는다. 하지만 한 번 먹으면 수개월까지 버틸 수 있도록 신진대사가 느리다. 신진대사가 느리기에 오래 사는 것이리라. 지금 우리는 빠른 것이 최고라고 느끼며,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컴퓨터의 속력이 조금만 늦어도 짜증을 내는 세상이 아닌가. 이런 세상에 거북이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조금만 느리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심신의 건강을 위해 한 박자만 느리게 말이다.
지금은 하루가 빠르게 변하는 세상, 우직한 거북이 같은 이가 그립다. 어쩌면 그런 거북이가 보고 싶어 이곳 호숫가에서 정신적 안식처를 찾아 나선 것 같기도 하다. 깊어가는 황혼녘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을 때, 소리 없이 다가와 사랑이 넘치는 열정의 대화자가 되는 주는 내 영혼의 샘.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한동안 편치 않은 마음을 산책로를 몇 바퀴 돌며 한 보따리 풀어놓으면, 진통제 주사를 맞은 환자의 회생처럼 삶에 활력소를 얻곤 한다.
벤치에 앉았다. 호숫가의 정취와 조용함이 조용히 내 안에 와있다. 벌써 검푸른 호수 위로 도시 빌딩 숲이 비친다. 깊어가는 가을밤을 보듬어 안는다. 번들거리는 호수의 잔물결이 오늘따라 이토록 아름답게 보일 줄이야.
아름다운 내용, 깊이가 있는 내용 잘 읽고 갑니다.
정영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