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파도꽃(넌픽션 당선작)

조회 수 10056 추천 수 6 2016.08.31 12:28:43
작가 : 홍용희 

 

 

 

                                                 하얀 파도꽃

   

 

                                                                                                                                                                      홍용희

 

-나의 항구
  기온이 화씨 100도를 넘던 날 오후, LA에서 가까운 헌팅턴 비치(Huntington Beach)에 갔다. 끝없이 펼쳐진 고운 모래 위에 샛노란 햇살이 비치고 파도는 포말이 채 지기도 전 또 다른 하얀 파도꽃을 피우고 있다. 수평선에 걸린 해의 뒷모습은 내 모국의 석양을 방불케 하다가 주홍빛으로 하늘을 가득 물들인다. 태양의 뒷모습은 검붉은 울음을 토하게 했던 내 지난날을 불러왔다.

  미국에 사는 여고 동창인 단짝 친구, 남자 이름을 가진 강석태. 지금은 수잔 리,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이씨가 된 친구다. 40여 년 전, 고등학교 3학년 수학 시간에 미국에 이민 간다는 내용을 선생님 몰래 속닥거리다 울면서 아쉬워했던 단짝이다. 그녀가 시흥에 살았을 땐 시흥 출입이, 김포공항 근처에 살았을 땐 공항동에 가기 위해 한강다리를 건너며 출입이 잦았다.
  석태가 내 큰아들 우권이가 대학입시에 두 번 실패한 후 전화를 했다.
  “얘, 우권이 어떻게 되었어. 또 안 됐어?”
  “넌 왜 우권이를 유학(留學) 보내지 않니. 다른 애들은 잘도 오더구먼. 어쩌면 거기서 하는 것보다 이곳이 더 좋을 수 있어.”
  ‘유학’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게 어디 만만한 일인가. 군(軍) 문제며 미국에서 확실하게 된다는 보장도 없고, 이산가족이 되어야 하는 문제라 가슴속에 넣고 말았다. 그렇지만 큰애 우권이가 고등학교 2, 3학년 때 국어, 영어, 수학 과외학원에 다니는 것만 해도 사교육비는 엄청나게 들었다. 그 경비를 합치면 유학에 드는 비용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우권이는 최선을 다하는 듯 보였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다. 우권이는 새벽 4시면 일어나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정규수업 후 야간자율학습 그리고 곧바로 학원에서 공부하느라 제대로 잠자지 못했다. 밥도 편히 앉아 먹지 못했다. 어떤 날 아침에는 밥을 먹으며 조는 것이 너무나 가여웠다.
  사당오락(四當五落), 근 40년 전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간이 떨리게 많이 들었던 유행어다. 4시간 자면 합격하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엄마가 겪은 그런 현실을 몇 십 년째 대물림하는 현실이 싫어졌고, 우권이를 유학(留學) 보내면 아들의 성격상 유학(遊學)은 아닐 거고 영어는 확실하게 배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들었다.
  유학에 관한 생각이 들자, 약 1,500여 년 전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떠올랐다. 그분들 외에도 신라시대 때 선진문화를 갈구했던 선각자들인 고운 최치원, 혜초스님, 원광스님 등은 열악한 그 시대의 교통수단을 감내하면서 당나라와 인도까지 가서 배움의 갈망을 해소한 선례가 있지 않은가. 지금이야 엎어지면 코 닿을 세상인데… 친구 석태와의 국제통화 내용을 남편과 상의했다. 남편은 “당신이 알아서 하라.”라고 대답했다. 남편의 확답은 받았지만 그래도 차마 우권이에게 말을 하지 않자 하루는 남편이 다그쳤다. “왜 말만 꺼내고 실행 안 하느냐.”고. 아마 자식과 떨어지기 싫어하는 나의 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결심했다. 그래, 남편도 적극 동의하고 있고,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으니…. 하루는 가족이 다 모인 곳에서,
  “우권아. 너 미국으로 유학 갈래?”
  “엄마, 저는 도피유학은 안 가요.”
  “도피유학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공교롭게도 우권이가 다니는 학교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 미국에 유학 한 어느 아이가 부모에게 많은 송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아이가 한국에 돌아와서 부친을 살해했다. 아마 그 사실이 큰애의 가슴에 각인된 듯싶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고등학교 2학년인 둘째 송이, 중학교 2학년 셋째 우정이가 유학을 가겠다고 적극 나섰다.

 

-닻을 띄우다
 정작 유학을 보내려던 우권이는 빠지고 대신 둘째, 셋째가 결정되었다. 두 아이가 다닐 학교, 비용 등 여러 가지가 걱정되었으나 서울에 있는 유학원에 가서 필요한 절차를 마쳤다.
  1997년 가을, 석태 동생의 도움으로 버지니아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시키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한국에는 전대미문의 1998년 외환위기사건 IMF가 터진 것이다. 1달러에 천원 미만이던 원화가 1,200원을 웃돌기 시작했다. 마치 졸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이러다가는 교육은커녕 학교도 제대로 못 보내겠다는 위기감이 들자 남편과 급히 의논했다. 그 결과, 내가 미국에 가서 애들과 함께 살면 더 경제적이라는 것에 의견이 일치하여 친구 석태랑 상의했다.
  친구 석태가 있는 LA에 정착하기로 하고 석태 남편의 도움으로 라미나다(Lamirada)에 주택을 구입했다. 그리고는 두 아이를 주택 가까운 학교로 옮겼다. 두 아이와 함께 생활하니 좋았으나 한국에 있는 큰아들과 남편을 볼 수 없어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 우권이는 홍익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휴학한 후 입대했다. 이렇게 되니 남편은 서울의 집 규모를 줄이며 회사생활을 하다가 퇴직하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우권이는 군대를 마치면 미국으로 올 것이고, 한 가족이 다 같이 살게 된 것은 좋았는데, 남편은 일생일대의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다름이 아니라 몇십 년간 근무하고 받은 퇴직금과 주식을 죽마고우라고 생각했던 김민갑에게 맡긴 것이다. 미국은행 시스템은 별반 이자가 없다는 것을 안 남편은 친구에게 맡겨 놓고 조금씩 돈을 받아 생활할 생각이었다.

 

-폭풍우
 남편이 미국에 왔으니 여기서 수입을 만들어 기반을 잡아야 했다. 그동안 남편은 틈틈이 생활비와 학비로 송금했던 돈을 바탕으로 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궁리했다. 그래도 한국인이 쉽게 할 수 있는 장사, 음식 만드는 것이 괜찮을 것으로 보여 가게를 물색해 계약했다.
  가게의 중도금으로 받기 위해 남편이 친구와의 통화를 시도했으나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통화해 돈 일부를 받은 뒤부터 소식은 영 끊기고 말았다. 돈 인심은 죽마고우에게도 통하지 않았다. 김민갑은 금전유혹에 쉽게 허물어지는 그런 실체를 남편은 몰랐던 것이다. 서울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연락하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찾을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친구 김민갑은 아예 증발해버린 것이다.
  중도금과 잔금이 큰 걱정거리였다. 여기저기 통장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으고 부족한 돈은 서울의 친구와 친척을 통해 뒤처리하는 동안 남편은 큰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돈은 날아가고, 내가 그 돈을 친구에게 빌릴 때의 기분은 참 묘했다. 친구의 기분을 짐작하며 정말 미안했다.
  남편은 장사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계속 그 친구를 찾기 위해 전화하기가 바빴다. 일 갔다 와서도 한국으로 전화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그러나 증발해버린 친구랑 함께 날아간 돈과 증권들, 그것은 고스란히 독이 되어 남편의 정신과 몸은 점차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전화가 계속 안 되자 하루는 “내가, 왜 천안 땅을 근저당하지 않았는지 정말 통탄스럽다.”라고 말했다. 김민갑이가 천안에 있는 땅을 살 때 남편은 얼마간의 현금을 아무 조건 없이 빌려주었다. 이는 김민갑의 필요 때문에라도 남편과 연락은 끊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애통함과 분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남편을 옥죄고 있는 것이 더 많았다. 생전 해보지 않았던 일들, 들리지 않는 귀와 트이지 않는 입, 날아간 재산과 자존심은 남편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런 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허탈해하며 말까지 급속도로 잃어갔다. 삶의 터전을 옮긴 죄(?)로 받은 남편의 고통이었다. 가장 신뢰했던 친구의 배신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견뎌야 했으니 말이다. 하루하루 기막힌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던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나락에 함께 떨어져야 했다. 그래도 애들은 재잘대고 학교에 잘 다니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난파선
  얼바인(Irvine)에 있는 고층건물 실내 카페테리아(Cafeteria)에서의 장사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이곳에는 증권회사와 인터넷 관계 회사 등 몇 회사가 있었지만, 공실률(空室率)이 높아 늘 고정적이고 유동 인구가 별로 없는 가게였다. 날마다 샌드위치 등을 만들어 팔았지만, 특별히 장사가 잘되는 날 없이 운영해나갔다. 직원이 하나 있었지만, 곧 정리했다.
  남편은 이 상황을 파악하고 이 가게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한 장로의 소개로 치과기공 일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물 주인이 바뀌었다. 새 주인이 잘 운영해서 공실률을 줄이고 입주회사가 늘면 손님들이 늘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와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쫓겨나게 된 것이다. 얼마의 보상금을 받기는 했지만, 우리가 투자했던 것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금액이었다.
  남편은 치과기공소에 다시 다녔고 나는 커뮤티니 칼리지(Community College)에서 사회학과 영어를 수강했다. 남편이 일을 배우러 갈 때 김밥을 싸서 주곤 했다. 어느 날은 거의 안 먹고 남겨왔다.
  “아니, 왜 이리 못 드세요?”
  “응, 배가 안 고파. 왜 그런지 모르겠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남편이 집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급하게 교회 목사님에게 전화했다. 목사님의 도움으로 윌셔거리에 있는 교우의 병원에 가서 몇 가지 진찰했다. 그는 별로 큰일은 아닌 것 같으나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별로 큰일은 아닌데 왜 큰 병원일까 하면서 기분이 이상했지만 큰 병원에 갔다.
  각종 검사 끝에 진단결과가 나왔다. 위암 4기, 앞으로 남은 기간은 6개월이라 했다.
  순간, 담당 의사의 얼굴이 노랗게 보였다. 청천벽력 같은 대포 소리에 “수술날짜를 잡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담당의사는 단호했다. “병원 치료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미 암세포가 온몸에 다 퍼져있다. 복부에도 모래알 같은 암세포가 퍼져있어 어느 한 부분을 수술할 수가 없다. 키모테라피(Chemotherapy)도 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당신 남편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마지막 날까지 편안하게 살아라!”라고 단호하면서도 무심하게 말했다.
  하나의 파도가 그 물거품이 사라지기도 전인데 더 큰 파도가 덮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세상에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왜 이리도 힘든 일이 계속 일어나나. 제대로 숨도 못 쉬겠네.”라고 떠들어 댔다. 해도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복도에 나오니 눈물부터 쏟아졌다. 우리 부부 사이로 지나가는 환자가 보였다. 머리카락이 없어 모자를 쓰고 지나가는 환자였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랬다. 병실에서 누가 암 수술을 받는다고 하면 ‘아, 저분은 그래도 수술할 수 있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부러워했고, 키모가 어렵다는 어느 환자도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어쩌다 내 남편은 아무 치료도 못 받고 6개월 안에 가야만 하나 싶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만 났다. 남편이 없는 곳이면 아무 곳에서나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남편에게 도움 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가슴은 끝없이 무너져 내렸다.
  무엇보다 남편은 차오르는 복수(腹水) 때문에 힘들어했다. 그 때문인지 몸은 자꾸 여위어가고 밥을 먹지 못했다. 남은 밥을 버리기가 아까워 내가 대신 꾹꾹 먹다가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제 병원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목사님과 상의했다. 한 교우가 경영하는 민간요법을 추천해 주었다. 병원에서는 더 할 것이 없다고 했으니 그 방법에 매진하는 것이 최선인 듯해서 한국에 갔다. 그런데 왜 그리 암에 좋다는 민간처방이 많은지…. 남편은 교우가 운영하는 곳에서 민간요법에 집중했다.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낫겠다는 일념 하나로 밥을 굶으며 민간요법을 했으나 남편은 점점 더 야위어 가고 뼈만 남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 부부는 경기도 고양 부근에 옮겨 일반병원 치료를 계속했다.
  추운 겨울이다. 한 번은 눈을 밟으며 산책하다 남편이 미끄러졌다. 나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미끄러지면서 배를 땅에 댔어. 복수가 빠지라고.”
  빼내도 이내 차오르는 복수, 서울의 한 일반의사는 복수를 빼면 그 용액 속에 전해질도 같이 빠져나오니 좋지 않다면서 회피했다.
  이때 대구에서 홀로 계셨던 시아버지, 그렇잖아도 평생 잉꼬부부로 지내셨던 시어머니를 여읜 슬픔이 채 가기도 전에 아들이 이랬으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남편은 둘째 아들이었다. 평소 부모님의 든든한 기둥이었다. 시아버지는 철도공무원을 그만두신 뒤 연사공장을 대구 동촌에서 경영했다. 동네에서 인망이 높으셔서 신용협동조합 이사장 일을 한 이 어진 시아버지, 그가 사랑하고 믿었던 둘째 아들이 이 지경이 되니 삶의 의미를 잃으신 듯 보였다. 늘 베풀어 주셨던 인자한 사랑과 따스한 미소에 이런 꼴을 보였으니 정말 죄송했다.
  한국으로 갈 땐 희망을 품고 갔지만 아무런 기적은 없었다. 대구에 있는 남편의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남편에게 고향 선산 어머니가 묻힌 곳을 묘지로 정하라고 했다. 남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듣고만 있었다. 친구 잃고 돈 잃고 이제는 목숨까지 잃게 될 남편, 남편의 묘지 자리를 자신에게 정하란 말을 들었을 때 남편의 심정은 어땠을까.
  별 차도가 없으니 마냥 있을 수도 없어 우리 부부는 다시 LA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를 당신이랑 애들이 있는 곳에 묻어 줘.”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내가 어디에 돈을 감춰놓았으니 찾아 써라.”
  “그래요? 아이 좋아라. 거기가 어디예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편은 온통 가족으로 꽉 차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농담까지 했다. 그것은 남편의 무의식적 희망이었지 현실은 아니었다. 남편이 남기고 떠나야 할 우리 가족을 걱정한 헛소리였다.
  복수는 여전히 찼고 대변은 온통 검었다. 가끔 병원에 가서 복수를 빼고 검은 용변의 치료를 받으며 사과즙과 채소즙 등으로 연명했다. 그러나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암 판정 6개월 만이다. 남편의 주검이 바퀴 달린 카트에 누이어 하얀 보자기에 덮여 가던 날이다. 남편의 주검을 본 순간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스스로 깨어났다. 나는 그때 알았다. 지극한 슬픔에는 넋이 먼저 알고 사라진다는 것을. 눈물이 되기 전에, 말하기 전 나의 넋이 먼저 배웅하러 간다는 것을 말이다.

 

-새로운 항구
  6개월여를 날마다 남편의 무덤에 갔다. 어느 한날 문득 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큰아들 우권이는 제대 후 미국으로 건너와 세리토스 커뮤니티에 다니고 있었고, 둘째 송이는 아직 오렌지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고 있다. 막내 우정은 미시간대학에 입학하여 그리로 갔다.
  가게에서 쫓겨나올 때 받은 돈, 남편이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들어둔 교육보험에서 찾은 돈, 남편의 생명보험에서 받은 돈과 LA집을 팔아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빌린 돈을 다 갚았다. 이제 남아 있는 돈이 얼마 없으니 앞으로 살 궁리를 하는 게 당연했다.
  카페테리어를 운영할 때다. 한 손님의 말이 생각났다. 손님은 우체국에서 일하는데, 급료가 시원치 않아 엘브이엔(LVN)을 하려 한다고 했다. 그 과정에 들어가려면 영어와 수학 시험을 봐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손님의 남편은 이미 알엔(RN)에 취업했는데 급료가 좋다고 했다.
  커리어 칼리지(Career College)에 찾아갔다. 그리고는 영어와 수학 두 과목 시험을 봤다. 담당선생은 수학성적이 개교 이래 제일 좋으니 알티(Respiratory Therapist)과정을 밟을 것을 권했다. 당장 찾아와 시험은 보았지만, 이 학교의 과정을 자세히 들어본 적이 없어 고민스러웠다. 수학성적이 좋았다지만 수학은 싫었고 무엇보다 2년이라는 기간과 수업료가 비쌌다. 또한, 어떤 난관이 있을지 도대체 짐작할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더군다나 국문학을 공부한 내가 수업료로 몇만 불을 빌려야 하고, 특히 53세의 이 나이가 모든 과정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집에 도착해 몇 날을 고민하고 큰애와 둘째 송이와 상의도 했다. 또 며칠을 보내면서 ‘그래 한 번 해보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야.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어!’ 하면서 결심했다.
  대학 졸업한 지 30년, 대학원 졸업한 지 15년 만에 다시 교실에 앉았다. 그러나 과연 학교수업은 턱없이 힘들기만 했다. 영어라고는 중·고등학교 영어 시간, 커뮤티니 칼리지와 어둘트 스쿨(Adult School)에서 몇 과목 들은 것이 전부였다. 한순간도 마음 놓고 느긋할 수가 없어 학교에 제일 먼저 갔다. 그리고는 후미진 곳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공부했고, 교실 문이 열리면 교실에서 공부했다. 빨리 이해가 안 가고 귀가 안 들리는 문제는 시간을 집중적으로 할애했다. 그래도 항상 불안했고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나토미엔 피지올로지(Anatomy & Physiology), 크리티컬 딩킹(Critical Thinking) 등은 겨우 쫓겨나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었는데, 하루는 담당선생이 나를 불렀다.
  “영어가 어렵지 않아요?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나는 할 수 있어요. 졸업하고 취업해 애들하고 먹고살아야 해요.”라고 말했다. 사실 속으로 엄청나게 놀랬다. 나의 얼굴을 한참 훑어 본 담당선생은 나만을 위한 영어 선생을 별도로 배정해 주었다.
  그 후 학교에서 영어 선생과 단둘이 몇 시간을 서너 번 공부했다. 거의 잘릴 뻔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이다. 학급에서 대충 반수는 도중하차했다. 영어가 모국어인 학생들도 잘려나갔다. 이러한 살벌한 수업 중 서울에 있는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김민갑이가 경찰에 잡혔대. 어쩔래? 와서 대질신문해 볼래?”
  “그럼요. 가야지요. 그 인간이 어떤 꼴을 하는지 보고 싶어요.”
  내가 김민갑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이 별스런 의미도 없으리라 짐작은 갔지만, 그래도 한 푼이라도 건졌으면 싶었다.
  분당경찰서에서 그를 만났다. 지명수배자였기에 경찰서 감방에서 지내다 포승줄에 묶여 나오는 그를 보았다. 순간 나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마구 해댔다. 김민갑이가 나오는 순간부터 나의 시선은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그는 내가 전혀 염두에 없는 듯했다. 그러나 나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김민갑은 잠시 움찔했다.
  이윽고 신분확인이 끝나고 경찰은 내가 보는 앞에서 심문에 들어갔다.
  “왜 남의 돈을 본인의 동의 없이 썼습니까?”
  “박훈익은 제 친구라 제가 돈 좀 벌어주려고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주식값이 떨어지는 것을 제가 어찌합니까?”
  반박할 수 있는 내 남편은 이미 지하에 있음을 아는 김민갑은 오히려 당당했다. “왜 본인의 동의 없이 돈을 썼느냐?”라는 것이 질문이었는데, 답변 대신 자신의 선의만을 강조하니 경찰도 별로 말이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경제사범의 초범은 법적 조치가 미약하다고 했다. 경찰도 어차피 구속되지 않을 것인데 뭐 하러 소득도 없이 이곳에 왔느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분당경찰서를 빠져나오면서 별스런 생각이 다 들었다. 애초에 남편이랑 만나지 않았다면 얼마 좋았을까 싶었다. 금전적 유혹을 견뎌내지 못해 친구를 함정에 빠뜨린 나약한 우정(友情), 그러한 우정에 남편은 자신의 형제나 처남에게도 안 준 신뢰를 김민갑은 철저히 배신한 것이다. 이곳까지 찾아온 친구의 부인에게 응당 사과라도 하는 것이 도리이련만 도리어 뻔뻔스러운 얼굴….
  아무 소득 없이 일주일 만에 LA로 돌아왔다. 예상했지만 학교 공부는 엄청나게 밀려 있었다. 매주 보는 시험,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잘리느냐 마느냐 조마조마하게 공부했는데, 한 주를 빼먹었으니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러시아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를 했던 내 짝 마크는 도중에 탈락했다. 중간고사 성적 몇 과목이 기준에 못 미쳤던 것이다. 옆에서 잘려나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라이센스를 땄다. 취업에 어려움은 없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까지 식구들 걱정했던 남편을 볼 면목이 생겨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리고 항상 남편이 벌어다 주던 돈으로 생활했던 나에 대한 믿음도 함께 생겼다.
  내가 병원에서 알티(RT)로 일하면서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남편이 생존했을 때다. 남편이 무척 기뻐한 순간이 있다. 바로 큰아들 우권이가 UCLA에 입학했을 때다. 또 하나는 막내 우정이가 미시간대학과 코넬대학교(Cornell University)에 입학신청을 했다. 미시간대학에서는 입학허가서가 도착했으나 코넬대학교에서는 통보가 안 왔다. 미시간대학에 입학했는데, 늦게 코넬대학교에서 입학허가서가 온 것이다. 남편과 우정이 그리고 내가 코넬대학교를 돌아보기 위해 셋이서 함께 갔다. 이타카(Ithaca)에 갔던 날 장대비가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심했다. 남편은 LA에서는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아들의 밝은 장래를 기대할 수 있어 그랬을까, 남편은 애들의 낭보에는 참으로 즐거워했다.
  큰아들 우권이는 참으로 집념이 강한 아이였다. 세상에 이렇게 입학하기가 힘든 사람도 드물 것이다. 제대한 뒤 LA에 있는 세리토스 커뮤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편입했을 때다. 정확하게 한국에서 삼 수, 미국에서 삼 수, 커뮤니티에서 2년, 그렇게 따지고 보면 팔 수만에 우권이가 원하던 로마린다 치과대학(Lomalinda Dental School)에 들어간 것이다. 그 과정이 참으로 순탄치 않았다.
  치과대학에 첫 번째 불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학교에 찾아가 왜 자신이 떨어졌는지에 대해 문의했다. 두 번째 불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도 또 찾아가 문의했다.
  담당자는 “너의 영어 실력이 모자라 안 됐어.” 하면서 대기자목록을 보여 주었다. 이때 담당자에게 “나, UCLA 생화학과를 졸업했어요. 내가 영어가 모자란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여기 지원생들보다 영어가 모자랄 거로 생각하세요?”
  이런 불합격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권이의 인생이 너무나 가여웠다. 서울과 이곳에서도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우권이가 절망할까 봐 정말 걱정되었다. 다행히 포기하지 않고 학교 입시위원회 위원 중 한 분을 찾아가 질문하고 또 응시하는 끈기. 어떻게 그런 일이 서울에서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한 개인 수험생을 상대해 주는 미국의 교육기관, 입학허가를 떠나 한 사람의 인격을 그렇게 존중해준 학교, 참으로 고맙다. 다행히 세 번째 해에는 입학 되어 무사히 졸업하고 개업했다. 지금 자신의 덴탈 오피스(Dental Office)는 댈러스 근처에 있다.
  몇 년째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내 딸 송이도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내가 나온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송이도 모든 과정을 잘 끝내고 같은 직장에 취업했다. 모녀가 직장 동료가 되어 함께 일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서로의 관심사가 공통된 것이라 대화가 잘 되었다. 그러면서 한 부서에서 크고 작은 일을 도와주는 일이 많아졌다. 나의 친구이자 나의 후배 박송이, 귀엽게만 키운 딸이다. 송이는 그림을 좋아해 그 방면의 학원에 다닌 적이 있었다. 그림 그릴 때는 밤을 새우는 딸이었다. 딸은 좋아하는 것에는 집중했지만,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남편은 항상 걱정했다.
  하루는 송이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엄마가 공부했던 그 교실에서 공부하며 엄마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
  그 말을 듣던 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철없이 몇 년을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녔던 송이가 철드는 소리였다. 그 이후로 송이는 사려가 깊어졌다. 우리 가족에 그런 아픔이 없었다면 송이가 저렇게 철들 수가 있었을까 싶었다.
  막내아들 우정이는 원래 조금은 조숙했다. 15살에 미국 와서 동부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외환위기로 LA로 온 막내다. 아빠가 없는 가정의 가장 노릇을 하느라 집에서 남자의 일은 막내 몫이었다. 아이케아(IKEA)에서 사온 조립식 가구의 설치나 쓰레기 버리는 일, 남자가 해야 하는 힘든 일을 했으니 일찍 철이 드는 듯했다. 가정경제를 고려했음인지 가고 싶어 했던 코넬대학교를 포기하고 미시간대학에 그대로 다녔다. 졸업 후 월스트릿에서 써티와이드 화이낸셜 애널리스트(Certified Financial Analylist)로 일하다가 지금은 뉴욕에 있는 훼드랄 리저브드 뱅크(Federal Reserved Bank)에서 일하고 있다.

 

-하얀 파도꽃
 그리도 번민이 컸던 내 직업학교,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인 듯싶다. 시작할 때의 나이가 53세였기에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것 때문에 무척 고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라도 시작한 것이 나를 수렁에서 건진 것이다. 지금 와서 53세의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젊어 보인다. 그때 나는 공부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과정을 다 끝내고 그 후로도 십 년 넘게 일하다 은퇴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오늘처럼 가끔 내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삶의 터를 옮겼던 죄(?)가 중했고 일 처리를 똑똑히 못 했던 죄가 무거워 죗값을 톡톡히 치른 셈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거센 파도가 한꺼번에 다가왔을 때의 당혹감과 좌절감을 말이다. 이제는 그 고비가 다 지났으리라고 본다. 다시는 그런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헌팅턴 비치에 바람이 불어온다. 해가 서녘 수평선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다. 그때다. 한강다리를 건너면서 본 해넘이 장면이 뇌리에 살아 숨 쉬며 아름다운 장관을 보는 듯 갑자기 다가왔다. 그게 언제 때 일인가, 내가 어릴 때 친구 석태를 만나기 위해 공항동으로 가면서 한강다리를 건너며 바라본 해넘이 장면이 아닌가.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해넘이가 지금 이 순간 뇌리에 살아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래, 그때 보았던 아름다운 해넘이다. 뒷모습. 그 멋진 뒷모습이다.”
  이걸 보여주기 위해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풋풋했던 내 어린 기억을 남편이 꺼내어 보내주었으리라 싶다.
  하루를 살다가는 태양의 뒷모습처럼, 나의 뒷모습도 저리 닮아 가고 싶다는 욕망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난파당했을 땐 참으로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물살이 잦아진 뒤의 지나온 행로를 되짚어 보면 잃은 것이 있고 얻은 것도 많았다. 세상이 온통 양지가 아니고 음지가 아니듯, 내 삶의 일에도 음양은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게 인생이니까.

 

  노을은 이미 지고 별빛이 총총하다. 간단없이 파도는 계속 밀려오며 사라져 간다. 밀려온 파도는 하얗게 부서지며 파도꽂을 예쁘게 피우고 있다. 밀물 따라 급하게 밀려와서 하얀 파도꽃을 피운 후 사라져 가는 게 꼭 우리네 인생을 닮았다 싶다.

 

                                                                                                                                                                        (끝)

 

  KakaoTalk_20160817_170217908.jpg

 

 

 

  약력:
-대구출생

 

 

-성심여대 국어국문과 및 동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

-<에세이포레> 수필신인상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원

-2016년 '밝은미래 중앙신인문학상' 넌픽션

 최우수 당선 '하얀 파도꽃'

-서울 휘경여자중학교 국어과 교사 7년 역임

-할리우드 장로병원 RT 10년 근무

 

 


  
 

 

 

 

 


웹관리자

2016.08.31 13:04:15
*.240.233.194

<심사평>


  글을 쓴다는 것은 잠재된 문학적 소양을 언어로 발휘할 줄 아는 능력이다. 특히 논픽션은 일상적인 실제 안에서 내포된 자아로 사물을 직관하고 정서적 반응을 보일 때 그 맛이 진정 살아난다.
  당선작 ‘하얀 파도꽃’은 걸어온 삶의 여정을 보여진 시간시간마다 비틀거리지 않고 현실을 관찰하며 사갯하는 자세가 엿보인 작품이다. 또한, 삶을 리얼하게 제시하는 언어를 무리하지 않게 활용할 줄 아는 재능이 뛰어나다.
  한 여인의 삶의 과정을 시간에 따라 밀도 있게 그려냈다. 다양한 방식으로 언어여행을 전개하며 나름의 미학을 서사적 구조로 잘 다루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자신의 세계관을 담은 이 글의 우수성은 정직한 생활인의 직관과 주변상황이 상징적으로 잘 형상화시킨 점이다.
  앞으로 수준 높은 글쓰기를 지면에서 만날 것을 기대한다.
                                                                                                                   -    심사위원 한우연 시인

                         

웹관리자

2017.02.22 09:30:19
*.175.39.194

                    8406d1decfd58de6534cfa71defd7c20.jpg

                                                                                     


                                                                                               바위의 눈물

                                                                                                                                                   홍용희

 

   텐트에서 가만히 귀 기울여 본다. 강으로 떨어지는 온천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살포시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은하수 옆으로 별들이 쏟아진다.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는데 나뭇잎이 후두둑 내 얼굴 위로 떨어진다.

   아무런 시설 없는 노천의 온천탕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주어보니 유황 냄새에 절었는지, 다들 시들고 거무튀튀한 잡티가

끼어 있다. 나뭇잎에는 뭉글한 슬픔 같은 게 묻어 있다. 내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살아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가슴이

저릿해진다. 대답할 말이 없다. 생수는 없고 대신 유황 물 한 모금 마셨다.

   잠들어 있는 친구 옆에 살포시 누웠다. 잠은 안 온다. 오늘 아침 친구랑 일박 이일로 짧은 여행이지만 이곳에 왔다. 레이크

이사벨라 근처 세쿼이아 국유림에 있는 사설 온천이다. 산바위에서 뜨거운 물이 흘러내리는 곳, 도회지에서 사라진 별들을

또렷이 볼 수 있는 곳이다. 때로 내 삶에 쉼표를 찍고 싶을 때, 온몸을 뜨거운 물 속에 담그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의 향기를 맡을 기회가 되어 이곳에 오게 된다.

   아침에 출발했다. 가을이 한창 여물어가는 즈음, 잿빛 구름이 드리운 하늘이 여행하기 좋은 날이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곳에 왔는데도 내 기억은 허술하기 그지없다. 가는 도중에 지피에스의 도움 받았다면 실수가 없었을 터인데, 구술로 받아 적은 새로운 길을 따라가다 방심한 결과였다. 항상 문제가 생긴 뒤 돌아보면 방심이란 오만이 도사리고 있다. 그만큼 나는, 내 생각에만 의지하다 보니 그런 결과가 나왔다 

   온천을 찾아 올라가는 길 양옆에 도열해 있는 산을 계속 바라다보았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줄기이다. 산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누런 속살에 작은 돌이 꽂혀있는 등성이, 그런 등성이에 드문드문 다 말라 창백한 풀잎을 안고 있는 또 다른 등성이, 좀 더 높은 산에 드문드문 짙은 초록빛을 띤 나무나 돌이 있는 산, 어떤 산은 온 산을 검푸른빛이 뒤덮고 있는 산, 또 어떤 산은 켜켜이 깨시루떡처럼 흐르는 시간의 변화를 담고 있는 산, 어떤 산은 부드러운 기암괴석이 온화하게 세월의 흐름을 말하는 산 또 어떤 산은 날카로운 뾰족함을 드러내어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산, 그리고 또 어떤 산은 산 이마에 하얀 눈을 일 년 내 담고 있는 산, 산의 모습을 보노라면 다양한 사람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조물주의 세심한 배려일까.

  산

  산

  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느 시름과 긴 한숨이, 누구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렸을까. 어느 곳의 비가 홍수가 되어 얼음이 되고 어느 빙하가 깨어진 바위틈에 흘러들어 자갈돌을 만들었으며 어느 자갈돌이 흙이 되어 비를 안았을까. 어느 흙에서 어떤 생명이 탄생했을까. 바다가 상전이 되고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별이 탄생하고 사라졌을까. 내가 흘린 땀방울, 엄마가 흘린 눈물, 우리가 흘렸던 한숨들은 어디 가서 무엇이 되어있을까.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뜨고 억겁의 세월이 흘렀고 또 시간이 멈추는 태고의 모습이 있는 산, 그곳에 별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흐르는 시간은 흘렀다 해도, 시간이 멈춘 그곳에 산은 산으로 남아 있고, 강물은 짙은 초록빛으로 흐르고 있다.

    커다란 산바위틈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흐르고 있다. 신기하다. 무심하고 연한 갈색을 띤 산바위 옆구리를 뚫고 온천물이 흘러내린다. 가장 연약할 것 같은 물이 가장 단단할 것 같은 바위를 뚫은 것이다. 바위가 깨어지는 순간 바위는 울었다. 그 아픈 옆구리의 상처를 유황이 섞인 뜨거운 물로 밤낮없이 치료하고 있다.

이곳 주인에게는 화수분(貨水盆)의 물이 되었지만, 나는 눈을 감고 물소리를 조용히 듣는다. 이 물소리는 조선의 송도삼절(松都三絶)인 황진이의 박연폭포 소리를 부른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바위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곳에서, 온몸을 담그고 밤하늘을 바라본다. 인걸이 가고 물이 흐르고 오늘이 또 지고 있다. 은하수가 흐르고 별들이 쏟아지는 이곳에 원시의 하늘을 보고 깊은숨을 들이킨다.

   얼마나 서 있었는지 추위가 몰려온다.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와 눈을 감고 온천물이 떨어지는 소리나 들어야겠다.

 

첨부
List of Articles
제목 작가

신광수 수필가

복권 이야기 신광수 복권 이야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미소가 지어지고 가슴이 두근두근해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설레는 것만은 사실이다. 온통 신문과 뉴스에서 몇 주째 1등이 나오지 않는다고 몇백억이라고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0의 숫자가 길게 나온다.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그 숫자를 보면 “오메, 이게 진짜 일확천금이네”. 머릿속이 쭈뼛쭈뼛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냥 스치는 생각이지만 자꾸만 Who knows?를 되새기며 사람 일을 누가 알아, 나에게도 혹시…. 돈벼락을 맞을지 아니면 ...

별이 빛나는 밤

작가 홍 성 표 수필가 

별이 빛나는 밤 홍 성 표 벽장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고흐(Vincent Willem van Grogh 1853~1890)의 유화 ‘별이 빛나는 밤’ 작품을 보게 되었다. 그냥 지나칠 뻔하다가 별이라는 제목에 내 눈을 멈추게 했다. “별? 작품명이 별로 시작한다……” 문뜩 나의 이름과 비교해 본다. 나의 이름은 홍성표(洪星杓)다. 한자로 풀이하면 ‘넓고 큰 하늘의 별 자루’란 뜻이다. 이런 이유가 겹쳐 다시 한 번 작품을 유심히 드려다 보았다. 유별나게 크게 그려진 노란빛 그믐달과 ...

감자꽃 길 따라 [1]

작가 김혜자 수필가 

감자꽃 길 따라 나의 첫 수필집이 출판되었다. 큰일 했다는 충만함에 가슴이 뛴다. 더욱이 출판에 온 정열을 쏟아 주신 스승의 배려로 조국 산천 여행길에 올랐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黃砂)를 걱정했지만, 며칠 전에 내린 비가 말끔히 씻어줬다. 에메랄드빛 바다처럼 하늘은 맑은 공기로 가득하다. 산자락을 타고 흘려 내려온 아카시아 꽃향기가 내 후각을 흔들고 지나간다. 향기를 붙잡아 손으로 어루만져 보고 싶지만 갈 길이 멀다. 뜨겁게 달구던 시심(詩心)을 외면하고 구름이 흘러가듯 나도 떠난다. 중부 내륙 고속도로를 달린...

하얀 파도꽃(넌픽션 당선작) [2]

작가 홍용희 

하얀 파도꽃 홍용희 -나의 항구 기온이 화씨 100도를 넘던 날 오후, LA에서 가까운 헌팅턴 비치(Huntington Beach)에 갔다. 끝없이 펼쳐진 고운 모래 위에 샛노란 햇살이 비치고 파도는 포말이 채 지기도 전 또 다른 하얀 파도꽃을 피우고 있다. 수평선에 걸린 해의 뒷모습은 내 모국의 석양을 방불케 하다가 주홍빛으로 하늘을 가득 물들인다. 태양의 뒷모습은 검붉은 울음을 토하게 했던 내 지난날을 불러왔다. 미국에 사는 여고 동창인 단짝 친구, 남자 이름을 가진 강석태. 지금은 수잔 리,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이씨가 된 친구다....

처용가 뒤집어 보기

작가 명계웅 평론가 

처용가 뒤집어 보기 명계웅 예전 국어고문시간에 우리가 배웠던 삼국유사에 전해진 신라 향가 ‘처용가’는,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A.D 879년경 신라 헌강왕의 눈에 들어 급간이라는 벼슬과 미모의 아내도 얻어 정사도 돌보며, 동경 밝은 달밤에 밤드리 노딜다가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가 보니 “가라리 네히어라. 둘은 내해엇고 둘은 뉘해인고? 본대 내해다마는 앗아날(빼았겼으니) 어찌하릿고!” 그러면서 처용은 불륜현장을 덮치지를 아니하고, 그냥 밖으로 나와 달밤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고 전해...

주평 선생님과 만남 그리고 이별 [2]

작가 남중대 수필가 

주평 선생님과 만남 그리고 이별 남중대 “중대야. 내가 90살까지는 활동할 수 있겠제?” 선생님은 나와 책상머리에 앉을 때마다 나에게 묻고 확인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안함이었을까? 아니면 멈출 줄 모르는 연극과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을까? 1990년, 내가 이곳 산호세에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기 위해 이민보따리를 풀면서, 주평 선생님과 숙명적인 만남은 시작되었다. 한국아동극의 개척자로, 수많은 아동극본을 발표하고 그 극본으로 한국 최초로 아역배우를 연극무대로, 영화스크린으로 배출해낸 아...

나의 수의 [1]

작가 허정자 수필가 

나의 수의 허 정 자 오늘 모처럼 집에 쉬면서 이매방류의 살풀이춤을 아이패드로 보다가 생각난 것이 있다. 몇 년 전 신문 살풀이춤 강습이 다섯 번에 걸쳐 있다는 기사를 읽고 꼭 가서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강습이 있었는데 첫 번째 강습을 못하게 되었다. 마침 그날 무슨 행사가 있어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단체장을 맡고 있던 때라 빠질 수가 없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에 발레를 했으나 언젠가 살풀이춤을 보고 완전히 그 춤에 빠진 적이 있다. 그러나 고전무용은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다. 그...

하얀 배 [1]

작가 이언호 희곡작가 

하얀 배 이언호 미주에서 우리말 방송과 우리말 신문이 얼마나 더 발전할 것인가? 어느 날 친구와 <미국 속의 한국말 언론에 관한 노파심에 대해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이 미국 땅에서의 한국말 언론은 1,5세가 기성이 될 때쯤 해서는 그 존재 여부도 불투명해질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 친구는 미주에서의 한국 언론의 발전에 관해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말했고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말했다. 그 친구는 한국어 신문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니 그 흐름의 예즉같은 것이 있겠지만, .다시 말하면 그 ...

치마폭의 찐빵 [1]

작가 박영옥 수필가 

치마폭의 찐빵 박 영 옥 찐빵은 나에게 참 정겨운 빵이다. 언제 어디서 먹어도 맛있고 또 먹고 싶어진다. 세월 따라 많은 것은 변하고 또 변하고 싶어 안달인데 찐빵은 한결같다. 고작, 속에 넣는 앙꼬나 달라졌지 모양도 크기도 별달라진 것이 없다. 세상 어디에 우리네 찐빵만큼 사랑받는 빵이 있을까.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라도 어울리는 참 소박한 빵이다. 한겨울, 갓 쪄낸 찐빵을 호호 불면서 옹골차게 든 앙꼬와 빵 겉 부분을 적당히 한 입 베어 잘 섞어 먹는 맛은 우리만 아는 비법일 게다. 빵을 다 먹을 때까지 ...

제자의 고백 -2014년 《한미문단》수필 가작- [2]

작가 이복자 수필가 

제자의 고백(告白) 이 복 자 그 시절은 6·25사변 직후라 모두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고향에 있는 모교인 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처음 시작하는 직장생활이라 설렘과 두려웠던 때가 까마득한데 추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있다. 건물은 폭격으로 반 이상이 폐허 되고 넓은 강당과 교실 10여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강당을 여섯 교실로 나누었다. 그중 한구석에서 학생들은 송판에 네 다리를 세운 조그만 책상을 각자 가져왔다. 찬 마룻바닥에 앉아 오들오들 떨면서 매서운 추운 날씨였지만 ...

맥다방의 랩소디 [1]

작가 지상문 수필가 

맥 다 방 의 랩 소 디 (Mc. Donald’s Rhapsody) 지 상 문 길가 창 옆으로 자리를 잡아 창 밖을 내다본다. 차들이 달려오고 달려간다. 사람의 물결이 파도처럼 기세 좋게 밀고 와서 철석 한 번 때리고 부서진다. 부서진 흔적은 밀려 내려 다음 파도에 휩싸인다. 오후 한 시가 넘으면 맥 다방은 그리 붐비지 않는다. 옷깃 스치는 소리와 함께 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옆자리에 앉는 사람이 있다. 영감이 된 지 꽤 오래된 자다. 그렇게 불러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나이다. 남보다 10년은 먼저 와서 가발장사로 한 몫 잡고 전자제...

텃밭 [1]

작가 강정애 수필가 

텃밭 강 정 애 오늘 정원사에게 뒷마당의 텃밭을 일궈달라고 부탁했다. 올해는 아무리 바빠도 텃밭 농사를 하려고 생각했다. 7년 전에 캘리포니아에 이사와 첫 3년간 열심히 텃밭에 여러 가지 채소를 길러 먹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시골 마을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항상 그 시절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고 함께 뜀박질하던 친구들의 풋풋한 향수가 달려오는 듯 한때가 자주 있다. 그중에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기억은 친정집 뒷마당의 텃밭이다....

독서의 묘미 [1]

작가 신성철 수필가 

독서의 묘미 瑞奉 신성철 93세 노인이다. 어릴 때부터 책이 좋아 가까이에 두고 평생을 읽고 있다. 사람마다 읽는 방향이 다르다. 그래서 지금 쓰는 묘미는 내 묘미다. 늙은이의 넋두리다. 일본사람들이 36년 동안 우리나라 역사책은 전국을 뒤져서 다 태워버렸다. 우리 역사를 자기들 맘대로 새로 썼다. 이 역사책이 제국사관 역사책이다. 상고사에서 단군시대가 신화라고 송두리째 지워 버렸다. 그러나 광복이 되고 1983년부터 윤내현 교수가 피나는 노력으로 참된 우리나라 상고사를 찾아내었다. 교과서까지 수정하게 하였다. 중국의 &...

8부 능선을 따라가라 [1]

작가 이주혁 

8부 능선을 따라가라 이 주 혁 비가 갠 저녁, 앞산의 등고선이 파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뚜렷하다. 학군단 유격 훈련으로 야간 산행을 할 때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산등성을 따르지 말고 8부 능선을 따라가라!”라는 교관의 명령이 생각난다. 어쩌면, 지난날의 나의 삶은 남보다 드러나기 위하여 산등성을 타려고 애써온 것 같다. 1984년, 이민 온 약사들이 미국에서 약학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도 평가시험을 거처 약사 면허 시험을 볼 수 있는 제도가 시작되었다. 가주 한인 약사회를 중심으로 미국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

오쏘

작가 정덕수 수필가 

오쏘(곰) 정덕수 해 저무는 저녁, 나의 충견 퍼픈과 함께 눈 덮힌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신바람이 난 퍼픈은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대지에 침입자가 된 듯 이리 뛰고 저리 구르며 깨끗한 눈밭을 마구 뭉개고 다닌다. 멀리 앞질러가던 갑자기 동작을 멈춘 퍼픈이 전방을 노려보며 다급하게 짖어대고 있다. 그걸 본 나는 눈 위를 버벅대며 퍼픈의 발자국 따라 그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착하니 까만색의 짐승 새끼가 눈 속에 반쯤 묻혀 있었다. 이놈은 퍼픈과 나를 번갈아 보며 입이 찢어지라 괴성을 질러댔고, 파란 눈은 공포에 질려 ...

파푸아 뉴기니어 생활 [1]

작가 배원주 수필가 

파푸아 뉴기니어 생활 배원주 오늘 DVD를 빌려 영화 ‘아바타‘를 봤다. 이미 본 작품이지만 구상과 화려한 화면 그리고 생생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30여 년 전, 열대지방에서 근무할 때 생각이 많이 났다. 원시 부족과 문명인이 자원쟁취 문제로 싸우는 3D입체 애니메이션 영화다. 나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 근무하고 돌아온 지 2년 만에 1980년대 중반, 파푸아 뉴기니어(Papua-neuguinea) 현장에서 2년 동안 파견근무를 했다. 이 나라는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 위도상 적도 바로 밑 남반구에 있다. 호주로부터 독...

루비와 샌디 [2]

작가 김평화 수필가 

루비와 샌디 김 평 화 한국에 온 지 6개월, 우리 부부는 손녀의 돌잔치를 위해 남편까지 이곳에 와있다가 다시 하와이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내가 쓰던 방에 널려있는 소지품과 물건들을 가방에 넣으며 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시원섭섭했다. 그동안 예쁜 손녀를 출산한 딸을 잠시 도와주기 위해 와 있었다. 루비와 샌디는 눈을 크게 뜨고 꼬리를 흔들면서 내 주위를 돌고 있는 있다. 뭔지 모르지만, 이상한 느낌을 받았나 싶다. 처음에는 루비와 샌디는 함께 하와이로 같이 가기로 하고 수속을 다 받아 놓은 터였다. 딸은 사위가 일 가...

내가 겪은 현대의학

작가 안상선 수필가 

내가 겪은 현대의학 안 상 선 눈부신 현대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이 100세를 넘나들며 사람들은 건강에 관해 많은 관심을 둔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염색체 변형을 이용한 선천성 질환의 근본적인 치료와 예방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인간복제의 가능성은 의학의 도덕성과 윤리관에 대한 열띤 토론이 한창이다.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의 초조하고 마음 졸이는 나날들이 있는가 하면, 불법으로 사람의 장기를 채취하여 이를 매매한다는 외국기사를 접할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마음이 착잡해진다. 내가 평생 몸담아왔던 신...

협곡에서 본 미소 [1]

작가 이숙이 

협곡에서 본 미소 이숙이 돌산이었을까? 흙으로 빚어진 바위였을까? 비와 바람과 오랜 세월이 협곡을 만들고 거대한 바위를 갈라놓아 희귀한 모양이 되어 있다. 구불구불 갈라진 틈새로 태양 빛이 스며들 때 프리즘 작용의 신비로운 색상과 모양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갈라진 바위틈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의 머리는 위로 향해 젖혀져 있고 카메라 들어 올린 두 팔도 위로 뻗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심오하게 만들어진 무늿결 바위 모양에 감탄하며 카메라에 담는다. 많은 관광객이 비좁고, 조금은 어두운 곳에서 숨죽이고 한 발...

그리운 봉선화 [1]

작가 정순옥 수필가 

그리운 봉선화 蒑池 정순옥 봉선화. 왜 이리 고향의 봉선화가 보고 싶은 걸까? 내가 고향에 두고 온 것 중에서 가장 많이 생각나게 하는 꽃이다. 요즈음도 눈 감고 고향 생각을 하면 봉숭아가 터지고 눈 뜨고 숟가락을 만져도 따다닥 터지는 소리로 변한다. 손을 살짝이라도 대면 씨방을 터트리면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봉선화 생각뿐이다. 어느 날부터 나는 재미동포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를 앙다물고 살아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씀 따라 힘든 디아스포라의 삶에서도 고향을 잊지 않고 인내하며 살아야 했다. 그 힘의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