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다방의 랩소디

조회 수 7866 추천 수 7 2014.11.22 19:45:31
작가 : 지상문 수필가 

 

 

맥 다 방 의  랩 소 디
(Mc. Donald’s Rhapsody)

                                                                                                                       지 상 문   
                                                                                                                                                             

 길가 창 옆으로 자리를 잡아 창 밖을 내다본다. 차들이 달려오고 달려간다. 사람의 물결이 파도처럼 기세 좋게 밀고 와서 철석 한 번 때리고 부서진다. 부서진 흔적은 밀려 내려 다음 파도에 휩싸인다.
   오후 한 시가 넘으면 맥 다방은 그리 붐비지 않는다. 옷깃 스치는 소리와 함께 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옆자리에 앉는 사람이 있다. 영감이 된 지 꽤 오래된 자다. 그렇게 불러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나이다. 남보다 10년은 먼저 와서 가발장사로 한 몫 잡고 전자제품으로 두 몫 잡은 강 영감이다. 뒤따라 들어온 박 선생이 곧바로 커피를 주문해 들고 자리로 와서 눈웃음으로 인사한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는 향이 짙다.
 날씨를 이야기하다가 건강을 말한다. 병원과 의사에 불평하다가 건강식품의 과대광고를 비난하며 욕을 한다. 그들 식품을 먹으면 아픔도 죽음까지도 없다는 투의 선전문구가 역겹다.    
 세월을 말하다 배고픔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요즘 젊은이들의 무질서를 탓한다. 자신들의 지난날들은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벌써 여러 번 되풀이 되어 서로가 다 잘 알고 있어 자랑해보아야 잔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끼었던 반지도 고급 시계도 집에 두고 다닌다. 하지만 한때 잘 나가던 일과 힘들게 헤쳐나간 과거의 한 가닥 자랑이 꿈틀거리며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기도 한다.
   자신의 주변일 보다는 차원이 높은 역사이야기를 꺼낸다. 일본의 침탈과 잔학성 그리고 그들의 교활함을 고발한다. 위안부소녀상의 건립에 대한 그들의 방해와 억지 행동에 침을 뱉는다. 한국역사를 뒤집어 놓더니 일본 자신의 역사마저 비틀어 그들의 못난 과거를 치장하는 옹졸함을 성토한다. 6·25남침 때에 길 건너 식당 종업원이 팔에 빨간 헝겊을 두르고 내 세상 왔다며 손을 휘저으면서 소리소리 질러 온 동내를 겁주던 일도 회상한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이산가족이 빠질 수 없다. 헤어져 60년, 90줄의 나이, 나이 들어가며 사라져가는 사람들, 그들의 한을 풀어줄 사람 그런 영웅적인 정치가는 끝내 나타나지 않을 것인가 한탄한다. 휴전 후 일거리도 먹거리도 없어 배고파 헤매던 일에 맞장구를 치며 쓴웃음을 짓는다. 조국의 정치를 한탄하다가 돈 먹는 하마가 되어버린 국회의원들을 도마에 올려놓고 몰매를 준다.
   창밖에 한바탕 비가 뿌리자 색색의 우산이 인공위성처럼 둥둥 떠다닌다. 입이 궁금하다. 잔에 따끈한 커피를 다시 받아온다. 20전이 싼 노인 우대 값에다 다시 빈 잔을 채울 수 있으니 이만한 위안이 없을 성 싶다. 다시 날씨를 이야기하다가 말거리가 동나면 얼마간 침묵한다.
   통로 건너편에 조금은 젊은 사람 둘이 자리를 잡는다. 동포다. 척 보면 안다. 60대가 채 되지 않을 젊을 사람들이다. 이쪽을 흘깃 보고는 얼른 고개를 돌린다. 못 볼 것을 본 듯해한다.
    엊그제 일이 떠오른다. 장로라는 명예를 목에 걸고 돌아치며 어깨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밉살스러워한다. 하기야 그런 사람도 있어야 동아리가 돌아가게 되리라.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모자라는데 어쩌랴 그만한 흠집은 덮어줄 수밖에. 필요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옆자리에 박 선생이 거든다. 그 정도는 약과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평생 친구라도 되는 듯 있는 말 없는 말 보태어 떠벌리어 듣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단다. 남의 말을 많이 하면 자칫 잘못 전달되어 진실이 가려져 피해를 보게 된다고 열변을 토한다.
   비 지난 다음 해가 서쪽에서 기우뚱한다. 배가 좀 출출한 탓인지 군대 시절이 생각나기도 한다. 휴전되어 전쟁이 끝 난지도 여러 해 되었는데 군대는 여전히 가난했다. 휴전선을 지키는 군대에 갓 올라온 이등병이 밥을 두 번 타 먹다 배식 병장에게 들켰다. 그때의 밥그릇은 스테인리스 철판으로 만들고 손잡이가 달려있어 아주 편리하고 튼튼했다. 미군에서 보급되어 미식기라 불렀다. 배식병장이 들고 있는 그 미식기를 빼앗아 이등병의 머리에 여러 번 날려버렸다.
    배식병장은 밥 타러 오는 군인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본다. 입술을 보면 다 안단다. 비록 꽁치 국일망정 따듯할 때 먹으면 입술이 붉어진다고 한다. 군대에서 밥 푸는 배식병장의 손은 날렵하다. 주걱으로 밥을 살살 펴서 휙 날려 그릇에 뿌린다. 그릇에 칠하듯 밥을 얇게 발라준다. 요즈음 군대의 식사는 마음껏 골라 먹도록 푸짐하다니 놀라운 발전이다. 오히려 국방부는 군인들의 비만을 걱정해 준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연평도에 북한 포탄이 날아오자 주둔 장병이 울면서 집으로 전화했단다. ‘엄마 나 어떡해’. 그 군인은 왜 거기 있었나.
   먹거리가 산더미라도 새벽 별 보며 나서고 저녁별을 등지고 들어서는 일상에 먹는 시간을 아끼는 버릇에도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은 것도 시간이 모자라서일까. 그 흔한 극장이나 영화 그리고 운동경기장 한 번 가지 못하고 좋아하는 여행도 모두 미루며 살았다. 윗사람에게도 아랫사람에게도 인사 한번 제대로 못 했다. 양반체면 다 팽개치고 톱니바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돌고 돌았다. 모든 대화는 OK 하나로 통일되어 굳어버렸다. 청년과 장년을 투자하기 어언 40년, 눈앞에서 노년이 조용히 짙어가고 있다. 서걱거리는 것은 가슴에 쌓인 외로운 응어리가 부딪치는 소리이리라.
   창밖에 땅거미가 내린다. 길바닥의 차선이 오히려 뚜렷해진다. 그렇다. 사람은 줄을 긋고 줄 따라 살아간다. 또한, 세월의 줄에서도 벗어나지를 못한다. 지구에도 온통 줄을 그어놓고 씨줄이라 날줄이라 이름 했다. 그 줄이 세상 질서를 지키기도 삶을 압박하기도 한다. 씨줄도 날줄도 본 사람은 없다. 처음부터 줄 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 줄을 모두 걷어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때로는 줄이 평안을 주기도 해서 걷어낸다는 것은 신을 부정하는 어려움과 맞먹게 된다는 생각도 든다.
   창밖에 나무들이 몹시 흔들린다. 떨어진 잎들이 갈 바를 모르고 몰려다니다 더러는 멀리 사라지기도 한다. 맥 다방의 등불이 밝아진다. 출출하다. 얼큰한 찌개가 코끝에 어른거린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주지 않은 배짱에 놀라며 한편 미안하다. 나서는 뒤 통수가 켕긴다.

 

지상문.jpg

 


                                                                                                                         
약력:
경기공고 건축과 졸업
2010년부터 미주한국일보 오피니언 연재

한국문협 미주지회 회원
        
 


웹관리자

2015.03.17 10:04:49
*.175.39.194

Gardenia_jasminoides_cv1.jpg




                 



                                                                                                 치자나무

                                                                                                                                                    지 상 문
     
  무쇠로 만든 큰 솥뚜껑을 뒤집어 화덕 위에 올려놓고 돼지기름을 두르기만 해도 구수한 냄새가 코끝에 달라붙곤 했다. 노릇노릇 익어가는 빈대떡을 보며 군침을 삼키던 때가 그리워진다. 잔칫집에는 으레 녹두부침개가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로 이것이 빈대떡이다.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것이 치자(梔子)다. 녹두반죽에 섞어 빈대떡을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지혜로 치자를 쓰곤 했다. 치자는 이렇게 음식에도 쓰이지만, 이뇨제와 해열제로 쓰인다. 또한, 관상용으로도 훌륭한 나무로 대접을 받는다. 우리말 사전에 치자는 꼭두서닛과 상록 활엽관목으로 약제와 염료로 쓰인다고 풀이하고 있다.
   이 치자나무를 화분에 심어 잘 가꾸면 꽃과 향기와 열매가 어우러져 멋있는 분재가 된다는 글을 본 일이 있다. 이에 발동이 걸려 치자나무 모시기에 사반세기, 아직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리무중에 서성이고 있다. 첫 번째는 장모님이 방문 오실 때 치자를 부탁했다. 두 번째는 한국방문 할 때 종로 5가 씨앗가게를 뒤져 어렵사리 구해왔다. 그다음에는 아내가 한국에 간 길에 친지에게 얻어왔다. 지난봄에는 남아있던 치자를 통째로 화분에 심고 들여다보기를 백일정성, 하지만 치자는 시침을 떼고 나 몰라라 싹을 보이지 않는다. 치자와 인연이 없는가 아니면 고집불통인 듯한 치자가 신토불이(身土不二)로 고국 땅만을 그리는 본능적 심통일까.
   이곳에도 치자는 있다. 열매는 맺지 않으나 향기 좋기로 이름난 꽃치자(Gardenia)이다. 나무마다 특성을 알아채는데 많은 정성과 시간이 들어야 한다. 나무를 가꾸다 보면 배우게 되는 일이 한둘이 아니다. 물주기도 쉽지 않다. 물이 잘 빠지지 않으면 뿌리가 숨을 쉬지 못해 썩기도 한다. 강한 햇볕에 오래 노출되면 견디기 힘들어한다. 화분에 심은 나무는 하루도 거르지 말고 물을 주고 반그늘에 두어야 싱싱하게 자란다. 바짝 마른 흙은 흡수하지 못해 먼저 물을 한번 적셔주고 얼마 있다가 다시 주면 잘 숨어들어 간다.
   어떤 나무는 가물거나 갑자기 추위가 닥치면 채 자라기도 전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 한다. 종족을 남기려는 눈물겨운 본능의 비상대책이 아닌가 한다. 나무를 옮겨심기에는 성장이 멈추는 늦가을부터 이른 봄이 좋다고 본다. 분재를 만들려 할 때, 그 뿌리가 너무 길거나 많으면 잘 드는 칼과 가위로 잘라내야 얕은 화분에 앉힐 수 있게 된다.
  옛글에 호이식불목근X(好移植不木根X)라는 말이 있다. X에 맞는 글자를 넣어 문장을 완성하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른다’는 절(絶)자를 넣어 나무를 옮겨 심을 때 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나무를 많이 다루어 본 사람의 답은 다르다. 그리고 ‘안다’는 뜻의 알 지(知)자를 써서 문장을 살린다. 好移植不木根知라함은 그 나무의 뿌리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심조심 나무를 다루라는 것이 숨겨진 뜻이 된다.
  삶이 넉넉해지면서 취미생활이 여러모로 퍼져있다. 하지만 취미라고 호락호락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많은 노력과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한다. 취미를 광물성, 식물성 그리고 동물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광물성 취미는 그림과 도자기에 수석과 우표 등과 동전 남의 글을 모으는 일이다. 식물성 취미는 나무나 꽃등을 좋아하는 것이고 동물성 취미로는 가축이나 물고기 그리고 새를 기르는 것이라 하겠다.
  사냥이나 낚시가 동물성 취미에 든다면 이성을 낚는 청춘 사업은 무슨 취미에 속할까 판단이 쉽지 않다. 불로초를 찾아다니는 것이 식물성 취미라면 출세의 연줄에 허리를 굽실거리는 것과 몇 푼 집어 던지고 회장감투를 쓰고 거들 것은 어느 취미에 들까 자못 궁금하다.
   아직도 치자나무를 모셔보겠다는 뜻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나무를 기른다는 것은 동물을 돌보는 일과는 또 다른 정성이 있어야 함을 알게 됐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기는 나무나 바람이나 같다. 둘이 만나야 흔들며 소리를 내어 서로의 존재를 나타낸다. 산타아나 계절풍이 바나나 잎을 갈래갈래 찢어놓으며 그 힘을 뽐내기도 한다.
   뜰을 한 바퀴 돈 나비가 담 너머로 사라지자 바람은 불어도 조용한 오후다. 이 겨울에는 비가 흠씬 내려 캘리포니아의 무지개를 바라볼 수 있는 날이 많아지면 좋겠다.
  

첨부
List of Articles
제목 작가

신광수 수필가

복권 이야기 신광수 복권 이야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미소가 지어지고 가슴이 두근두근해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설레는 것만은 사실이다. 온통 신문과 뉴스에서 몇 주째 1등이 나오지 않는다고 몇백억이라고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0의 숫자가 길게 나온다.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그 숫자를 보면 “오메, 이게 진짜 일확천금이네”. 머릿속이 쭈뼛쭈뼛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냥 스치는 생각이지만 자꾸만 Who knows?를 되새기며 사람 일을 누가 알아, 나에게도 혹시…. 돈벼락을 맞을지 아니면 ...

별이 빛나는 밤

작가 홍 성 표 수필가 

별이 빛나는 밤 홍 성 표 벽장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고흐(Vincent Willem van Grogh 1853~1890)의 유화 ‘별이 빛나는 밤’ 작품을 보게 되었다. 그냥 지나칠 뻔하다가 별이라는 제목에 내 눈을 멈추게 했다. “별? 작품명이 별로 시작한다……” 문뜩 나의 이름과 비교해 본다. 나의 이름은 홍성표(洪星杓)다. 한자로 풀이하면 ‘넓고 큰 하늘의 별 자루’란 뜻이다. 이런 이유가 겹쳐 다시 한 번 작품을 유심히 드려다 보았다. 유별나게 크게 그려진 노란빛 그믐달과 ...

감자꽃 길 따라 [1]

작가 김혜자 수필가 

감자꽃 길 따라 나의 첫 수필집이 출판되었다. 큰일 했다는 충만함에 가슴이 뛴다. 더욱이 출판에 온 정열을 쏟아 주신 스승의 배려로 조국 산천 여행길에 올랐다.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黃砂)를 걱정했지만, 며칠 전에 내린 비가 말끔히 씻어줬다. 에메랄드빛 바다처럼 하늘은 맑은 공기로 가득하다. 산자락을 타고 흘려 내려온 아카시아 꽃향기가 내 후각을 흔들고 지나간다. 향기를 붙잡아 손으로 어루만져 보고 싶지만 갈 길이 멀다. 뜨겁게 달구던 시심(詩心)을 외면하고 구름이 흘러가듯 나도 떠난다. 중부 내륙 고속도로를 달린...

하얀 파도꽃(넌픽션 당선작) [2]

작가 홍용희 

하얀 파도꽃 홍용희 -나의 항구 기온이 화씨 100도를 넘던 날 오후, LA에서 가까운 헌팅턴 비치(Huntington Beach)에 갔다. 끝없이 펼쳐진 고운 모래 위에 샛노란 햇살이 비치고 파도는 포말이 채 지기도 전 또 다른 하얀 파도꽃을 피우고 있다. 수평선에 걸린 해의 뒷모습은 내 모국의 석양을 방불케 하다가 주홍빛으로 하늘을 가득 물들인다. 태양의 뒷모습은 검붉은 울음을 토하게 했던 내 지난날을 불러왔다. 미국에 사는 여고 동창인 단짝 친구, 남자 이름을 가진 강석태. 지금은 수잔 리,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라 이씨가 된 친구다....

처용가 뒤집어 보기

작가 명계웅 평론가 

처용가 뒤집어 보기 명계웅 예전 국어고문시간에 우리가 배웠던 삼국유사에 전해진 신라 향가 ‘처용가’는,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A.D 879년경 신라 헌강왕의 눈에 들어 급간이라는 벼슬과 미모의 아내도 얻어 정사도 돌보며, 동경 밝은 달밤에 밤드리 노딜다가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가 보니 “가라리 네히어라. 둘은 내해엇고 둘은 뉘해인고? 본대 내해다마는 앗아날(빼았겼으니) 어찌하릿고!” 그러면서 처용은 불륜현장을 덮치지를 아니하고, 그냥 밖으로 나와 달밤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고 전해...

주평 선생님과 만남 그리고 이별 [2]

작가 남중대 수필가 

주평 선생님과 만남 그리고 이별 남중대 “중대야. 내가 90살까지는 활동할 수 있겠제?” 선생님은 나와 책상머리에 앉을 때마다 나에게 묻고 확인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안함이었을까? 아니면 멈출 줄 모르는 연극과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을까? 1990년, 내가 이곳 산호세에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기 위해 이민보따리를 풀면서, 주평 선생님과 숙명적인 만남은 시작되었다. 한국아동극의 개척자로, 수많은 아동극본을 발표하고 그 극본으로 한국 최초로 아역배우를 연극무대로, 영화스크린으로 배출해낸 아...

나의 수의 [1]

작가 허정자 수필가 

나의 수의 허 정 자 오늘 모처럼 집에 쉬면서 이매방류의 살풀이춤을 아이패드로 보다가 생각난 것이 있다. 몇 년 전 신문 살풀이춤 강습이 다섯 번에 걸쳐 있다는 기사를 읽고 꼭 가서 배워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강습이 있었는데 첫 번째 강습을 못하게 되었다. 마침 그날 무슨 행사가 있어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단체장을 맡고 있던 때라 빠질 수가 없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에 발레를 했으나 언젠가 살풀이춤을 보고 완전히 그 춤에 빠진 적이 있다. 그러나 고전무용은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다. 그...

하얀 배 [1]

작가 이언호 희곡작가 

하얀 배 이언호 미주에서 우리말 방송과 우리말 신문이 얼마나 더 발전할 것인가? 어느 날 친구와 <미국 속의 한국말 언론에 관한 노파심에 대해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이 미국 땅에서의 한국말 언론은 1,5세가 기성이 될 때쯤 해서는 그 존재 여부도 불투명해질 것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 친구는 미주에서의 한국 언론의 발전에 관해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말했고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말했다. 그 친구는 한국어 신문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니 그 흐름의 예즉같은 것이 있겠지만, .다시 말하면 그 ...

치마폭의 찐빵 [1]

작가 박영옥 수필가 

치마폭의 찐빵 박 영 옥 찐빵은 나에게 참 정겨운 빵이다. 언제 어디서 먹어도 맛있고 또 먹고 싶어진다. 세월 따라 많은 것은 변하고 또 변하고 싶어 안달인데 찐빵은 한결같다. 고작, 속에 넣는 앙꼬나 달라졌지 모양도 크기도 별달라진 것이 없다. 세상 어디에 우리네 찐빵만큼 사랑받는 빵이 있을까.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라도 어울리는 참 소박한 빵이다. 한겨울, 갓 쪄낸 찐빵을 호호 불면서 옹골차게 든 앙꼬와 빵 겉 부분을 적당히 한 입 베어 잘 섞어 먹는 맛은 우리만 아는 비법일 게다. 빵을 다 먹을 때까지 ...

제자의 고백 -2014년 《한미문단》수필 가작- [2]

작가 이복자 수필가 

제자의 고백(告白) 이 복 자 그 시절은 6·25사변 직후라 모두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였다. 나는 고향에 있는 모교인 초등학교로 발령받았다. 처음 시작하는 직장생활이라 설렘과 두려웠던 때가 까마득한데 추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남아있다. 건물은 폭격으로 반 이상이 폐허 되고 넓은 강당과 교실 10여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강당을 여섯 교실로 나누었다. 그중 한구석에서 학생들은 송판에 네 다리를 세운 조그만 책상을 각자 가져왔다. 찬 마룻바닥에 앉아 오들오들 떨면서 매서운 추운 날씨였지만 ...

맥다방의 랩소디 [1]

작가 지상문 수필가 

맥 다 방 의 랩 소 디 (Mc. Donald’s Rhapsody) 지 상 문 길가 창 옆으로 자리를 잡아 창 밖을 내다본다. 차들이 달려오고 달려간다. 사람의 물결이 파도처럼 기세 좋게 밀고 와서 철석 한 번 때리고 부서진다. 부서진 흔적은 밀려 내려 다음 파도에 휩싸인다. 오후 한 시가 넘으면 맥 다방은 그리 붐비지 않는다. 옷깃 스치는 소리와 함께 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옆자리에 앉는 사람이 있다. 영감이 된 지 꽤 오래된 자다. 그렇게 불러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나이다. 남보다 10년은 먼저 와서 가발장사로 한 몫 잡고 전자제...

텃밭 [1]

작가 강정애 수필가 

텃밭 강 정 애 오늘 정원사에게 뒷마당의 텃밭을 일궈달라고 부탁했다. 올해는 아무리 바빠도 텃밭 농사를 하려고 생각했다. 7년 전에 캘리포니아에 이사와 첫 3년간 열심히 텃밭에 여러 가지 채소를 길러 먹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던 기억이 난다. 시골 마을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항상 그 시절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고 함께 뜀박질하던 친구들의 풋풋한 향수가 달려오는 듯 한때가 자주 있다. 그중에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기억은 친정집 뒷마당의 텃밭이다....

독서의 묘미 [1]

작가 신성철 수필가 

독서의 묘미 瑞奉 신성철 93세 노인이다. 어릴 때부터 책이 좋아 가까이에 두고 평생을 읽고 있다. 사람마다 읽는 방향이 다르다. 그래서 지금 쓰는 묘미는 내 묘미다. 늙은이의 넋두리다. 일본사람들이 36년 동안 우리나라 역사책은 전국을 뒤져서 다 태워버렸다. 우리 역사를 자기들 맘대로 새로 썼다. 이 역사책이 제국사관 역사책이다. 상고사에서 단군시대가 신화라고 송두리째 지워 버렸다. 그러나 광복이 되고 1983년부터 윤내현 교수가 피나는 노력으로 참된 우리나라 상고사를 찾아내었다. 교과서까지 수정하게 하였다. 중국의 &...

8부 능선을 따라가라 [1]

작가 이주혁 

8부 능선을 따라가라 이 주 혁 비가 갠 저녁, 앞산의 등고선이 파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뚜렷하다. 학군단 유격 훈련으로 야간 산행을 할 때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산등성을 따르지 말고 8부 능선을 따라가라!”라는 교관의 명령이 생각난다. 어쩌면, 지난날의 나의 삶은 남보다 드러나기 위하여 산등성을 타려고 애써온 것 같다. 1984년, 이민 온 약사들이 미국에서 약학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도 평가시험을 거처 약사 면허 시험을 볼 수 있는 제도가 시작되었다. 가주 한인 약사회를 중심으로 미국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

오쏘

작가 정덕수 수필가 

오쏘(곰) 정덕수 해 저무는 저녁, 나의 충견 퍼픈과 함께 눈 덮힌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신바람이 난 퍼픈은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대지에 침입자가 된 듯 이리 뛰고 저리 구르며 깨끗한 눈밭을 마구 뭉개고 다닌다. 멀리 앞질러가던 갑자기 동작을 멈춘 퍼픈이 전방을 노려보며 다급하게 짖어대고 있다. 그걸 본 나는 눈 위를 버벅대며 퍼픈의 발자국 따라 그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착하니 까만색의 짐승 새끼가 눈 속에 반쯤 묻혀 있었다. 이놈은 퍼픈과 나를 번갈아 보며 입이 찢어지라 괴성을 질러댔고, 파란 눈은 공포에 질려 ...

파푸아 뉴기니어 생활 [1]

작가 배원주 수필가 

파푸아 뉴기니어 생활 배원주 오늘 DVD를 빌려 영화 ‘아바타‘를 봤다. 이미 본 작품이지만 구상과 화려한 화면 그리고 생생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30여 년 전, 열대지방에서 근무할 때 생각이 많이 났다. 원시 부족과 문명인이 자원쟁취 문제로 싸우는 3D입체 애니메이션 영화다. 나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 근무하고 돌아온 지 2년 만에 1980년대 중반, 파푸아 뉴기니어(Papua-neuguinea) 현장에서 2년 동안 파견근무를 했다. 이 나라는 인도네시아와 호주 사이, 위도상 적도 바로 밑 남반구에 있다. 호주로부터 독...

루비와 샌디 [2]

작가 김평화 수필가 

루비와 샌디 김 평 화 한국에 온 지 6개월, 우리 부부는 손녀의 돌잔치를 위해 남편까지 이곳에 와있다가 다시 하와이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내가 쓰던 방에 널려있는 소지품과 물건들을 가방에 넣으며 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시원섭섭했다. 그동안 예쁜 손녀를 출산한 딸을 잠시 도와주기 위해 와 있었다. 루비와 샌디는 눈을 크게 뜨고 꼬리를 흔들면서 내 주위를 돌고 있는 있다. 뭔지 모르지만, 이상한 느낌을 받았나 싶다. 처음에는 루비와 샌디는 함께 하와이로 같이 가기로 하고 수속을 다 받아 놓은 터였다. 딸은 사위가 일 가...

내가 겪은 현대의학

작가 안상선 수필가 

내가 겪은 현대의학 안 상 선 눈부신 현대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이 100세를 넘나들며 사람들은 건강에 관해 많은 관심을 둔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염색체 변형을 이용한 선천성 질환의 근본적인 치료와 예방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 인간복제의 가능성은 의학의 도덕성과 윤리관에 대한 열띤 토론이 한창이다.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의 초조하고 마음 졸이는 나날들이 있는가 하면, 불법으로 사람의 장기를 채취하여 이를 매매한다는 외국기사를 접할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마음이 착잡해진다. 내가 평생 몸담아왔던 신...

협곡에서 본 미소 [1]

작가 이숙이 

협곡에서 본 미소 이숙이 돌산이었을까? 흙으로 빚어진 바위였을까? 비와 바람과 오랜 세월이 협곡을 만들고 거대한 바위를 갈라놓아 희귀한 모양이 되어 있다. 구불구불 갈라진 틈새로 태양 빛이 스며들 때 프리즘 작용의 신비로운 색상과 모양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갈라진 바위틈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의 머리는 위로 향해 젖혀져 있고 카메라 들어 올린 두 팔도 위로 뻗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심오하게 만들어진 무늿결 바위 모양에 감탄하며 카메라에 담는다. 많은 관광객이 비좁고, 조금은 어두운 곳에서 숨죽이고 한 발...

그리운 봉선화 [1]

작가 정순옥 수필가 

그리운 봉선화 蒑池 정순옥 봉선화. 왜 이리 고향의 봉선화가 보고 싶은 걸까? 내가 고향에 두고 온 것 중에서 가장 많이 생각나게 하는 꽃이다. 요즈음도 눈 감고 고향 생각을 하면 봉숭아가 터지고 눈 뜨고 숟가락을 만져도 따다닥 터지는 소리로 변한다. 손을 살짝이라도 대면 씨방을 터트리면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봉선화 생각뿐이다. 어느 날부터 나는 재미동포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를 앙다물고 살아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씀 따라 힘든 디아스포라의 삶에서도 고향을 잊지 않고 인내하며 살아야 했다. 그 힘의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