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열심이었던 헤밍웨이, 벼락같이 그가 이해됐다
입력2022.04.16 03:00
샤토 마고와 오브리옹
헤밍웨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쿠바부터 아프리카까지, 거의 온 세계를 들쑤시고 다니는 정력적인 일화를 듣다 보면 내가 다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너무도 신화화되어 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니 나까지 안 그래도 될 것 같달까. 이런저런 미덕이 있는 분이니 이렇게나 유명해졌겠지만, 아무래도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지나치다’라는 생각이 든다.
-1959년 쿠바의 한 바에서 술을 마시는 헤밍웨이(가운데). /Ernest Hemingway collection
이를테면, 세계 유명 도시나 유명 호텔이나 유명 바 등등에는 헤밍웨이의 이름이 안 묻은 곳이 없다. 가난한 시절의 헤밍웨이가 머문 곳도 있고, 유명해진 그가 지냈던 곳도 있고, 머물면서 칵테일 레시피를 창안한 곳도 있고, 하여튼 엄청나다. 자라서 영화배우로 활동하게 되는 손녀의 이름을 그가 좋아하는 와인인 샤토 마고를 따서 ‘마고 헤밍웨이’로 짓는다거나··· 너무 과시적이지 않나 싶은 것이다.
이분께서 가장 열심히 한 것은 좀 과장해서, 사냥과 음주가 아닌가? 어찌나 분주하게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음주 생활을 하셨는지 흘려듣고 싶은 자에게도 흡수되는 게 이 정도다. 여기까지 썼는데, 이 문장을 읽게 되었다.
“사람의 몸은 모두 그럭저럭 시들어져서 죽어 버린다. 그래서 나는 샤또 마르고나 오브리용을 완전히 향락하는 즐거움을 나에게 줄 입맛을 가지고 싶다. 말하자면 그 입맛을 몸에 붙이기 위하여 지나치게 술에 빠져 버린 나머지 내 간(肝)이 리시부르나, 코르통이나, 상베르텡을 마시지 못하게 하더라도···”
1967년에 휘문출판사에서 간행한 헤밍웨이 전집에 실린 <오후의 죽음>이다. 위의 문장은 영문학자 장왕록 선생이 번역했다. 집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책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자가 ‘오후의 죽음’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궁금해하는 바람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오후의 죽음’은 칵테일 이름이기도 하다. 역시 헤밍웨이가 창안했다고 알려진 칵테일로, 동명의 이 책에 그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세로쓰기로 된 이 책을 듬성듬성 읽다가 저 문장을 만났다.
아, 나는 갑자기 그가 이해되었다. 벼락같은 이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를 아니꼬워한 지난날, 그래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미워했던 지난날 나에 대한 부끄러움까지 더해져 그가 이해되었다. 그는 삶의 감각을 흠뻑 느끼고 싶었던 사람인 것이다. 흠뻑이 아니라면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시하거나 미적지근한 건 싫다! 강렬하고, 센 것, 더 더 더 센 것! 그래서 나를 불타오르게 하고 미치게 하는 봄날의 호랑이 같은 그런 자극을 원해! 헤밍웨이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 같은 남자다.
그는 전쟁을 온몸으로 통과한 세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종군 기자를 했고, 이탈리아 전선에서 다리에 중상을 입고 입원했고, 이 모든 걸 글로 썼다.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도처에 죽음이 있었다. 낚시와 사냥과 투우 같은 일들에 몰두했는데, 저 글을 읽고 보니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현장에 있고 싶었던 것 같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감각하는 것이다.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후의 죽음>을 읽다 보면 이런 자문자답이 느껴진다. 헤밍웨이는 사는 동안 진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감각을 개발하고 또 개발해서 완전히 향락할 수 있도록.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사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이 책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지식과 감각을 연마함에 따라 술에서 무한한 향락을 얻을 수 있다고. 딱 이렇게 말한 적 없지만, 바로 내가 원하던 게 아닌가. 신기하게도 알면 알수록 맛은 더 깊어지고, 더 깊어질수록 아는 것도 늘어나는 게 바로 술 마시는 기쁨 아니던가.
이제 ‘샤또마르고’와 ‘오브리용’에 대해 말할 차례다. ‘샤또마르고’는 샤토 마고(Château Margaux)고, ‘오브리용’은 샤토 오브리옹(Chateau Haut-Brion)이다. 마셔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알 정도로 유명한 전설의 와인이다. 마셔본 적이 없어 들은 바를 전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말해보겠다. 프랑스의 보르도 와인들로, ‘보르도의 5대 샤토’를 꼽을 때 둘 다 들어간다. 샤토 마고는 어릴 때는 강하고 남성적이지만 숙성하면 부드럽고 여성적인 와인으로 변하는, 100년을 넘는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와인으로 알고 있다. 1900년산 마고는 2030년까지 마실 수 있다고 한다. 샤토 오브리옹은 장기 숙성하지 않고 어릴 때부터 마실 수 있어 시음할 수 있는 기간이 길고, 실크처럼 부드러운 맛이라나? 1600년대 영국 왕실이 주최한 디너에서 오브리옹을 100병 넘게 서빙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이제 어쩔 수 없나 보다라는 생각이 든다. ‘와인은 알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을 수정해야 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싶다. 아시다시피, 와인은 돈이 든다. 술을 마시는 일은 기본적으로 돈이 들지만 와인은 더 더 더 든다. 테이블 와인을 마시다가 마을 단위 와인을 마시게 되고, 그랑 크뤼까지는 못 마시더라도 프리미어 크뤼까지는 마셔보고 싶은 그런 욕망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와인을 알고 싶지 않았다. 적당한 가격을 정해놓고 마셨었는데, 이제 특정 지역에 관심이 생겼다. 마을 단위 와인을 마셔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삶에 지친 40대는 와인을 실컷 마시라고 했던 플라톤부터 와인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들을 작품 속에 넣어 놓은 셰익스피어까지, 또 셀 수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와인을 찬양해 왔는데 헤밍웨이도 그랬다. 당연한 거 아닌가. 와인 중의 와인인 샤토 마고와 오브리옹을 제대로 마시기 위해 계속 다른 술을 마시며 입맛을 단련하시겠다는 분인데.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 중 하나라고. 세련되면서 자연스러울 수 있다니, 이건 반칙 아닌가? 두 가지 미덕은 반대편에 있는 게 아닌가 싶으므로. 세련이란 매끄럽고 미끈한 물건을 떠올리게 하고, 자연스러움이란 자연에서 왔듯이 애쓰지 않고 저절로 이루어진 것을 말하니 말이다. 또 그는 말했다. 순수하고 감각적인 것은 와인 말고도 많지만, 어떤 것도 와인만큼 폭넓은 즐거움과 찬사를 이끌어내지 못한다고.
원래는 헤밍웨이의 칵테일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시작한 글이었다. 그런데 ‘오후의 죽음’ 이야기는 시작도 못했다. 정력을 다할 수밖에 없던 그의 인생에 대해 이해한답시고 그렇게 됐다. 인생은 유한하고, 살아 있는 동안만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니 그렇게 발버둥쳤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럭저럭 시들어 죽기 싫어 자신을 총으로 쐈고.
자연스럽지도, 세련되지도 않았다. 강렬하기는 하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와인을, 세련된 동시에 자연스러운 와인을 감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