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영욕을 오간 렌의 선택

조회 수 6703 추천 수 1 2015.12.31 16: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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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윤숙은 해방 전 친일부역과 해방 후 외교활동이라는 극단을 오가는 삶을 살았다.


 

 


우리는 높이 펄럭이는 일장기 밑으로 모입시다. 쌀도, 나무도, 옷도 다 아끼십시오. 나라를 위해서 아끼십시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만은 아끼지 맙시다. 아들의 생명 다 바치고 나서 우리 여성마저 나오라거든 생명을 폭탄으로 바꿔 전쟁마당에 쓸모 있게 던집시다.

    - ‘여성도 전사다’(<대동아>1942. 5)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깊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였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처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중에서



                             모윤숙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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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집 <빛나는 지역>(1933)

 

 

 

 

 

 

 

앞엣것은 산문이고 뒤엣것은 시니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글의 지은이가 같고, 두 글을 관통하는 열쇳말이 ‘애국’이라고 하면 어떤가. 물론 ‘애국’의 대상은 명백히 다르다. 하나는 식민 종주국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찬양과 선동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에 희생된 젊은이에 대한 추모와 기림이다.


이 두 편의 글에는 모윤숙(毛允淑, 1909~1990)의 멘탈리티가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듯 보인다. 어디에서든 주어진 조건 안에서는 언제나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 20세기 여류 명사 모윤숙의 삶 말이다. 그 현란한 변신은 가히 무애(?)의 경지라 할만도 하다. 그러나 UN에서의 외교, 국제펜클럽을 무대로 전방위 활약을 펼친 그의 삶은 동포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내몬 친일 부역 행위 앞에서 빛을 잃는다.

모윤숙은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와 1931년 <동광>에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펴냈고 이듬해부터 1938년까지 극예술연구회 동인을 지냈다. 1935년에는 ‘시원(詩苑)’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모윤숙은 시인으로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것 같지는 않다.

1937년에 일기체 연가의 형식을 띤 <렌의 애가(哀歌)>를 출판했는데 이 39쪽짜리 책은 닷새 만에 매진되었다. 나머지 일기도 읽을 수 있게 해달라는 독자들의 성화가 빗발쳤고 유진오는 ‘렌의 애가’가 한국판 <좁은 문>이며 여자 쪽에서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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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집 <렌의 애가> (1963년판)


글쎄, 평가야 평자의 자유겠지만 중학교 때 집에 나뒹굴던 <렌의 애가>를 읽은 내 느낌은 그랬다. 막연하지만 삶과 사랑을 감상적으로 읊은 달착지근한 연애편지 같은 것이 아닌가. 내게 모윤숙이 시인으로 기억되지 않는 까닭은 그때 <렌의 애가>에서 받은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윤숙이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대체로 1940년 이후로 보인다.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문예강연대회에서 시를 낭독한 이래, 시국 강연 등에 참여하다가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그의 친일은 날개를 단다.

1941년 <매일신보>가 주최한 시국부인 대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해 ‘총후부인의 가정결전체제’를 갖출 것을 역설했고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도 전사(戰士)다’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모두에 '물자는 아끼되 목숨만은 아끼지말자'는 사자후가 바로 그것이다. 모윤숙은 이 연설에서 전시의 ‘도덕적’인 여성상을 제시하면서 총후봉공(统後奉公)의 소임을 다할 것을 주장했다.


                                               '여성도 전사다', 목숨만은 아끼지 말자!

여느 친일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모윤숙의 친일 부역도 태평양 전쟁의 전개와 함께 일제의 총동원 정책에 적극 기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실시된 지 3년이 지난 1941년 <삼천리>에 발표한 시 ‘지원병에게’는 지원병에 대한 찬양을 담았다. 1943년 5월 해군지원병제도 실시가 결정된 후에도 해군지원병 참여를 독려하는 시 ‘아가야 너는 – 해군 기념일을 맞이하여’를 발표했다.


눈은 하늘을 쏘고 그 가슴은 탄환을 물리쳐
대동양의 큰 이상 두 팔 안에 꽉 품고
달리어 큰 숨 뿜는 정의의 용사
그대들은 이 땅의 광명입니다.

대화혼(大和魂) 억센 앞날 영겁으로 빛내일
그대들이 나라의 앞잡이 길손
피와 살 아낌없이 내어바칠
반도의 남아 희망의 화관(花冠)입니다. 
    - ‘지원병에게’(<삼천리> 194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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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시집 <옥비녀> (1947)

 

 

 

 

 

 

 

 
 
아가야! 조개잡기 즐겨 모래성을 쌓고 땅에서 서기보다 물에 놀기 좋
아하는 너 그 못 잊어운 바다가
이제 너를 오란다.
이제 너를 부른다.
해군모 쓰고 군복 입고 나오란다.
대동아를 메고 가란 힘찬 사명이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너를
부른다 .
사나운 파도 넘어
네 원수를 물리쳐라.
너는 아세아의 아들
대양의 용사란다.

    -‘아가야 너는–해군 기념일을 맞이하여’(<매일신문>1943. 5. 27)



시 '아가야 너는'은 일부만 개작하여 해방 직후에 ‘등대지기 아가’라는 제목으로 시집 <옥비녀>에 실렸다고 한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어떤 정서와 이념의 변화 없이 일부 구절만 바뀌어 이 시는 살아남았다. 장차 일제의 전사가 될 ‘대동아의 아들’은 졸지에 순진무구한 ‘등대지기’가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친일 부역 행위에 골몰하다 이내 신생 대한민국의 외교전선에 서는 그의 무한 변신을 닮았다.

정책적인 주문이 있었든지, 아니면 그 스스로의 취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군에 대한 그의 찬양은 산문에서도 이어진다. 모윤숙은 1943년 6월 <춘추>에 발표한 산문 ‘해군의 얼굴’에서 해군 특별지원병제의 실시를 환영했다.


사실 나는 육군지원병제가 공포될 때보다 이번 해군특별지원병제가 공포될 때 더 감격이 되었습니다.…… 우리 반도의 남자들은 지금까지 큰일, 즉 나라를 위하여 바다에 떠본 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나는 어서 해군모의 키 큰 자태가 우리 동리에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만약 내게 아들이 태어난다면 나는 꼭 해군 되기를 빌겠습니다. 사나이다운 사나이, 그는 오직 해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기품일까 합니다.

  - ‘해군의 얼굴’(<춘추> 1943.6)



위태하게 내닫는 모윤숙의 글쓰기는 1943년 10월 육군특별지원병 채용시행규칙이 공포되고 같은 해 11월 20일로 학병 모집이 마감되게 되자, 11 월 12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원을 독려하는 어머니와 자신의 죽음을 설워 말라는 아들의 말을 교차시켜 ‘애국 모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오냐! 지원을 해라 엄마보다 나라가
중하지 않으냐 가정보다 나라가 크지 않으냐.
생명보다 중한 나라 그 나라가
지금 너를 나오란다. 너를 오란다.
조국을 위해 반도 동포를 위해 나가라.
폭탄인들 마다하랴 어서 가거라.
엄마도 너와 함께 네 혼을 따라 싸우리라.

어머니여! 거룩한 내 어머니여!
찬들에 구르거나 진흙에 파묻히거나
내 나라의 행복을 위함이어니
설워 마소서.
내가 가면 아세아의 등불이 되어
번개가 되어 광명이 되오리다.

    - ‘내 어머니 한 말씀에’(<매일신보> 1943. 11. 12)



모윤숙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백의용사’(<신시대> 1941.6)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했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제가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시 ‘호산나·소남도에서’를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아시아민족해방전쟁으로 미화하기도 했다.

모윤숙은 1942년 1월 <신시대>에 정월맞이 기념시로 발표한 ‘동방의 여인들’에서 '대일본제국' 여인의 참모습을 기렸고 이듬해 12월 <신시대>에 발표한 시로 가미카제로 출격하여 전사한 조선인 소년 비행병 출신 하사관인 히로오카 겡야(廣岡賢載, 이현재)를 찬양했다.


새날이라서
상 차려 즐기지 않겠습니다.
입던 옷 그대로
먹던 밥 그대로
달가워 새 아침을 맞이하렵니다.
동은 새로 밝고
바람은 다시 맑아졌습니다.
훤한 하늘 새로
힘차게 날으는 독수리나래
쳐다보며 쳐다보며 호흡을 준비합니다.

비단치마 모르고
연지분도 다-버린 채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
온갖 꾸밈에서
행복을 사려던 지난날에서
풀렸습니다.
벗어났습니다.

들어보세요.
저 날카로운 바람 새에서
미래를 창조하는
우렁찬 고함과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산-발자국 소리를.
우리는 새날의 딸
동방의 여인입니다.

  -‘동방의 여인들’(<신시대>1942. 1)

고운 피 고운 뼈에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사막이나 열대나
솟아 솟아 날아가라.

사나운 국경에도
험준한 산협에도
네가 날아가는 곳엔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

    -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 소년 항공병에게’(<신시대> 1943.12)


모윤숙 친일시의 백미는 1945년 1월 2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신년 송금녀의 노래’다. 그는 '금녀'라는 이름의 아낙을 화자로 삼아, 침략전쟁과 그 출정자를 찬양하고 내선일체와 총후봉공을 선동했다.


그러나 님이여!
한 줄기 피의 자손
그 얼굴 그 얼굴 같은 얼굴들
제 나라 위해 모이는 장사들
무에 서먹하리까 맘 놓고 손잡으사
앞으로 앞으로 저 원수 물리치소.

씨름도 첫째, 헤엄도 첫째
이 동리 이름 낸 장사이시니
산도 물도 무서울 게 없으리다.
바람 눈비 속도 마다 않고 가시리다.
오늘부터 이 몸은 공장 색시 되어서
서방님 달리던 길 아침저녁 걸으며
나라 위해 왼 정성 이바지하려 하오.
님이 쓰실 총포탄을 내 손수 만들려오.

    - ‘신년 송금녀의 노래’(<매일신보> 1945. 1. 2)



송금녀의 소망은 그러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해 8월 조국이 해방된 것이다. 내선일체와 총후봉공을 외쳤던 친일 부역자들은 일왕의 항복 선언을 들으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러나 알다시피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누렸던 기득권을 잃지 않고 신생 조국에서 너끈히 간직할 수 있었다.

모윤숙은 해방 후 이승만의 노선을 따르면서 외교활동을 벌였다. UN 한국임시위원단장인 메논(Menon)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메논이 애초의 뜻을 뒤집고 남한만의 총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도록 유도했다. 1948년 10월 프랑스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 참석해 한국이 합법적 국가로 승인받도록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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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파리에서 열린 UN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 맨 왼쪽이 모윤숙이다.

 

 


이후 모윤숙은 1949년 4월 UN한국위원단 연락관, 제4 차 UN총회 대표단원, 한양 여성클럽 회장, 대한여자청년단 총본부 단장과 북진통일 여성투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영어에 능통하고 외모가 뛰어난 지식인 여성을 모아 ‘낙랑클럽’을 조직해 정부 고위관리, 군 장성, 주한 외교사절 등을 대상으로 사교활동을 벌여 이승만 정부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로비를 전개했다.

눈부신 입신과 낙랑클럽

1954년에 한국펜클럽을 창립했고, 제10차 유네스코 총회, 아시아반공대회와 아시아여성단체연합회 등의 한국대표로 참여했고 1960년에 드디어 국제펜클럽 한국위원장을 맡았다.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민주공화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가히 눈부신 활약이요, 입신이다.

모윤숙은 1973년 한국현대시협회장에, 1976년 국제펜대회 종신 부회장에 추대됐다. 1980년 <황룡사 9층탑>으로 3·1문화상을 수상했다. (3·1정신을 계승한다는 이 상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문인 가운데 조연현, 백철, 최정희도 수상했다.)

1980년에 문학진흥재단 이사장, 1987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에 올랐다. 모윤숙은 1990년 6월 사망했다. 향년 80세. 한갓진 수사가 아니라 ‘영욕을 넘나든 삶’은 결국 80년을 넘기지 못했다. 다음 날 정부는 고인에게 1등급의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어떤가. 이만하면 한 인간의 삶으로는 만족할 만한가.

한 인간의 대한 평가로 흔히 공과를 논한다. 쿠데타로 민주 헌정을 짓밟은 박정희의 과는 ‘조국근대화’라는 공으로 상쇄되다가 결국은 슬그머니 지워진다. 식민 종주국을 위해 동포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몬 친일 반역자 모윤숙의 과도 신생 대한민국을 위한 헌신으로 덮어질까. 설사 그런 타협이 우리 역사의 아쉬운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찰 없이 추인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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