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한, 덧없는 이미지와 서정성

조회 수 5903 추천 수 3 2015.12.31 17: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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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1914~1944)의 시를 처음 만난 게 중학교 2학년 여름이다. 작은누나와 함께 살던 내당동의 사글셋방에서였다. 그의 시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을 어디서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나는 그 시를 베껴 서 내 책상머리에다 붙였다. 열다섯 시골소년에게 그 시가 전하는 풍경은 아마 꽤나 살갑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김종한은 잊어버렸다. 그의 시를 더는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하긴 한두 편의 시로만 기억되는 시인이 어디 하나둘인가. 그를 다시 만난 건 고교에서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다. 그의 이 시는 개편 이전의 18종 문학 교과서 한 군데와 교육방송(<EBS>) 교재에 실려 있었다.

시 한편으로 남은 김종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의 시를 가르쳐 보지 못했다. 내가 가르친 교과서는 물론이거니와 문제집에도 그의 시는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김종한을 한 편의 시를 남기고 사라져 간 적지 않은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갈무리하고 그를 잊어 버렸다.

< 친일문학론>과 <친일인명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는 기분은 좀 뜻밖이었다. 달랑 시 한편 남겼는데 친일 문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친일문학론>의 ‘김종한론’은 무려 아홉 쪽이다. ‘김동인론’이 5쪽남짓인데 비기면 거의 두 배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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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1914~1944)

 

 

김종한이 우리 나이로 치면 고작 서른한 살에 요절한 사실을 감안하면 그 친일의 행적이 못내 궁금해진다. 나이로 ‘친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른 전후의 나이라면 문단에서의 위상이 크지 않으니 자연 일제의 겁박이 크지 않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서른 전후의 젊은 문인들의 친일은 ‘자발적 친일’로 규정하곤 하는 것이다. 대체 서른도 안 된 젊은 시인을 친일의 길로 나아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김종한은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이 당선되고, 1939년 <문장>에 정지용의 추천으로 시를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등단하게 된다. 임종국은 김종한이 친일의 길로 들어선 시기를 1942년 월간 <국민문학>의 편집을 맡게 될 때로 본다. 1942년 5월 조선인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그는 조선문인협회가 개최한 좌담회,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에 참석하는 등 징병제의 선전·선동에 동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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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학지 <국민문학>(1942)

 

 

 

그는 1943년 1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와세다대학 재학 중 좌익활동을 하다 ‘황국신민’으로 다시 태어나 중일전쟁에 군속으로 자원해 전사한 김형(金瀅)이라는 조선 청년의 아버지를 취재한 방문기 ‘태산부동의 아버지―나라 위해 또 바칠 아들 없음을 한(恨)’을 썼다.

전쟁은 '아름답고 위대하다'

그는 이 글에서 “전쟁처럼 아름다운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전쟁처럼 위대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드디어 김형 씨는 갔다. 그러나 그의 영혼과 청춘은 조국과 고향에 생생할 수가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당국의 배려로 불편치 않게 살아가는 유가족을 소개하면서 “금후는 유족 중에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남자가 없음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로소이다.”라는 내용을 담은, 전사자 아버지의 ‘감격장’을 소개하였다.

1943년 그는 일본어 시집 <어머니의 노래>(たらちねのうた, 인문사)를 펴냈다. 이 시집의 후기에서 그는 “‘일지에 대해서’(一枝について. 원제는 ‘원정(園丁)’)에서는 내선일체에 헌신하는 한 문화인의 운명적 인과에 대한 아름다움과 슬픔을 비유하려고 했다. ‘합창에 대해서’(合唱について)에서는 대동아건설에 참여하는 조선인의 풍모와 감격을 벽화(壁畵)하고자 했다. ‘풍속’(風俗)을 쓴 동기는 경성의 거리에서 묵도하는 집단이 영웅적인 장엄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라고 썼다. 



해묵은 돌배나무에, 늙은 원정은능금의 애가지를 접목하였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놓고
추워 보이는 유리빛 하늘에 담배연기를 흘려보냈다.
“그런 일이 성공할까요?”
하면서 원정의 아내는 저으기 고개를 갸웃하였다.

이윽고, 철죽꽃이 매소(資笑)하였다.
이윽고, 버들은 음탕하였다.
해묵은 돌배나무에도, 변명하듯이
두 송이 반[二輪半]의 능금꽃이 피었다.
“그런 일도, 성공하는군요.”
원정의 아내도, 비로소 웃음 지었다.

그리고, 버들은 실연하였다.
그리고, 철죽꽃은 노쇠하였다.
“내가, 죽어버리고 난 다음에는”
늙은 원정은 생각하였다.
“이 가지에도, 능금이 열려 주겠지.
그리고, 내가 잊혀져 버릴 무렵에는…….”
아닌 게 아니라, 원정은 죽어 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 원정은 잊혀지고 말았다.
해묵은 돌배나무에는, 추억처럼
능금의 볼이, 가지를 휘일 듯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 일도, 성공하는군요.”
원정의 아내도, 지금은 죽고 없다.

    - ‘원정(園丁) 43’(<국민 문학> 1942. 1)



내선일체를 소재로 한 이 시에서 돌배나무와 능금의 비유가 겨냥하는 게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즐거이 안기고자 하는 젊은 시인이 말하는 ‘운명적 인과’란 도대체 무엇인가. 노예의 길이란 선택이 힘들 뿐, 거기 일로 나아가는 데는 거침이 없는 법이다.

같은 해 8월, 병제가 실시되자, 김종한은 감사결의 선양운동의 일환으로 열린 연극과 낭독의 밤에 참가하여 자작시 '모자'를 낭독했다. 임종국은 김종한의 ‘전쟁에 대한 관심’을 ‘명민한 시대감각’인지, ‘시류에 영합할 줄 아는 능란한 처세술’(김종한론)인지 모르겠다고 비꼬았지만, 이 탁월한 감각의 시인은 아이들의 모자에서 ‘철모’를 꿰뚫어 보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모자의 흐름 속에
네 모자도 흐르고 있다
아우여!
지금은 즐거운 등교시간

졸업하면
군인이 되겠다는
원기가 흘러 넘쳐
모자 천장에
그럴듯한 바람구멍을 내어 버렸다

군인이 되겠다는
아우여! 훌륭하지 않은가!
따뜻하게 비치는 아침 태양을 맞으며
네 모자는
망가진 철모보다도 아름답구나


     - ‘모자’(<국민총력>1943. 8)



'이미지와 서정성'의 친일시

김종한이 여느 친일 시인들과 구별되는 점은 그의 친일시에 이미지와 서정성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서정성의 중심엔 언제나 ‘전쟁’의 이미지가 어른댄다. ‘유년―징병의 시’(幼年―徵兵の詩, <국민문학> 1942. 7)에서 글라이더를 날리는 한 꼬마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는 ‘10년’ 후에 ‘전투기에 승무할 게 틀림없다’고 노래하는 형식이다.

그래서인가. 그는 여는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징병제 실시’를 느꺼워한다. 그는 그 감격을 시로 산문으로 복창한다. 바다로 가도, 산으로 가도 좋은 그 ‘님의 부르심’을 받아 안기에는 그의 나이가 많았던가. 그는 동포 청년을 사지로 내몬 전쟁도 문학소재 확대의 기회로, 태평양전쟁의 침략성도 해양정신으로 포장했다.




바다로 가도 좋지 않은가
그 싱싱한 파랑(波浪)의 화원
시간과 역사가 무시되는 곳
함대는 물결의 산맥을 기어올라
물결의 곡간에 미끄러지고……

산으로 가도 좋지 않은가
너울너울 쉬고 가는 구름의 침대
풍속과 인정이 초절(絶)되는 곳
밀림을 헤치고 고산식물에 멈춰서면
전우는 여동생처럼 아름답고……

때로는 전투기의 날개에 매어달려
하늘의 층층계를 올라가도 좋지 않은가
성층권 꿈 저쪽의 비상에는
스무 살의 지도와 축제가 펼쳐지고
구름을 물들이는 충성의 피는
형제와 동포의 가능을 길 닦는
날씬한 전투기의 날개에 매어달려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8.6.)

드디어 조선에서도 육군과 해군의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었다. 군인으로서의 생활, 대륙에서의 생활, 해양생활 등 그것이 조선문학의 소재영역에 놀라울 정도로 큰 것임을 덧붙이는 것은 기뻐 마지않는다.

  - ‘병제와 문학’(兵制と文學)(<신시대> 1943. 8.)

금번의 해군특별지원병제의 결정은 조선의 해양문학에 새로운 영역과 가능을 가져왔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엽(萬葉)을 애독하는 사람들에게는 아국에도 해양문학에 관한 위대한 고전이 있다는 것을 즐길 수가 있을 것이다. …… 우리가 생각할 것은 미영의 해양 정신이란 것은 해적정신이 국민의식에까지 승화된 것이지만 일본의 해양 정신이란 것은 황실을 중심으로 모시는 자기희생의 정신이었다.

  - ‘해양과 조선문학’ (<매일신보>1943.5.26.~31)



김종한의 전쟁에 대한 천착(?)은 ‘징병 이후’까지 이어졌다. 그는 시 ‘초망’에서 징병에 아들을 빼앗긴 채 늙은이와 여자들만 남은 시골 농가의 비참한 풍경을 그린다. 집을 비운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솔뿌리를 캐러 갔을지도 모르는데, 국민문학자들은 이런 가정을 명예 유가족의 집으로 찬양하고 증산 전선에서 감투하는 모범 농가요 산업전사로 추켜세웠던 것이다.




이끼 앉은 초가지붕에는
흐트러진 머리칼 같은 잡초가 무성해 있다.
“자식 복이 많으셔서요.”
하고 안내하던 구장(區長)이 웃었다.
“내년엔 셋째 놈도 적령(適齡)이래요.”
포풀라가 한 그루 마당귀에서
황홀한 듯이 몸을 흔들고 있는
휑하니 비어진 유가족의 집
“분명 밭에 갔을 거예요.”
아무도 없더라 아-무도 없어
흙담 위에 드러누운 채로
호박 두어 개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 ‘초망(草莽)’(<국민문학> 1943. 8)



‘자식 복’을 들먹이며 셋째도 징병 적령이라는 구장의 말은 ‘잔인’의 정도를 넘었다. 그걸 천연덕스럽게 묘사한 김종한에겐 다행히 처자가 없었다. “당신의 아들에게도, 어머니! 드디어 징집의 날이 가까이 왔다!”(‘오늘은 육군기념일’)고 노래한 시인은 그러나 ‘백전백승’하는 일본의 승리도, 새로운 ‘동아(東亞)의 지도’도 보지 못한 채 요절했다. 1944년 9월 27일, 향년 31세였다.

한 해 뒤에 그 백전백승의 ‘황군’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고, 조국은 해방되었다. 황군의 패배와 대동아의 좌절을 그가 살아서 만나지 못한 것은 다행일까, 불행일까. 민족과 모국어를 등진 시인의 시첩에 남은 시는 고작 몇 편이다. 낯부끄러운 친일시에 남은 이미지와 서정성은 한갓 신기루일 뿐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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