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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성군의 향토민속자료전시관에 전시된 이무영 관련 전시물들. ⓒ 한국관광공사

 

 



배경은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홍콩을 점령할 때까지다. ‘청기와집’이라 불리는 양반 권씨 집안이 있다. 이 집안이 식민지 ‘조선’을 상징한다면 이 집안의 3대는 각각 그 시대의 사상을 상징하는 존재다.

가장인 권 대감은 ‘지나(支那)에 대한 사대주의’를, 아들 수봉은 ‘영미 제일주의’, 손자 인철은 ‘일본’으로 상징되는 신사상을 대변한다. 소설의 대단원에서 조부는 세상을 떠나고 수봉은 마음을 바꾸어 조선신궁을 참배하게 되며, ‘젊은 일본’을 상징하는 손자 인철은 꿋꿋하게 개간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작가 이무영이 쓴 친일 장편 소설 ‘청기와집’의 내용이다. ‘청기와집’은 조선에서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일간지 연재소설이다. 이 소설은 1942년 9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장편 연재되었다.

총독상을 받은 '일본어 장편소설'

이 소설은 일본의 신태양사가 주관하는 제4회 조선예술상 총독상을 수상했다. 줄거리로 미루어보면 총독상이 주어질 만한 작품이었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 수상에 대해 “당당하게 국어와 씨름을 하면서, 반도인이 시국과 함께 일어나서 나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 인정받았다는 <경성일보> 기사(2월 21일자)는 차라리 사족이다.

작가 이무영(李無影, 1908~1960)은 1908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갑룡, 무영은 필명이다. 충북 중원의 사립학교를 다니다가 1920년 경성의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25년에 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의 세이조 중학에 입학했다 다시 중퇴했다. 이후 그는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의 집에서 기숙하면서 4년 동안 소설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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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영(1908~1960)

 

 

 

 

이무영은 1926년 <조선문단> 6월호에 단편소설 ‘달순의 출가’로 등단했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연달아 첫 장편과 두 번째 장편 <의지할 곳 없는 청춘>와 <폐허의 울음>을 발간했다. 1931년 <동아일보> 희곡 현상모집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이 당선했다.

1932년 문인 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가 창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이듬해에 문예지 <문학타임스>를 창간했다. 1933년 1936년까지 이효석, 유치진,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문학동인 ‘9인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10월 <문학타임스>의 제호를 바꿔<조선문학>을 창간했다.

1935년부터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일했고, 1937년 첫 작품집 <취향(醉香)>(조선문학사)을 발간했다. 1938년 작품집 <무영단편집>(한성도서주식회사)과 장편소설 <명일(明日)의 포도(鋪道)>(삼문사)를, 1939년 장편소설<먼동이 틀 때>(영창서관)를 발간했다. 등단 10년을 전후하여 장편 4편과 작품집 두 권을 상재했으니 그는 꽤 다작의 작가였던 셈이다.

이무영은 1939년 7월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어엽2리 궁촌으로 내려가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촌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제1과 제1장’과 ‘흙의 노예’가 이곳에서 쓴 작품이다. 이무영이 한국 농민문학 또는 농촌소설의 선구자로 불리는 것은 농민을 주인공으로 한 이들 일련의 소설들 덕분이다.

그러나 그의 농민소설은, 그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게 만든, 그가 꾸준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해온 ‘대일협력’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무영이 1940년 4월에 발표한 대표작 ‘흙의 노예’(<인문평론>)부터 농촌계몽을 일제의 식민정책과 융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제1과 제1장’의 속편으로 쓰인 이 작품은 기계 문명에 밀리고 농촌 정책에 희생되어 땅을 잃어 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천착 없이 흙을 긍정하고 농촌과 친화하며 그 안에서 자기 생활을 창조해 나가는 농민의 모습은 일제의 식민정책의 요구와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이무영은 ‘청기와집’이나 ‘향가’ 등에서는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계몽주의적인 젊은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조선의 근로대중을 일제의 총동원체제에 합류시키려고 시도했다. 1943년에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향가(鄕歌)’는 농촌소설의 형식을 빌려 농촌에서 ‘총후봉공’과 지원병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 형식으로 이바지한 '총후봉공'

소설의 무대가 되는 농촌마을에서 원수지간인 두 집안의 아들과 딸인 남녀 주인공은 귀향해 함께 수리공사, 강습소 설립 등을 통해 촌락 공동체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당시 농촌의 중대과제였던 자작농 창설을 이루어내고, 전선에 보낼 위문대와 애국저금을 확보해 나간다. 그리고 지원병에 응모하는 젊은이가 나오고 국어 보급도 활발해지는 등 ‘전시하의 촌락’다운 체제와 활동을 갖추고야 만다는 내용이다.

이무영의 친일 문필활동은 1942년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문학부 소설희곡회 상임 간사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는 1942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채만식 등과 함께 만주 간도성의 조선인 개척촌을 시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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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무영이 펴낸 장편소설. ⓒ 충청북도교육청 학생교육문학관

                          

 

출발 전에 그는 “영하 30여 도의 추위와 싸우면서 그다지 비옥하지 않은 토지를 감연히 개척한 그 위대한 정성을 내 마음의 양식으로 하고 싶다.”(<매일신보>)는 포부를 밝혔다. 돌아와서도 만주 이민의 황국신민화는 논리가 아니라 생활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면서 개척민의 친화나 단결, 정착을 위해 일본의 분촌(分村)계획과 같은 것이 조선에도 시행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녹기>)

결국 이무영의 논리는 ‘일제의 정책적 농업식민을 2등 신민인 조선인이 만주에서 재현하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전형적인 아류 제국주의적 발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는 이태 전에 발표한 ‘흙의 노예’ 에 이미 이 같은 인식이 싹트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무영이 문학 활동으로 일본에 협력하기 시작한 것은 <국민문학>에 실린 ‘대동아전쟁으로 무엇을 배웠는가?’라는 설문에 대한 응답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영미에 종속적인 지금까지의 문학을 비판하면서 시국에 조응하는 문학을 추구할 것임을 밝혔다. 


“관념적인 문학이거나 학문 같은 것이 전쟁의 경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없으며, 위대한 국민정신이 없는 곳에 힘찬 문학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 새삼스럽게 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이며 그리고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장차는 투쟁정신을 갖지 않는, 숫자만의 군인을 앞에 두고 두려워서 옹송그리고 있는 영미의 수뇌자들을 거울로 하고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 <국민문학>1942년 2월호


4년여 동안 일본 작가 가토 다케오를 사사하여 일본어 창작에 자신감을 가진 그는 시국적 문학의 창작 수단으로 일본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작가가 모국어를 포기하고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로 문학을 창작하겠다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의 심각한 부정이었다.



“오늘날의 일본어는 일본만의 국어가 아니며, 동아 10억의 국어가 되고자 하고 있다. 종래 조선 반도만의 좁은 지역만의 조선어로 쓰이고, 그 지역에 삶을 갖는 자만으로 친숙하던 조선문학은, 이후 일본 내지는 물론 멀리 지나, 남방 방면에도 전파될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문학은 이제부터 커다랗게 발전할 것”
                             - ‘국어문제회담(國語問題會談)’(<국민문학>1943년 1월호)


그는 침략전쟁이 수행되고 있는 국면에서는 결전자세가 강조될수록 문학가의 특수성이 잘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침내 문학을 전쟁의 도구로 상정하고 창작을 생산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애국 문학자가 제작한 위대한 문학작품은 그 한 자 한 구절이 포탄이며 전선 장병이 목말라하며 후방의 국민에게 요청하는 비행기이기 때문에 우수한 문학자를 결전하 생산 각 부분에 계속 투입하고, 그들에게도 생산수량 전임제랄까, 일정한 기간 내에 국가가 요청하는 우수한 문학작품을 생산시키자.”
                                    - ‘결전문학의 수립을 위해’(<문학보국>1944년 8월호)


그은 이태준과 공동으로 엮은 <대동아 전기(戰記)>에서 ‘대동아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영미와 싸우는 ‘무적 황군’의 활약상을 ‘국어’ 즉 일본어를 해독 못하는 조선인들에게 널리 알리려 했다.



“유사 이래로 인간사회의 전쟁이란 전부가 침략 다시 말하면 무력으로써 권리를 뺏고 땅을 뺏고 백성을 뺏아서 자기 나라의 노예를 만드는 것이었더니라. 그러나 이번 대동아전쟁은 오랫동안 영미의 악정 밑에서 허덕이고 있던 대동아의 민족으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서게 하기 위해서 이 공영권 내에 있는 영미 두 나라의 세력을 쫓아내자는 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동아공영권 내에 있는 10억의 유색 인종이 한 덩치가 되어 단란하게 살자는 것이다.”

1943년 2월부터 8월까지 이무영은 <경성일보>에 일문 장편소설 ‘바다에의 서(書)’를 연재했다. 4월에는 일문 소설집 <정열의 서>를 발간했다. 여기 실린 작품 가운데 ‘제1과 제1장’은 1939년 10월에 한글로 발표했던 소설을 작가가 직접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일제의 농업정책으로 인해 농민들이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는 대목들은 대거 삭제함으로써 일제에 영합했다.

이무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부역 작가 가운데 가장 정력적으로 친일 문학을 생산한 작가다. 그는 꾸준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문학 작품을 통해 식량 증산 등의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선전, 선동했다. 친일 작가들 가운데 그만큼 꾸준히 작품을 통해 일제의 식민 정책에 협조한 이는 많지 않을 듯하다.

이무영이 1943년 8월호 <반도의 빛>에 발표한 단편소설 ‘용답(龍沓)’은 일제의 중요 정책이었던 ‘자작농 창설’을 다루었다. 이 작품이 ‘농본주의’와 ‘휴머니즘’으로 위장한 증산보국 소설의 또 다른 양상으로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작농 창설'과 '증산보국'을 다룬 농촌소설

1944년 4월 <국민총력>에 발표된 ‘화굴 이야기(花窟物語)’는 증산 보국을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들이 ‘화굴’이라는 천연동굴에 고구마를 저장하는 법을 생각해 냄으로써 전시하 증산보국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소설집 <정열의 서>에 수록된 ‘어머니(母)’에서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증산보국에 공헌하는 농민 어머니를 그림으로써 노골적으로 일제의 정책을 선전했다.



"오(吳) 과부는 남편이 주색잡기로 가산을 탕진한 후 죽자, 남은 3000평 정도의 모래산을 아들 태근과 부지런히 일구어 훌륭한 복숭아 과수원으로 바꿔놓는다. 그런데 첫 수확을 올린 뒤, 지원병으로 출정하겠다던 태근이 감기로 병사한다. 오 과부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면(面)에서는 식량증산을 위해 마을 과수원들을 밭으로 개발하라고 시달한다. 그러나 오 과부의 사정을 늦게 안 면에서는 시달을 철회하나 오히려 오 과부는 국가를 위해서 공들인 과목을 뽑는다. 아들 태근이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은 게 죄스러워서라도 그렇게 한 것이다. 과수원에는 이제 보리가 자라게 되었다……."

그의 지극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패망했다. 해방 후 시골에서 칩거하던 이무영은 이듬해 조선문필가협회에 참여하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하며 작품집 <흙의 노예>를 발간했고 좌익의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대응해 조직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의 최고위원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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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영문학전집(2000, 국학자료원)



 

그러나 그는 일제 치하 자신의 부역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오히려 그는 해방 후 처음으로 발표한 단편 ‘굉장소전(宏壯小傅)(<백민>1946년 12월호)에서는 친일파 청산을 폄훼했다. 또 1948년 <국민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 ‘피는 물보다 진하다’(‘삼년’으로 개제)에서 친일파 역시 시대의 희생양인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해군 소령으로 입대해 정훈교육을 담당하다가 1955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이 무렵 발표한 희곡 ‘팔각정이 있는 집’(<문학예술>1955. 11)에서도 친일파의 죄상을 용서하자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친일 부역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한 이가 드물다는 것은 모든 친일파의 공통된 점일지도 모른다.

이무영은 1960년 4월에 세상을 떠났고 문인장으로 서울 성북구 창동 천주교묘지에 묻혔다. 1975년 신구문화사에서 <이무영대표작전집>이 발간되었다. 총 5권으로 발간된 <전집>에는 장편 <향가>를 비롯해 다수의 친일작품들이 개작되어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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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성의 설성공원 안에 세워진 이무영 작품비

 

                                   

 

985년 고향인 음성에 ‘이무영 선생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1994년에는 음성문화원이 주최하고 동아일보사가 후원해 ‘무영제’가 개최되었다.(1998년 제5회부터 한국예총 음성지부 주최). 1995년 4월 제2회 ‘무영제’를 계기로 문학비가 세워진 설성공원 앞길이 ‘무영로’로 명명되었다. 이듬해 4월에는 음성군과 음성문인협회에서 이무영 생가에 표지와 표석을 설치했다.

1998년 음성군은 향토 민속자료 전시관에 이무영의 작품을 비롯해 친필·유품 등을 전시했다. 2000년 4월에는 <이무영 문학 전집>(전6권, 국학자료원)이 발간되었고, <동양일보>사가 주관하고 음성군이 후원해 ‘무영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무영문학상’은 매년 4월 는 ‘무영제’에서 시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무영의 친일 행적이 알려지면서 음성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이무영 기념사업 지원 중단을 요구함에 따라 음성군이 2012년부터 사업비 지원을 중단했다. 또 도로명 새주소 사업으로 이무영의 기념비가 있는 설성공원 옆 ‘무영로’도 ‘설성공원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관련기사 :
친일파 이무영 기념사업 더는 예산편성 없다

              "이무영, 신념가지고 민족 배신한 일급 친일파"

음성의 시민사회단체는 지금도 <동양일보>의 기념사업 중단, 향토 민속자료 전시관에 전시한 이무영 관련 자료 철거와 설성공원 내 이무영 작품비, 생가 안내판 철거 등을 군에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무영문학상은 올해 15회째 수상자를 냈고 그의 작품비는 굳건히 서 있다.

역사는 그것을 기억하고 성찰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35년여 질곡의 세월 속에 얽히고설킨 오욕의 역사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그것을 엄정하게 평가하게 될 때 부끄러운 우리 현대문학사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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