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여성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

조회 수 9128 추천 수 1 2015.12.31 17:4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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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천명이 1956년에 낸 시집 <별을 쳐다보며>. 김환기가 표지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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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시인 노천명의 ‘사슴’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1980년대 인기 절정의 여자 댄스가수는 어떤 퀴즈 프로그램에서 과감히 ‘기린’이라고 답함으로써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목이 길기로는 기린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기린도 목이 길어서 슬픈가? 사슴이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 된 것은 한 시인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슴'의 시인 노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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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천명(1911~1957)

내가 우리 현대시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때 한림출판사 판 ‘영원한 한국의 명시’를 통해서였다. 나는 집안을 굴러다니던 세로쓰기의 이 하드커버의 시집으로 우리 현대시에 입문했다. 이 시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시인이 노천명이다.

정작 그의 대표작인 ‘사슴’보다는 ‘향수’라는 시가 더 살갑게 다가왔다. ‘아프리카에서 온 반마처럼’이라는 구절은 이상하게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물론 시 자체에 대한 호오라기보다 시가 초등학생도 알아먹을 만큼 쉬웠기 때문이다.

노천명(盧天命,1911~1957)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다닐 때 ‘밤의 찬미’를 <신동아(1932)>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졸업 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으며 ‘극예술연구회’와 ‘시원(詩苑)’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8년 첫 시집 <산호림(珊湖林)>을 펴냈다.

노천명이 친일에 참여한 것은 1940년대다. 1941년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호국신사 어조영지(御造營地) 근로봉사'에 참여한 이래 조선문인협회의 간사, 조선임전보국단 산하의 부인대 간사로 일하면서 친일활동을 벌였다.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 군복수리 근로에 참가했고, 조선 임전보국단 주최 저축강조의 결전 대강연회에서 연사로 활동했고, 징병제 선전을 위해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순국영령방문단의 일원으로 경상남도에 파견되기도 했다.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 시낭독회에서의 시 낭독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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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근로대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 주 공을 세워 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山)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 ‘부인근로대’(<매일신보> 1942. 3. 4)



2차대전이 점차 치열해져 가던 1940년대에는 남자들만 징용·징병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애국금차회를 통해서 금비녀를 헌납하였고 군복 수리 등에 동원되었으며, 말기에는 여자정신대로 끌려가기도 했다. 노천명의 ‘부인근로대’는 군복 수리에 동원된 부인을 통해서 총후(銃後)의 각오를 노래한 것이었다.

여성 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

노천명은 주로 여성(어머니 혹은 누이) 화자를 내세운 시를 통해 일제에 부역했다. 그의 시에는 참전 군인들의 무운을 기원하거나 전몰 병사들을 추모하고 학병 출전을 권유하는 내용, 일본군의 승전을 찬양하거나 후방의 여성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가다듬은 내용 등이 담겼던 것이다.


노천명은 시를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 수행을 옹호하고 미화했다. 시 ‘젊은이들에게’를 통해서는 일본의 선전포고 행위를 미화했고, ‘기원’을 통해서는 총후(统後) 여성의 정신 자세를 노래했다. ‘싱가폴 함락’으로는 일제의 승전을 해방으로 미화했다. 특히 ‘동아 민족’의 침략자로 규정된 '영미'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늙은 영국을 대해서
저 혼혈아 아메리카를 향해서
제국(帝國)은 드디어 선전을 포고했다
정의를 위해 대동아건설을 위해서
우리는 불수레를 달렸다

    - ‘젊은이들에게’(<삼천리> 1942.1)

신사(神社)의 이른 아침
뜰엔 비질한 자욱 머리빗은 듯 아직 새로운데
경건(敬虔)히 나와 손 모으며 기원하는 여인이 있다.

일본의 전 아세아의 무운을 비는 청정한 아침이어라

어머니의 거룩한 정성
아내의 간절한 기원
아버지를 위한 갸륵한 마음들……
같은 이 시간 방방곡곡 신사가 있는 곳
아름다운 이런 정경이 빚어지고 있으리

    - ‘기원’(<조광>1942. 2)


아세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영미의 독아에서
일본군은 마침내 신가파(新嘉坡)를 뺏아내고야 말았다

동양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들아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를 조상하는 만종을 울려라

    - ‘싱가폴 함락’(<매일신보>1942.2.19.)

추녀 끝 드높이 나부끼는
일장기ㅅ발도 유난히 선명한 이 낮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푸른 하늘에 흰 비둘기를 날려라

    - ‘흰 비둘기를 날려라’(<매일신보> 194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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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천명 제2시집 <창변>(1945년판)

‘흰 비둘기를 날려라’는 일본군의 진주만 습격(1941) 1주년을 맞아 일본군의 명복을 비는 내용이다. 특히 진주만 폭격에서 숨진 일본군의 충성 뒤엔 뛰어난 '아홉 어머니', '굿센 일본의 아내'가 숨어 있다는 점을 환기하기도 했다.

문인들의 친일 행위를 들여다보면 일정한 시기를 지나며 이들의 반민족적 일탈이 매우 위태위태하게 치닫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을 본인이 얼마나 체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자기 부정과 굴욕의 수사들 뒤에는 최소한의 민족적 정체성 따위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다.

노천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친일에 대한 변명이나 해명도 따로 보이지 않으니 최소한의 갈등이나 번뇌조차도 상정해 볼 수 없다. 정말 그이는 친일 부역, 그 반민족적 선택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일까. 노천명의 친일은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는 시기까지 일관되게 이루어졌다.

전쟁이 말기로 접어들면서 친일시 내용도 일본군의 승리를 찬양하는 것에서 전쟁 동원 논리를 전파하는 것으로 변해 갔다.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전쟁터로 나갈 것을 요구하는 시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와 ‘출정하는 동생에게’ 등이 있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쟁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더면 나도 사나이였더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 8.5)



가미카제 특공대로 나가 전사한 조선인 청년 마쓰이 오장의 명복을 비는 추모시 ‘신익-마쓰이 오장 영전에’(<매일신보> 1944. 12.6)를 발표한 노천명은 1944년 12월 <매일신보>의 대동아전쟁 3돌 기념 특집호에 ‘군신송(軍神頌)’을 싣는다. 병사들의 죽음을 ‘거룩한 역사’를 완성하기 위한 '아름다운 희생'으로 미화한 시다.


이 아침에도 대일본 특공대는
남방 거친 파도 위에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싸움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네거리를 지나며
12월의 하늘을 우러러 본다

어뢰를 안고 몸으로
적기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성좌처럼 솟는다


1945년 2월에 두 번째 시집 <창변>을 간행하면서 ‘흰 비둘기를 날려라’, ‘진혼가’, ‘출정하는 동생에게’, ‘승전의 날’, ‘병정’, ‘천인침’, ‘학병’, ‘창공에 빛나는’, ‘아들의 편지’ 등 9편의 친일시를 수록했다. 이 시집은 해방 직후이도 친일시만 뺀 채 계속 출판되었다.

노천명의 친일은 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단상·논설·참관기 등을 통해서도 친일 행위를 계속했다. 수필 ‘싸움하는 여성’에서 그는 총후 여성으로서의 생산 증대에 노력할 것을 주장하는 등 결연한 모습을 유감없이 연출한다.


(전략) 대동아 전쟁의 승패는 결국에 있어서 적국 여성들과 일본 여성의 근로의 투쟁에 있을 것입니다.…… 유복자의 외아들을 전지로 바치는 늙은 어머니도 있습니다. 엊그제 혼인한 남편을 특별지원병으로 내보내는 젊은 아내도 있었습니다.…… 여자 정신대는 이때 우리 여성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길인 줄 압니다.

    - ‘싸움하는 여성’(<조광> 194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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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수복 후 부역혐의로 체포된 서울 시민들 ⓒ <KBS> 화면 갈무리


 친일에 눈먼 문인들이 시로, 수필로 전쟁을 찬미하고 젊은이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이미 대세는 꺾이고 일본은 패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바칠 외아들도 남편도 없었던 것은 노천명에게 있어 다행한 일이었을까.

해방이 되었지만 시간은 여전히 노천명의 편은 아니었다. 그는 6·25가 발발하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노천명은 서울 수복 후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문인들의 석방운동으로 풀려났던 것이다.

본인의 선택이고, 그에 따른 결과이긴 하지만 그는 불운한 이임에 틀림없다. 해방 후의 부역 건까지 밟혀서일까, 그의 만년이 안쓰럽다. 노천명은 1957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46세. 2001년 이후 노천명문학상이 제정되어 매년 시·수필·평론 등 9개 부문에서 시상하고 있다는데 글쎄, 그것은 기린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돌아보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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