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새

소설 조회 수 1337 추천 수 1 2014.10.04 16:25:07

 

집으로 돌아가는 새

 



도시는 잠에서 깨어 있지 않은 이른 새벽이다. 다운타운의 한 호텔에서는 영화의 한 장면을 찍기 위해 많은 스텝 진들과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카메라는 삼단 의자에 앉아 있는 조감독의 지시를 받으며 촬영하지 못하고 있는 장면을 배경과 소품에 잔뜩 신경 쓰고있다. 밖에서는 중형 트레일러에 영화 소품장비를 실은 차량들이 그때 그때를 위해 부산히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다. 공공주차장에는 봄이라고는 하지만 이 도시는 사막의 기후로 해가 뜰 때까지는 한기를 느끼고 움츠린 어깨로 대화할 때마다 하얀 김이 나고 있다. 커피와 토스트, 그 밖의 음식들을 제공하는 트럭이 준비되어 있다. 몇 몇 사람들이 그 트럭 앞에서 김이 나는 커피를 마시며 연출감독이 올 때까지의 여유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거기 핸더슨씨 걸을 때 호텔 안을 바라보지 말고 그냥 앞만 보고 보통걸음으로 지나가는 겁니다. 안에서 소란이 있어도 상관하지 말아요. 너무 이쪽을 의식하는 것 같아요."
조감독의 리허설 지시에 따라 리처드 핸더슨씨는 아무 대답도 안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알았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다른 작품에서도 대화는 거의 없었다. 출연한 작품은 많았으나 그가 어느 영화에 나왔는지는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엑스트라라는 것이 영화의 소품처럼 아니면 배경에 삽입된 이름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나마 조감독, 그 사람만이 매번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 주었다. 그에게서 대본은 따로 주어지지 않았고, 영화사 사무실에서 그와 다른 여러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영화의 내용을 간단히 들은 설명이 고작이었다. 그러니까 화면에 나올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고, 예를 들어 주연배우들이 호텔 로비에서 대화를 나눌 때 호텔 밖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에서 때로는 뛰어 가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느리게 걸어가도 무방한 영상에서 세심한 관찰이 없는 그런 부분이었다. 엑스트라만 따로 맡고 있는 단역반장은 조감독의 지시에 더 화가 나있다.
"아유, 저거는 벌써 몇 년째 단역인데 저 모양이야. 조감독만 아니라면 벌써 그만 두게 하는 건데 저러면 괜히 나만 경을 친다니까."
나이는 그보다 더 어려 보이지만 '스티븐'이라는 단역반장은 단단한 체격으로 저런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 육 년은 헬스클럽을 다녔을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액션영화에서 대역을 맡아 놓고 하기에 영화를 보는 일반인은 몰라도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는 물론이고 주연배우들도 잘 알고 있었다. 시계가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처음 영화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2년 전쯤인가 여름에 산타 아니타 경마장에서였다. 아니, 그곳을 다녀오다가 우연히 영화를 찍고 있는 장소에 구경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단번에 돈을 벌 수 있다는 꿈보다 늘 정체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과 일상에서 벗어나 저돌적이고 흥분되는 말들의 경주는 어쩌면 그가 가지지 못한 외교적 성격을 매번 돈을 주고 사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대학 다닐 때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그의 부단한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햇볕이 따스한 어느 일요일 친구와 같이 처음으로 찾았던 곳이 경마장이었다. 그 뒤로도 여러 번 같이 다녔고, 나중엔 혼자도 찾아 다녔다. 그날 그러니까 영화를 찍고 있던 그날도 경마를 시원스레 보았고 모처럼 배당을 받았는데 경마 지의 확률에 맞춰 샀는데도 세금을 제하고도 $180을 벌었다. 구름처럼 밀려왔던 사람들이 경마장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는 보통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사람들과 같이 나가게 되면 짜증스런 기분, 시간으로는 얼마 되지 않아도 으레 파킹 장에서 날카로운 자동차 경적소리를 여러 번 듣고서야 빠져 나올 수 있다. 10번 프리웨이가 그리 밀리지 않는 퇴근시간전이라면 여유 있게 돌아 갈 참이었다. 이제 막 경마장을 빠져 나오는 길목에 사람들이 웅성거려 그곳에 눈을 따라가며 운전은 손에게 맡겨 두고 있다가 자연스레 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분명 영화를 찍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줄 알았는데 영화를 찍기 위해 준비한 세트 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거 어떠하면 좋지? 간단한 보충촬영인데 이런 사고가 나서... ..."
귀에 들리는 누군가의 말로는 심상치 않은 사고가 발생한 것 같았다. 한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앉아 있고, 그를 가운데 두고 둘레에 몇 사람이 매달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이 그의 다리를 주물러 보자 그 남자는 '아, 아-악' 소리를 냈다. 구경만 하던 그는 사람을 밀치고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잠깐만 봅시다. 나 카이로프로텍 닥터요."
그러며 그 남자의 발을 숙련된 손동작으로 만지고 있었다. 몇 번의 더 아픈 소리와 신음을 했다. 이건 골절된 뼈마디가 자기의 위치에서 이탈되어 응급처치를 해야했다. 우선 그의 발을 급하게 소품으로 쓰던 알루미늄 스틱을 반으로 구겨서 양쪽으로 묶었다.
"우선 X-RAY를 찍어 봐야 알겠지만 뼈에 금이 갔을 수 있으니 병원에 가서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방치하면 더 큰 수술을 해야 할지 모르니 서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바쁘게 움직였으므로 그가 이마에 흘리는 땀을 닦으며 환자를 안심시키며 말을 해줬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도 모르게 그 곳에 그리 깊은 턱이 있는 줄 몰랐어요. 저는 데이비드 호프만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몸이 훨씬 단단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고통도 덜 한 것 같고 의사라고 하셨는데 존함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아뇨, 저는 그냥... ... 아마 별일 없을 겁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일어나 돌아서려고 하는데 그 남자, 데이비드 호프만 명함을 한 장 주었다.
"언제 전화 한번 주시겠습니까?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
무심코 명함을 받으며 "사례는 필요 없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궁금하니 내가 전화는 한번 할 수 있겠죠." 가벼운 마음으로 명함을 받아서 와이셔츠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약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구급차의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 왔다. 그 남자가 구급차에 싣는 것을 보고 그도 무리를 빠져 나와 차를 타고 10번 프리웨이를 달렸다. 자신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는 모르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는 병원 사무실로 돌아왔다.

어느 때와 같이 병원에서 오후에 진찰한 환자를 보내고, 하루를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아내는 애들을 학원에서 데리고 올 시간이다. 우편물을 확인하던 그는 낯선, 우표도 붙이지 않은 편지 한 통을 바라보았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편지를 열고 읽어보는 순간 아까 데이비드 호프만 이라는 사람이 광선과 그 빛의 피사체의 부위사이의 각도를 맞추려다 플래그 스텝의 고정 축이 무너지고, 카메라 레일 뒤에 있는 턱에 걸려 쓰러지며 일층 높이의 아래로 떨어졌다고 들었을 때처럼 아찔한 현기증으로 비틀거렸다. '이혼수속에 관한 서류' 라는 무게가 꼭 그랬다. 이미 서류에는 빈 공간 없이 다 채워져 있었다. 유일하게 그의 이름 리처드 핸더슨의 인쇄 위에 사인을 하기 위한 공간만 남아 있었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가 그렇게 좁아 보였다. 앞장에 먼저 올라와 있었는지 뒷장에 올라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한 장의 편지도 같이 있었다.

사랑하는 당신. 리처드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지 모르겠군요. 당신과 많은 대화를 했기에 이제 제가 내린 결정에도 그리 놀라지 않으리라 봅니다. 당신과 결혼해서 15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장 변화한 것 중 사랑스런 우리 아들 로버트와 앨버트입니다. 로버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수한 성적으로 이어 오브 스튜던트에 뽑혔을 때도 나는 아들의 엄마로서 자랑스러웠고, 당신의 외조에 힘입은 것에, 당신께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시죠. 우리 둘 다 같이 직장 생활했지만 아이들은 모난 구석 없이 성장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취미생활이라는 경마로 인해 그 여파가 얼마나 큰지 모르고 자꾸만 당신은 사소하게만 보십니다. 임대한 병원 사무실에 환자들이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당신은 자리에 없어서 기다리다 돌아가야 했고, 자연히 수입이 줄어들어 페이먼트도 제때 하지 못해 독촉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렵게 구입한 주택도 은행 차압으로 절차가 진행중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암담합니다. 저는 친척의 도움으로 '글로리아' 무역회사에 취직을 해서 다음 달부터 출근합니다. 집세와 아이들과 먹고 살아가야 하기에 내린 결단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변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도박으로 인하여 같이 살수가 없어 이혼하려고 합니다. 저 역시 밤잠 안자가며 내린 결단이니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양복과 속옷, 그밖에 것은 가방에 넣었고, 서재에 있는 책과 잡동사니는 다 싸 놨으니 연락처를 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아이들과 제가 집에 오기 전에 떠나면 제가 아이들에게는 당신이 외국선교사 활동으로 아픈 환자들을 치료하러 갔다고 하겠습니다. 또 이런... ...
여기까지 읽고 그 후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은 다 읽기도 전에 그는 그 편지를 땅에 떨어뜨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아! 이것이 내 아내가 쓴 것이란 말인가! 자신의 처량한 모습보다 사랑하는 아내가 얼마나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이 글을 썼을 것이라 생각하니 참담했다. 학창시절부터 만나 연예하면서 숫한 사랑의 밀어는 그의 머리위로 아지랑이가 피어나듯 흩어지고 있다. 행복의 꿈들을 만끽하고 나서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그것은 허허 로운 바람같이 떠나갔다. 이미 그는 후회를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늦어 있음을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이 순간을 맞이했다. 놓여진 서류에 사인을 하고, 주저앉아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얼마를 지나 큰 가방 두 개와 양복을 담은 여행용 백이 놓여진 침실을 보고 있었다. 다시는 이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그는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을 나와 어머니 집밖에 생각이 안 났지만 가기 싫었다. 그는 소란스러운 것은 딱 질색인 사람이었다. 혼비백산할 소식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나설 것이고, 사태 수습을 하기 위해 친척들을 다 불러모아 아내와 애들이 있는 집으로 쳐들어 갈 것이다. 빚밖에 없는 재산과 아이들의 부양부터 시작해서 펄쩍 뛰실 것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도리질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밤중에 평소 알던 친구들 집에 전화한들 몇 녀석은 꾸어간 돈 갚으라고 하거나, 돈 빌려 달라고 할 까봐 아내를 시켜서 아직 안 들어 왔다고 할 것이다. 처음 경마장에 같이 갔던 찰스 녀석만이 그의 사정을 이야기하면 어디서 술밖에 더 먹겠느냐는 생각으로 앞으로의 진로는 나중일거라 생각해서 그는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했다. 많은 생각들이 열어 논 창문사이로 바람을 타고 떠나갔다. 어디서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는지 그것을 찾으려 했지만 도무지 얽힌 실타래처럼 엉켜있었다. 과거의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왔고 현재는 눈물로 답하였다. 그가 사인한 이혼서류만 아니라면 그래서 돌아가 그걸 찢고 드라이브를 했더라면 생명보험의 금액이라도 가족에게 남기고 싶었다. 어느 소설의 주인공처럼 자살을 가장한 죽음도 너무 값지지 못했다.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를 달리다 멈춘 곳이 아내와 사랑의 밀어를 나누던 '차터 하우스'였다. 정말 오랜만에 들렸다. 아이를 낳고 난 후로는 여기 온 기억이 없었던 곳이다. 저녁은 이미 늦어 있었고, 칵테일 바만, 그렇지만 밤바다의 파도가 보이는 창가로 자리를 주었다. 주위에는 사랑하는 남녀가 앉기도 했고, 나처럼 혼자 온 사람도 있었고, 친구들과 같이 온 무리도 있었다. 오늘에서야 그는 이런 곳에 사랑하는 사람들만 오는 것이 아니고, 절망한 사람이나, 죽고 싶어하는 사람도 올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알았다. 한 잔의 위스키 칵테일을 앞에 놓고 창가를 바라다보니 바깥의 풍경보다 불빛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고, 그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면서 큰애의 얼굴과 개구쟁이 앨버트가 보였다. 친구들로부터 도박증세가 심하다고 걱정해준 것이 바로 어제 같았다. 그도 모르는 일처럼 병원에서의 점심시간이 이상했다. 햄버거를 물고 차를 타고 어디까지 갔다 오는 그러면서 그 기억이 없는,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갈색 말이 달릴 때면 내 근육이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이 넘쳐나 꿈틀거렸다. 경기의 관람수준에서 이제는 꼭 오기 전에 경마 지를 사서 손에 쥐고 사람의 뼈마디를 집어 나가듯이 이리 잡았다 저리 잡았다 했다. 트리플에 한 번 맞추었을 때, 그래서 무려 230배라는 배당으로 세상에서 아무도 못 고친다는 환자를 내가 고쳐 논 사람처럼 굴었다. 경마 지에 이름이 실리기도 했었다. 아내에게 다이아 반지를 선물했고, 아이들이 바꿔야겠다는 컴퓨터도 사주었다. 받은 배당금 영수증은 액자라도 만들어 걸어 놓고 싶었다. 친구들은 나를 경마를 마스터 한 사람처럼 생각했고, 밤새 축하를 받으며 술에 젖은 날이 있었다. 그 뒤로도 경마에 관한 전문가가 되다 시피 했다. 주말은 골프 채대신 그곳에서 보냈으며 가족과의 시간도 점차 일상적인 형식에 크게 벗어나 있지 못했다. 아이들의 숙제는 점차 애들 엄마 몫으로 돌아갔고, 이사온 후부터는 아내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바의 문을 닫을 시간에 그는 '차터 하우스'에서 나왔다.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아직 풀지 못한 숙제처럼 과거가 달려 있었지만 그대로 놔 둘 참이었다. 목적 없이 가던 끝도 어디쯤에서인가 다시 돌아오면서도 미래조차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어둠에서 조금 밀려나 동이 트고 있을 무렵 시장기가 돌았다. 24시간 영업하는 인터 내셔날 판 케이크 하우스에 들어갔다. 그는 가족이 즐겁게 교회를 가기 전에 먹었던 판 케이크보다 커피와 토스트를 시켜 배를 채웠다. 졸음이 솟아져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정리 해 봤다. 병원에 가서 그를 돕던 인턴도 이제 그만 두게 해야 할 것이고, 이번 기회에 병원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았다. 건물이 친구 것이었으니 망정이지 임대 비도 몇 달 밀렸는데 쫓겨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46년 동안 살면서 그가 갈 곳이 없었다. 잠깐 잠을 잔 것 같았다.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보니 아침을 하려고 가게입구에 줄을 서 있었다. 그는 서둘러 값을 치르고 나왔다.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욕을 하는 것만 같았다. 괜한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무안했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병원에 들어섰다. 경비원과 인사를 나누고 병원 사무실에 들렸다. 흡사 내가 남의 사무실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환자 기록부터 척추교정기, 물리 치료장비까지 몸은 없고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그에게 통원치료를 받는 환자가 없었다. 가끔 바깥에 걸린 간판의 이름을 보고 처음 들어오는 사람과 전화로 문의하는 사람들뿐이다. 도무지 연결될 수 없는 경마와 그의 전공이 마치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고 믿고 이쯤에서 끊어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상담의자에 앉아 이른 시간이지만 전화를 했다. 우선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부터 그 동안 얻어 쓴 사무실빌딩 친구에게도 이제 홀가분하게 친구에게서 혹을 떼어 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니 눈물이 흘렀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샘은 별 것 아닌 것에도 주체할 수없이 흘렀다. 이른 시간이지만 차라리 아무도 받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메시지만 남겨 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만일 누구든 상대와 대화를 하다보면 내 의지가 다시 한번 도마에 올려놓고 값싼 동정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 서둘러 전화를 들었다.

다행이 전화를 받는 사람은 인턴밖에 없었다. 인턴도 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놀라는 기색 없이 체념하듯 대답하였고, 오히려 그를 걱정하는 소리로 잘 지내라는 여운을 남기고 끊었다. 간단한 도구만 정리해서 가방에 넣었다. 남은 물품들은 그대로 나둘 것이다. 이 빌딩에 신세진 것을 생각하면 깨끗하게 가져간다는 것이 오히려 짐스러웠다. 친구 역시 의사이니까 알아서 처분하리라 믿었다. 이제 남은 건 뭐가 있을지 사무실보다 자신의 옷을 더듬거려 보았다. 와이셔츠에 손길이 가면서 스치며 느낌이 와 닿았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명함이었다. '뉴 월드영화필름 사'가 왼쪽 위에 로고와 함께 있고 정 가운데에 '데이비드 호프만' 라는 이름과 아래에 이름보다 작은 글씨로 촬영 및 조명 조감독이라는 단어가 써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었다. 글쎄 이 사람에게 전화를 걸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바로 어제 일이기에 기억만은 뚜렷했다. 그는 조감독이란 사람의 안부를 묻기는 하겠다는 자신의 말까지 떠올리며 전화를 걸었다.
"저는 리처드 핸더슨이라는 의사입니다. 데이비드 호프만씨 계십니까?"
그는 스스로 아직도 의사라고 하는 자신에게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꿔 드리겠습니다."
전화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전화기가 아니라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착각이 일었다.
"어제 제 발목을 잡아 주셨던 분이세요? 지금 어디십니까? 다름이 아니고 병원에 가서 깁스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통증이 있군요. 제 사무실에 들려주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죠. 주소는 명함 아래에 있는 그 주소입니까? 그럼 찾아 뵙죠." 참 신기했다. 그가 왜 가겠다고 했는지 또, 어떤 연관관계가 없을 텐데 끊어지지 않고 마치 끌려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느낌을 분석하자면 첫째는 깁스를 했는데도 통증이 있다는 것은 X-RAY결과를 잘못 판단해서 복합골절을 단순골절로 정형했다는 것과 둘째는 환자의 날카로운 신경이 없는 통증을 가식통증으로 그것이 정말인 것처럼 느끼는 것과 다름없다는 분석을 했다. 그리고 이제 어디라도 떠난다고 했으니 떠나기에 앞서 어디 한군데 들린다고 달라질 것이 없었기에 그리로 간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사무실은 할리우드에 있었고 생각보다 조용한 사무실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전화라도 주시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은혜를 갚지 못하고 말았을 겁니다."
"은혜라니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 그런데 아프다더니 지금은 어떠십니까?"
그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이 조감독이라는 사람과 말을 주고받았고, 두 사람은 일어나서 병원에 갔다. 병원에 진찰 기록을 확인했고, 다시 한번 재 검진을 의뢰했다. 정말 의외의 일이지만 오진이 아니길 바라면서 기다렸다. 단순골절로 판명했던 의사는 새파랗게 질려 나오면서 그에게 반문했다. 단순골절처럼 보였으나 끝에 뼈가 부러지면서 근육을 찌르고 있다며 처음엔 분명 그렇지 않았다며 처음의 사진을 그에게 내 밀어 보여 주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덜 진행된 뼈가 아래로 내려오며 나타나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병원 침대에 누어있는 조감독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자연스레 그의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다시는 의사라는 직업보다 다른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과 아직 진로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랐다.

그는 조감독 집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조감독은 아이들이 없었다. 언제인가는 조감독과 허심탄회하게 과거를 꺼내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부인만 있었지만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빼어난 미모에 아름다움 몸매는 남자로서 한번쯤 품어 보고 싶은 여자였다. 자신의 처지와는 상관없이 시각적 흥분과 꿈틀거리는 육체는 그의 정신과 싸움을 했다. 늦은 저녁 화장실 가다가 만난 실루엣을 입은 여체의 모습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 스스로 싸움에서 지기를 바랬는지도 모르지만 조감독과 같이 활동하는 시간들이라 어떤 사고는 없었다. 곡예사의 줄타기 같은 불안함은 꿈속의 성에 사는 여자로만 기억했다. 그가 조감독 집에 묵는 다고 해서 그 집에 불편하거나 고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감독 집이 화사한 온기가 돌았다. 영화사 사무실에 같이 나가기도 했고, 불편한 그의 발을 부축이며 친구가 되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조감독을 대하였지만 조감독은 그를 생명의 은인처럼 여기는 눈치였다. 그의 재검사를 의뢰하지 않았다면 부상의 상태가 오래 갔을 것이고, 심각한 염증으로 병원의 닥터는 그의 안목을 높이 평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의 3달만에 그는 붕대를 풀었다. 물론 다시 X-RAY를 찍었을 때는 완벽했고, 통증도 없다고 해서 그는 안심했다. 다만 조감독은 유난히 다쳤던 오른쪽 다리에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저녁을 같이하고 티타임을 가지면서 그가 조감독에게 말을 열었다.
"데이비드 호프만 씨. 혹시 제가 뭐 도울 일이 없겠습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기도 그렇고 뭔가 일을 찾아야 하겠기에... ... ."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의 전담 닥터이신 데요. 만일 그게 정 부담스러우시면 제가 재미난 일이라도 마련해 볼까요? 수입은 신경 쓰지 마시고... ... ."
"어떤 일이면 어떻습니까. 밥값이라도 하고 싶어서 그런 거죠."
"그런 소리 마십시오. 저는 가족이 단출해서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는데요."
정색을 하며 환하게 웃는 조감독의 얼굴이 보기 좋았다.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면서 그가 할 일이라는 것은 아마 영화장비를 나르는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생각하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훤한 낮보다 밤에는 잊고 싶은 자신에게서 해방을 누렸지만 간혹 가족 생각이 났고, 뛰어 노는 애들 생각으로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에게서 낮은 경마라는 유혹으로 마음이 들떠있고, 밤으로는 고독과 싸워야 했다. 어쩌면 감옥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잘못된 삶의 방식은 두고두고 후회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몸에 난 상처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몸부림치던 밤은 동이 트며 늦잠을 자게 되었다.

아침을 어떻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토스트에 커피 한잔이기는 해도 맛을 모르고 언제 먹었는지 싶게 끝냈다. 조감독과 같이 사무실에 나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회의실에 있어서 어떤 프로젝트가 있구나 짐작을 했다. 그 중 유난히 덩치가 좋은 사람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조감독과 그가 나타나자 대화를 중단하고, 모두들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조감독이 그 덩치가 큰 남자를 불러 자신의 사무실로 같이 들어갔다.
"인사들 하세요. 이 분은 리처드 핸더슨이라는 분이고, 이 사람은 스티븐 이라는 사람으로 단역반장입니다."
이 분과 이 사람사이의 신분 격차가 미묘하게 느끼게 하고 있었다. 투박하게만 보이는 스티븐 이라는 사람과 인사를 했다.
"앞으로 이 사람과 같이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말은 해뒀으니 한 번 해 보시고 어려움이 있으면 제게 말하세요. 스티븐 씨, 이 분 잘 부탁해요. 알았죠?"
서로가 인사는 나누면서도 단역반장의 눈초리는 그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감독의 사무실을 나와 회의실로 향하는 짧은 거리에서 단역반장은 앞으로 잘 해보자는 격려가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서서 사람들에게 다시 나를 인사 시켜주었다. 그러자 박수로 대답을 대신하고 휘 바람을 부는 사람도 있었다. 그의 기분이 이상했다. 박수를 치는 일이란 칭찬할 때만 쓰는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면서도 박수를 치는 것이 어색함을 느꼈다. 영화를 만드는 일이란 단순히 시나리오에 있는 데로 배우의 움직임을 카메라로 찍어나가는 작업으로만 생각했다가 수천 수만 가지의 조합으로 된 영상임을 알고 크게 놀랐다. 그러면서도 체계적인 조직사회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거대한 공룡의 뼈를 조립하는 작업이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 뒀는지 그가 하는 일이란 단순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있으면 되거나, 자동차에 앉아 있거나, 또는 거리를 걸어가는 일이었다. 같은 소속의 다른 사람들은 힘든 일도 많이 보였다. 얼마를 같이 지내다 보니 왜 그런 일들만, 앉아 있거나, 거리를 배회하거나, 군중 속에 있는지를 알았다. 그것은 초보에다 이미 할당받은 부문을 첨가 할 수 없었고, 경력이 쌓이면 하는 일로 그는 엑스트라 중에서도 제일 낮은 단계의 엑스트라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싫은 것은 아니었고 보수도 하루에 한 두 컷을 참가하는 그것을 건당이라도 하며 건당 $80불을 일주일을 모았다가 주급으로 받았다. 보통은 연락처를 남기면 수시로 연락을 해서 촬영장으로 오는 것이 예사이지만 평상시도 주위에서 대기를 하였다. 엑스트라에서도 등급이 있어서 영화가 선정 될 때부터 출연 스케줄을 받는 사람도 있지만 6등급은 단편으로 그때마다의 섭외한 사람이었다. 그는 5등급으로 혹시라도 촬영에 연락 받은 사람이 못 오게 될 경우 대타로 그 사람의 옷을 입기도 하고, 배정인원을 채워나갔다.

그는 아직까지 촬영이 있는 날이면 떨려왔다. 영화가 만들어져 가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소품들을 준비하고, 무대꾸미는 세트반장과도 인사를 하고 지내는 터에 이것저것을 구경했다. 소품담당 반장이 다른 스텝과 이야기 할 때 여러 가지 소품들을 보았다. 그 중에서도 모형 권총을 만지고 싶었다. 사람들의 방심하는 사이 권총 하나를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집에 가서도 그는 혼자 거울을 보며 배우의 대사를 하기도 했고, 만져 보며 어떻게 진짜 총처럼 불이 총구에서 나가게 되는 지도 알았다. 조그만 진공관으로 공포탄처럼 생긴 것인데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 대신 불꽃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언제나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그도 배우가 될 수 있을지 엉뚱한 생각도 해 봤다. 어떤 때는 이 총으로 은행강도 짓을 해도 폼이 날 것 같았다. 돈 때문에 생긴 그의 엉켜진 삶을 풀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쓴웃음도 보였다. 갑자기 그는 연체된 집세를 생각했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생각했다. 로버트는 여전히 학원에 다니는지 궁금했으며 앨버트는 친구들과 싸움을 안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머리를 내저었다. 그러면서 그는 애써 잊으려고 했다. 개인 은행통장을 봤다. 결혼하고도 얼마를 아내와 따로 은행 구좌를 관리해왔었다. 그것이 편안했고 남들처럼 돈을 주고, 받는 일없이 각자의 맡은 바에 충실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번 돈을 아내에게 주고 살림을 맡아서 하라고 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가 어쩌다 돈이 필요할 때 손을 벌려 돈을 달라고 하는 것도 어쩐지 보기 싫은 그만의 방법대로 생활했고 그의 아내도 그런 방식을 반대하지 않았다. 영화사에서 자동 이체되어 얼마를 버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일하기 전까지는 불과 몇 백불 남아 있었는데 그 도장 찍힌 금액이 그대로 남아 있어 마치 잔고가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착각했다. 그 남은 잔고가 거울로 본 그의 얼굴이었다. 언제까지 엑스트라만 할 것인지 인생 통 채로 그렇게 남아 있을 거라는 다소 의기소침해 있었다. 영화사에서도 봉급을 은행지로로 보내고 있었다. 그가 크게 돈이 필요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질구레한 것들, 면도기와 칫솔 그리고 속옷이나 음악 시디와 혼자 먹는 점심식사정도는 현찰이 필요했다. 오늘도 구체적으로 필요한 어떤 목록도 없었지만 그냥 지갑에 얼마정도를 넣어 두기 위해 은행을 들린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영화에 관련된 서적을 구입하고, 모처럼 자신이 이 집 부부에게 조그만 선물이라도 하기 위해 돈을 찾으러 은행으로 갔다. 오늘의 배역은 오후 늦게나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예요.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
"아. 네. 헬렌씨도 잘 지냈어요? 아직도 기억해 줘 고마워요."
오래 전부터 다니던 은행에 직원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는 분명 필요에 의해 돈을 찾으러 왔다. 지출전표에 필요한 만큼의 돈을 써 왔기에 용지를 내밀고 건네주는 돈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들이 두서없이 튀어 나왔다.
"헬렌씨, 내 주머니에는 권총이 있어요. 어서 돈을 줘요."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여직원에게 말하고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한번도 이런 일을 계획하거나 상상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는 영화에서 성공하지 못한, 그래서 종말이 너무도 뻔한 내용을 본적이 있을 정도였다.
"네? 뭐라고요? 뭐라고 그러셨어요?"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으면서도 여직원도 잘못 들은 사람처럼 되묻고 있었다. 그는 대답대신 모의 총을 꺼내 보였고, 끔찍한 장면이나 불쑥 나타난 어떤 장면을 목격한 사람처럼 헬렌은 "악" 하고 외마디 비명이 질렀다. 내 주머니에 들어 갈 얼마의 돈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의 머리는 그가 온전히 판단하기에 너무 복잡하게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이 얽혀 서로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와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에서 극심한 혼돈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난 소란스러운 게 딱 질색이에요. 소란 떨지 말아요. 앞에 있는 돈만 주면 되요. 이건 영화에서 쓰는 총이지만 불은 나가요. 알아요?"
벌벌 떨면서 돈을 주머니에 담고 있는 여직원 옆에서 다른 동료는 카운터에 흰 플라스틱 캡을 열고 소리나지 않는 비상경보를 누르며 아주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고 이내 몸까지 숙였다. 비록 은행에서 일을 하고는 있지만 헬렌은 똑똑한 여자였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도 어떻게 대치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일년에 네 번씩의 연수교육 때마다 은행강도의 대처 요령을 빠지지 않고 교육받았으나 리처드 핸더슨씨의 지금 행동은 준비되었거나 자신의 의지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으로 파악했다. 더욱 그를 간파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가 스스로 가짜 권총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리..리처드씨.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지난번 비틀린 제 아들의 팔을 잘 교정 해줘서 고마웠어요. 그런데 오..오늘은 좀 이상하세요."
"나는 지금 영화의 한 장면을 연습하는 거요. 헬렌씨는 그냥 아무 말 안하고 돈이나 담으면 그만일 엑스트라입니다. 대본을 보지 못 했어요? 봤다면 아직 대사를 못 외우고 있는 것 아녀요? 자꾸 그러면 리허설 때 내가 피곤해요. 자 빨리 합시다."
"저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아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말씀해 주세요"
"조감독이 바깥에 지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계속이라는 사인이 있을 겁니다. 곧 경찰이 와서 주위를 에워 쌓을 겁니다. 물론 경찰도 엑스트라이지만 어서 돈이나 줘요."
헬렌이라는 직원만 빼고는 모두 엎드려 있었다. 정문과 뒷문에 서있던 경비원도 돌기둥에 몸을 숙이고 숨죽이고 있었다.

같은 시간 영화사에는 여자 한사람이 조감독을 만나고 있었다. 그 여자는 리처드 핸더슨의 부인이었다.
"우리 그 사람이 일하는 곳이 여기 인가요? 여기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죠? 제 아들이 어떤 영화에서인가 아빠의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왔다고 하던데 그럴 리가 없다고 말 해줬죠. 어떻게 의사가 영화배우가 되겠어요. 더구나 그이는 말도 제대로 안 하는 성격인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부인과, 아니 가족과 이혼하고 자신과 싸우면서 살고 있어요. 엑스트라이기는 하지만 영화 쪽에도 애착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사실 전 그 사람과 정말로 이혼하려 했던 것이 아녀요. 너무 힘들기에 충격요법으로 그렇게 해야 만이 경마인지 하는 도박을 안하고 삶의 진지했던 모습으로 돌아 올 것이라 믿었어요. 그가 하던 병원도 그이의 친구가 언제라도 돌아오면 자리를 내어 준다고 했어요. 애들에게도 이제 곧 돌아 올 것이라고 말 해줬거든요."
"우선 집으로 전화를 해야겠어요. 핸더슨씨는 집에 있을 겁니다."
"아녀요. 지금 당장 가서 만나 보고 싶어요. 여기 있다는 걸 확인 한 이상 기다린다는 건 부질없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조감독은 머리를 갸우뚱해 보이며 사무실의 서류를 정리했다. 2년간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부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사무실을 나설 때까지 생각했다. 다리의 부상 때문이라고는 하나 조감독은 그를 환자와 의사사이가 아닌 그 이상의 연민의 정이 있었다. 차마 동성으로 행동하거나 고백을 할 수 없었고, 단지 그를 보면 마음 편했기에 스스럼없이 대했다. 형제처럼 의지했고, 가족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핸더슨씨는 그런 이성적인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조감독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연락이 안 되는 그를 생각하며 옆에 그의 부인과 같이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지만 조감독은 그와의 시간들을 더듬어 과거로 달려가고 있다.

은행 바깥에서는 완전 무장한 경찰이 에워싸고 있고 은행강도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시민의 안전이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어느 때처럼 숨죽인 긴장을 하고 몇 블록의 교통을 차단한 체 세워진 차량들 사이로 몸을 숙이며 긴 총구를 은행 문 앞을 향해 겨누고 있다. 이건 아닌데 그도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음을 의식했다. 평상시처럼 은행에 들러 돈을 찾은 다음 조감독 부부를 위해 예쁜 새장에 잉꼬 한 쌍을 선물하려고, 새집에 들러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자신의 손에는 무겁게 느껴지는 돈 자루가 들려있고 그 다음을 어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럴 때 조감독이 어떻게 하라고 했으면 좋겠고, 평소 인상만 쓰던 스티븐이라도 소리를 빽 질러주면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도대체 발길은 떨어지지 않는데 아무도 뭐라고 하거나 어떤 미세한 소리조차 없었다. 마네킹처럼 얼마를 그렇게 있어야 하는지 몰랐다. 뒤에서 은행직원, 헬렌씨가 그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불러서 급하게 뒤를 돌아 봤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리처드씨. 이제 끝났어요. 당신의 역할은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시면 되요. 아무 것도 들고 나가지 마시고 손에 든 것을 땅에 내려놓고 저 문을 열고 어느 때처럼 나가시면 됩니다."
소리를 내서 울음을 울 때 누군가가 어떤 말을 하면 그것이 제대로 들리질 않는데 그녀는 멍하게 서있는 그를 보면서 겨우 말을 이어갔다. 그래 내가 나가면 되는 거지만 내가 사야 할 잉꼬 한 쌍은 어떻게 해야할지 자꾸만 머리에서 되돌린 테이프처럼 반복되며 스스로 묻고 있었다. 지금은 영화를 찍는 거라고 그는 믿고 싶었다. 밖에서는 엑스트라 한 명이 은행 문 옆에 몸을 기대고 있다. 아직 밤이 오지 않은 까닭인지 흔한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헬렌씨를 뒤로하고 그는 천천히 걸어 나간다. 앞에는 잉꼬 한 쌍이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허공에서 환하게 웃는 앨버트와 로버트가 나란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하늘을 바라보는 짧은 순간에 경찰들은 그물을 던져 새를 잡듯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물의 마디마다 검은 매듭은 사각형을 그리며 단단히 묶여있고, 거대한 그물의 형태는 아무리 사나운 사자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어져있다. 쓰러진 육체에서 조그만 흰 새가 허공을 행해 날아가는 꿈을 꾸고 있지는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경찰은 손에 무기가 없는 걸 보고서 순식간에 달려들어 그를 짓누르며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차갑게 느껴지던 땅 바닥의 느낌은 살며시 눈을 감고 있는 그는 또 다른 자신을 돌아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백 만 달러라는 의외의 보석금이 책정되었다. 보통 은행강도의 케이스는 보석금의 신청이 불가했고, 사회의 혼란과 직결되는 범죄로서 가장 끝에 서있는 어쩌면 차디찬 감옥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생각할 때 보석금의 책정이 받아 들여졌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사실은 모든 상황이 감안되었다. 범죄기록이 없었으며 체포당시 경찰에 반항하지 않았고, 은행원이었던 헬렌의 진술은 그가 은행의 우대고객이었으며, 계획된 범죄가 아니라 우발적 정신착란증세 일 수 있다는 변호사의 선처가 법원에 의해 받아 들여졌던 것이다. 보석금의 10%인 십 만 달러를 그의 부모가 대신 보석금 회사에 냈고, 그는 풀려 나왔다.
"여보, 제 잘못이에요. 제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하루만 더 일찍 당신을 찾아갔더라면... ... . 이렇게 라도 돌아와서 기뻐요. 더 이상 헤어지지 말고 살아요."
서로가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새장의 카나리아는 물을 갈아주려는 주인의 손길에 새장을 떠났고, 푸른 창공과 튼튼한 날개로 어디까지 갈 수는 있으나 늘 놓여져 있는 작은 플라스틱 용기의 먹이는 찾을 수가 없으며 아름다운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다. 앉아있던 나무 가지에서 나무를 쪼아 보았지만 주인은 자신을 찾아 주지 못했고, 돌아가고 싶은 집을 그리며 죽어 간다. 그는 새였다.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행운의 새였다. 얼마를 방황하다 왔는지 그는 지쳐있었다. 두 아들이 곁에 있음에도 그것이 시각적 위안일 뿐 자신의 몸조차 주체하기 힘든 그로기상태였다. 단지 집과 가족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 새가 되었다. 그의 모습은 팔에는 날개가 있었으며 다리는 정말 작은, 날아가는데는 쓸모가 없는 상태로 몸에 달려 있다고 표현해야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굴은 뚜렷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저 밑의 풍경은 신기하기만 했다. 어렵지 않게 손을 몇 번 내저으면 어느 새 푸른 바다를 볼 수 있었고, 산이 보였고, 구름 속에 있었다. 자유가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즐거워 할 순간이었다. 그때 바로 앞에서 나타난 독수리 날개처럼 큰 날개를 펼쳐서 그를 덮치려고 했었고, 끝없이 땅으로 떨어지며 도망갔다. 뒤를 돌아보니 저만치 서 자신을 향해 달려 내려오는 그 새는 말이었다. 등에는 번호가 새겨진 안장을 두른 경주마 같았지만 눈과 입은 새의 모양을 닮은 그래서 날카로운 부리로 그를 찍으려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악. 안돼! 난 살아야 해."
"여보 괜찮아요? 아니, 웬 식은땀이 이렇게 많이 흘러요.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아니오. 부르지 말아요. 난 괜찮아요. 악몽을 꾼 것 뿐이요."
그는 돌아서서 나가려는 아내를 붙잡으려고 손을 내 밀었다. 그는 한번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없었지만 그는 잃어버린 자신을 꿈을 통해 찾았다. 지난 몇 년이 악몽이었는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고 느꼈다.

"여보. 당신의 이름에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알아요?"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에 다른 뜻이 있을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는 가느다란 웃음으로 말을 이어 갔다.
"리차드. 당신이름에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오뚝이처럼 일어나며, 어려운 고난과 역경에도 슬기롭게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라는 할아버지의 깊은 예지가 담겨 있어요."
"아니,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의 내막까지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었소?
"지난 추수감사절 날 아버님께서 저한테만 이야기 해주신 거죠. 당신이 밖에서 터키를 굽는 동안 거실에서 앨범을 보며 이야기 해주셨어요."
할아버지의 등을 타고 놀던 생각과 그네를 밀어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이제 그에게 법원 2차 공판이 있기까지 겨우 한 달을 남겨 두었다. 이제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그는 싫든 좋든 몇 번의 정신감정을 받으러 정신병원에 통원치료를 할 것이다. 소중한 것을 잃고 난 다음이라야 그것이 정말로 소중했던 것임을 알 수 있듯이 그는 고개를 서너 번 저었다. 잃어버린 고대문명의 유물들이 자신 안에서 깨져 있었지만 후회보다는 살아있음으로 어금니를 굳게 물어 보였다. 그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 빛나는 눈동자가 그걸 말해주는 듯 했다. 가족이 있다는 것이 그에게 더욱 분명한 좌표를 손에 쥐는 듯 했으며 무엇이 소중한지 가슴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그 앞에 주어진 모든 현실을 수긍했다. 그는 그의 이름처럼 되고 싶었다. 독초가 팔을 스쳐 쓰라려도 정글을 헤쳐나가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두 아들이 학교를 간 늦은 아침의 창가에 햇살이 찬란하게 그의 얼굴을 덮고 있다. -끝-

 

 

2002년 월간 《광야》 신인문학상 「 집으로 돌아가는 새」소설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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