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 한길수 |
---|
물밥
한길수
어릴 때는 몰랐다
어머니는 반찬도 많은데
국그릇에 물 부어 물밥을
후루룩 마시듯 드셨는지
빈 그릇 내려놓고 천장 보며
한숨 쉬는 의미가 뭐였는지
고국을 떠나온 이민자에게
매일 열한 시간 일하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마는 날은
더워 땀 흘리며 흥정하다
흐트러트리고 간 옷가지와
손님 뒷모습 보며 불쑥
고개 내미는 스트레스에
말아 놓은 물밥을 떠올린다
저녁에 뭘 먹을지 고민될 때
남은 밥에 시원한 물 넣고
총각무 한 조각 깨물면
편한 어머니 얼굴 떠오르며
가슴에 사무친 그리움으로
감칠맛 나는 한 끼가 되었다
어릴 때는 몰랐다.
저녁을 물리신 아버지는
물밥이 소화되기 전에
드러누워 코를 고셨는지
잠속에서 홀 눈물 같은 것
강으로 쏟아내지 않았을까
기름진 음식이 즐비한 식단
허기를 느낄 새 없는 요즘
수저에 간장 찍어 먹어도
가슴 먹먹한 삶의 눈물 같은
그리움 휘저어놓은 물밥은
아름다운 추억의 양식이었음을
지구를 몇 바퀴 돌았을지 모를
꽃향기 바람 같은 시간은
머리에 꽃으로도 피어나는데
말도 안 되는 영어는 엉키고
이국에서 만 물밥에 목메는
두 딸 둔 아버지가 된 지금
물밥은 그냥 물밥이 아니고
슬픔을 이겨내는 희망이다
약력:
충북 청원 출생
현대인 평론/시와 시학 등단
전 미주문협 이사장 역임
현재:한국문협 회원 및 한국문협 미주지회 이사
저서:붉은 흉터가 있던 낙타의 생애처럼
궁남지*의 꽃
한 길 수
백제의 정원에 핀 연꽃
어느 혼령이 살아
꽃으로 환생했을지
한마디 말없이
발길 붙잡는 꽃
그대는 누구시오
천 년이 지나도록
여인의 속살 같은 자태에
이리 향기 그윽할 수 있을까
궁남지에 용신(龍神)도
혼백을 빼앗겨 무왕을 낳고
이제는
수천 조각의 연꽃잎들이
바람 앞에 몸 꼬며
수줍어 보이는 얼굴이다
천 년 전 나는
어느 하늘 아래 살았을지
백제의 궁남지 연못과
그리 멀지 않다면 찾아가
아득한 꿈결의 그곳에서
여인의 단소를 들으며
반나절만 딱 반나절만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백제 사비시대의 궁원지(宮苑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