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발발 초기 2년간의 전황보고서
국보 임진장초에는 없는 문건 12건 추가
1960년대 이후 분실됐다고 했다가 나타난 충무공 이순신 관련 유물 장계별책(狀啓別冊)은 책 자체에 쓰인 정식 이름이 충민공계초(忠愍公啓草)다.
우선 제목을 풀면 이 문서의 성격이 드러난다. 이는 충민공이 임금에게 올린 문서 중 하나인 계(啓)를 필사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초(草)는 축약했다는 초록이 아니라 원본 문서를 그대로 손으로 옮겨적었다는 뜻이다.
충민은 이순신이 죽고 난 뒤 그를 기리고자 건립된 사당 중 한 곳의 이름이다. 그의 사후 3년 뒤인 선조 34년(1601), 그의 공적과 충렬을 기리고자 지금의 전남 여수시 덕충동에 사당이 왕명으로 들어서는데 임금이 내린 이름이 바로 충민(忠愍)이다.
따라서 '충민공계초'란 이순신이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 묶음집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장계별책이란 무슨 뜻일까? 뒤에서 보게 될 국보 제76호 임진장초(壬辰狀草)라는 이순신 장계 문서집과는 구별되는 또 하나의 문서집이라는 뜻에서 편의상 붙인 명칭이다.
어떻든 1책 필사본인 이 충민공계초는 분량이 전체 73쪽이다. 내용을 보면 이순신이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일한 선조 25년(1592) 4월15일 이래 선조 27년(1594) 4월20일까지 작성해 국왕과 세자에게 올린 임진왜란 관련 전황 보고서들이다.
국왕에게 올리는 문서는 계(啓)라고 쓰고, 세자인 광해군에게 올린 보고서는 달(達)이라 해서 구분했다.
날짜별로 정리된 이런 보고서는 총 68건이다. 그 내용을 보면 왜적의 정세를 아뢰고 승전해 왜적을 물리친 장수와 군사에게 상벌을 내리기를 청하는 일 등을 담았다.
이런 전황 관련 보고서 외에도 이순신 사당인 충민사 관련 글 세 편이 추가됐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쓴 이순신 관련 추모글 2편과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이 쓴 충민사 관련 기록인 충민사기(忠愍祠記)가 그것이다.
충민공계초를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문서 끝에는 "강희 원년 임진년 3월 염일(念日)에 쓰기를 마치다'(康熙元年壬寅三月念日書終)라는 대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필사본은 현종 3년(1662) 3월20일 무렵에 완성됐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이면 이순신에 대한 추모 열기가 조정에서도 높을 때라 이런 분위기를 틈타 관청에 제출하기 위한 원고용으로 편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이순신의 이런 장계 묶음집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국보로 지정된 임진장초(壬辰狀草)가 있다. 임진란 당시 이순신이 국왕과 세자에게 올린 계문(啓文)과 달문(達文)을 역시 날짜별로 분류한 문서다. 초(草)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 역시 필사본이다.
지면 곳곳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인(全羅左道水軍節度使印)이라는 관인(官印)이 찍힌 것으로 보아 임진란 당시 전라좌수영 업무 현장에서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1책 필사본으로 이에서 정리한 문건은 총 61편이다. 문서 작성 시기로 보면 선조 20년(1592) 4월15일부터 이듬해 1월15일까지다.
최근에 알려진 충민공계초와는 문서 작성시기 상당 부분이 겹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임진장초와 비교할 때 충민공계초에는 12개 장계가 더 수록됐다. 그만큼 역사적 가치가 더 높다는 뜻이다.
예컨대 정조 때 편찬한 이충무공전서를 통해 내용만 전해지던 제2 당항포해전 관련 장계는 그 전문이 오직 충민공계초에 보일 뿐이다. 나아가 그간 글자 마멸 등으로 해독이 되지 않거나, 탈락된 임진란 관련 기록 또한 충민공계초를 통해 보완하게 된다.
난중일기 교감완역본을 펴낸 이순신 전문가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장계별책 뒤에 이 책이 국가기관 서고에서 천년의 보물이 되어라는 의미의 '군위각하천년보(君爲閣下千年珤)'라는 글자가 써 있다"며 "충무공 사후 그의 공로를 인정해 국기기관에서 쓴 책으로 보여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장계별책도 임진장초와 문화재청 관계자는 "장계별책도 임진장초와 더불어 국보로 지정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