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화가 최욱경

조회 수 238 추천 수 1 2026.02.18 15:54:38

   천재화가 최욱경(1940-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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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최욱경과 만났던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는 생생한 이야기들 간추려보면 불꽃의 신 그림 엄마 그리고 천진스러운 어린아이로 압축되는데 이 단어는 절대 추상을 추구했던 화가로서 더없이 자상했던 교육자로서 그리고 자유분방했던 독신 여성의 최욱경을 상징해 준다.

 

198511월 최욱경은 가까운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내 새끼들이 돌아온다면 들떠 있었다.

 미국에 있을 때 그려놓은 자신의 작품들을 그녀는 내 새끼들이라고 불렀는데 그 새끼들이 부산에 도착하기 바로 며칠 전 그는 레코드판을 올려놓은 채 그의. 화실에서 심장마비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토록 기다리면 보고 싶어 했던 미국 시절에 새끼들인 작품들도 이번 전시회와 함께 전시된다. 공원묘지 양지바른 곳에는 화가 최옥경의 묘, 그리고 출생 사망 일시를 알리는 음각 글씨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묘비를 세워 놓고 고인이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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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욱경은 1940년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항상 그림을 그렸다는 것 외에는 별다르게 떠오르는 것이 없다고 한 월간지마당 19821월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한순간도 화가 이외의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 중에 한 분이었던 아버지 최상윤 씨(19811월 별세) 출판사 교학 도서를 차려 그리 어렵지 않은 생활 속에서 자랄 수 있었다. 다락방에 올라가 맡았던 크레용 냄새를 그는 고향처럼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출판사를 하는 집 아니어서 늘 종이가 많았다. 온종일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다섯 살 때 그 여름 최욱경은 김기창 씨 화실에 가서 그림을 그렸고 이를 계기로 해서 이화여 중에 입학하는 것을 계기로 마음을 굳혔다.

 

서울예고에서 김창렬 문학진 정창섭 씨 등 알아주는 선생들 안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는 한국에서 받을 수 있는 미술교육의 최대한의 혜택을 받았다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린 3장 같은 작품은 노란색을 주제로 해서 당시로선 상당히 강력한 감동을 주셨다고 미술평론가 이경선 씨는 말한다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던 최욱경은 1959년 서울대 미대 입학 그림 공부에 몰두했다. 여성이 가질 수 없는 개성과 박력으로 이미 학생들 사이에서 눈에 띄었고 대상과의 끈질긴 싸움을 해내며 그것을 표현해냈다.서울대 시절 그의 아버지는 수석 하는 학생에게 남몰래 장학금을 대 주고 있었다. 공부에도 진지했던 국경이 수석 하자 나오리라 기대했던 장학금이 감감무소식 있었다. 그는 장학금을 담당하는 직원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따졌다. 학생 아버지가 지급하는 장학금인데 학생은 장학금을 꼭 받아야 할 형편이 아니잖아라는 말이 그 선생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아버지 부탁도 있고 해서 밝힐 수가 없었다. 선생은 수석 한 학생이 나가자 최상현 씨에게 사정 이야기를 전했다. 아버지는 그럼 줘야죠 하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때는 두 사람이 장학금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대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63년에 일이었다. 크랜브룩 미술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때 좌절감으로 다가온 문화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문학 시절 그림을 그리는 틈틈이 시를 써서 작은 돌들을, 낯선 얼굴들처럼 이라는 영문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낯선 얼굴들처럼은 1972년 국내에서도 출판되었다. 캐나다의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인적도 끊어진 도보엔 달빛만이 하얗고

나 홀로 여기 이렇게 유배되어

흐르는 피를 두 손을 모으고

 

향수라는 제목을 달아놓은 씨의 마지막 유학 시절 그의 심경을 잘 그리고 있다. 최욱경은 1965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으로 가서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눈물 흘리며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뉴욕에 머물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유학생들이 그러했듯이 아무리 집안이 좋다 하더라도 스스로 학비를 많은 미국 대학생들을 보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가족들이 보내 주는 돈으로 충당했지만, 뉴욕 시절부터 계속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학교식당 선물 가게 점원 포스터 찍는 일등을 쉴 틈 없이 했었다.

 

첫 정식 직장은 정신박약아 아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비정상적인 아이들로부터 원색적으로 표현되는 사람의 감정 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친척 중에서 저택을 가진 부분이 있었는데 안락한 집을 버리고 따로 떨어져 있는 닭장 같은 데서 겨울을 난 적이 있으셨다고 해요. 손수 톱을 들고 산에 가서 나무를 잘 나와 땔감을 만들고 캔버스를 만드셨어요. 작업만 하시다가 땔감이 떨어지면 다시 톱을 들고 산으로 가셨다고 해요.

 

제자가 들려주는 유학 시절 최옥경의 모습이다. 어느 평론가 지적했듯이 화가 최욱경은 자연에서 그림을 모든 것을 찾는 화가였다.

미국의 한 시골에 있을 때를 돌이키며 그는 이런 글을 적어 놓았다. 도시생활에서 아파트라는 콘크리트 상자 속에 갇혀 살던 나는 이곳에서 마치 내가 아파트에 심은 해바라기처럼 맘껏 숨을 쉬고 햇볕을 쬐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푸른 잔디를 맨발로 거닐고 싶어 석 달간 시골에 묵은 적도 있었다.

 

그는 19718월 일시 귀국했다가 19742월 도미 3년을 머물다가 19793월 대구에 있는 영남 대학 부교수로 귀국했다. 그는 78년 서울에서 뉴멕시코의 인상이라는 전시회를 서울 부산 대구에서 갖고 다시 미국으로 갔었는데 12년 동안 미국생활이 갑자기 텅 빈 공간으로 느껴졌고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는 귀국하면서 조그만한 그는 귀국하면서 조그만한 여자 대학을 원했었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교육에서 지금까지 숨겨놓은 재능을 찾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학창 시절 그는 여자답지 않게 대단하다는 주위에 평을 칭찬으로 받아들였으나 80년대 초에는 그는 여자 특유의 개성을 살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근본적으로 여자 많이 할 수 있는 예술세계 여자이기 때문에 느끼고 발생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란 신사조를 국내에 소개된 화가 최옥경은 주로 사용하는 강렬한 색채와 커다란 스케일 을 통해 절대조형을 확립한 대표적인 중견 여류 작가로 인정받았다. 서울예고 6년 후배이며 79년 이후부터 고인과 절친했던 화가 이두식 씨는 그의 화풍은 이렇게 설명해준다.

 

작품을 처음 대한 것은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였죠 일렉트릭 아트 였지요. 전기로 현란한 색채를 피어난 입체 작품이라는데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어요 그림을 볼 수 있었죠 강렬한 색감이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했습니다. 최욱경은 강렬한 색채를 주제로 한 형상성이 있는 추상을 추구했다. 그의 캠퍼스에는 새나 구름 산 꽃등의 형상이 나름대로 재해석을 통해 새롭게 구성된다.

 

대구영남대학교 교수로 있을 무렵 그는 거제도 학동에 깊은 애착이 있었다. 그의 작은 재미 시절 뉴멕시코에서 받았던 인상과 흡사해 더욱 기쁜 것이었다.

학생들과 격의 없이 만나면서 그냥 이렇게 틀어 놓은 적이 있었다. 난 동양화에 그려진 산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산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동양화 속에 그려진 것과 같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그는 한국의 산 자연에서 최욱경 추상표현주의에 완성을 내가 본 것이다. 한국적인 회화의 뜨거운 집착을 했던 그는 거제도 학동에다가 친구들과 돈을 모아 집 한 채를 사 들 정도였다. 그는 미래의 자신의 집에 달아 놓을 이름을 지어 놓고 있었다. 무무당 아마도 그 오는 거제도 학동에 작은 시골집에 쓰일 것인지도 몰랐다

 

영남대 재직 시절 교내에서 교수 전람회가 있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소품 위주로 출품할 만큼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그는 달랐다.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대작을 마련했다. 그러나 전시장 출입문이 작아 그림이 들어갈 수 없었다. 옆에서 일을 이들이 소품을 갖다 걸라고 권했지만,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판넬을 분해해 전시장에 갖고 들어가 시트를 짜맞춰 200호짜리 그림을 기여코 전시했다

 

영남대에서 같이 근무했던 박연도 교수는 당시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학과장을 맡고 있을 때입니다. 최욱경 씨가 대학교 4학년 5학년 후배여서 욱경 씨를 본 적이 있었죠. 열심히 강의했고 학생들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했습니다. 강의에 필요한 시설 자재 등을 요구하는 것이 많았었지요. 다 틀어 줬습니다.

 

박 교수는 최욱경과 함께 영남대 교수 아파트에 임시 거주했다. 청바지에 모자를 쓰고 작은 체구에 걸맞지 않게 큰 가방을 들고 다녔던 최욱경은 괴짜 교수로 알려졌다고 한다. 맨발로 사다리를 오르며 그림에 몰두하는 글을 본 사람들은 그에게 신기를 느끼기도 했다. 작업할 때는 하루고 이틀이고 화면에서 물러설 줄 몰랐다. 그림 그리는 일과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제외한 시간에는 친구들을 만났고 여행을 즐겨 했다. 그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은 매우 다양했다. 화가는 물론이고 사진작가 출판 사장 재즈 가수 정신과 의사 이민재 씨(삼신당 편집장)은 요즘도 책이 나오면 그의 무덤을 찾아가 책을 보여 준다고 한다.

 

이민자 씨는 최욱경 씨를 일러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정열적인 사람이었죠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모자를 쓰고 짧은 바지를 입고 작업하는 모습이 생생합니다. 활활 타는 사람이었죠. 친구들과 만나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줘요. 밖에서 보기엔 냉정해 보일지는 몰라도 정이 무척이나 많았던 분이지요.

 

불꽃의 화가였다. 자신의 에너지(에너지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를 총동원해 작품 하나와 대결하는 삶이었다. 그림을 떠나서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삶이었다. 작은 것에도 기뻐할 줄 알았고 발견하는 능력이 탁월한 호기심이 유난했던 작은 여자.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인이었다. 길을 걷다가도 깃털이나 하찮은 꽃들을 줍기 좋아했었다. 그 모든 대상이 모두 신기해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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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섬세한 사람을 세계와의 교감에서 그가 얻은 것은 조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지극한 갈구였다. 언젠가는 서로 바쁜 발걸음을 멈추고 미소하면서 닫힌 귀를 열고 서로 귀를 기울여 듣는다면 동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을 해봅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장정하고 편집한 시집 후기에 그렇게 적었다. 그러나 그는 절제할 줄도 아는 생활인이었다. 오직 그림에다 자신의 에너지를 폭발시킬 뿐 다른 이들과 약속시간까지 어김없이 지켰다. 규범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함을 오직 자신과 관련된 범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결코, 드러내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혹은 그에 수반되는 혼란들은 그 차이에 의한 것과 또 외부적인 것에 의해 한 것도 있다. 차이점은 그림 속에서처럼 냉정하게 골라내지 못했다는 점이 다 있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는 때도 종종 있다.

 

그는 친구들을 사랑했고 제자들을 사랑했고 그는 는 또 다른 차원에서 그림을 사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과 그림과 이 싸움에서 치열했다. 생전에 일기 형식의 메모를 많이 남겼던 그는 자신과 맞서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생각들을 적은 듯 필체는 상당히 속도감을 준다.

 

벽에 걸려있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미완성의 그림들 아직 태어나지조차 못한 생명들을 볼 때의 나의 좌절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할지 모를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볼 때 과연 내가 그림에 소질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 나는 나의 재능을 한 번도 확신하긴 한 적은 없다. 도대체 그 자체를 염두에 두고 걱정해 본 적도 없다. 그냥 열심히 믿고 추구했을 뿐이라고 적고 있다

 

그림은 자기 전부 에너지를 쏟아부어 추구한 것이다. 81년부터 그는 덕성여대 서양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가 제자들에게 쏟은 열정은 실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 한 번은 큰 가방을 질질 끌고 와서 학생들을 불러 모으고 가방을 펼쳐 보였다. 그거 쓰고 있는 것까지 갖가지 붓 들이었다. 큰 감동이었습니다. 아무리 제자를 사랑하는 교수더라도 화가 자신 쓰던 붓을 다 보여 주며 붓의 효과를 설명해 준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결정입니다.

 

며칠 전에도 스승의 무덤에 다녀와 잔디를 새로 입히겠다고 말하는 제자들 유도하, 장금란, 이진선 양은 개막전에 있을 퍼포먼스는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재학생은 물론이고 졸업생들까지 선생을 기리는 일인데 하면 온몸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화가로서 교수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책장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림 엄마라는 별칭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약력:

1950년대 김기창.박래현 부부와 김흥수 화백 등에서 그림을 배웠다. 196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추상표현주의를 학습했다.  

1973년 개인전에서는 단청의 색채와 민화적 모티브, 한지 재료들을 이용한 실험적 작품을 제작했다. 1980년대에는 한국의 산,

바다, 섬의 자연적 곡선에서 차용한 구불거리는 선과 밝은 색채가 결합한 추상화가 등장한다. 최경욱은 조지아 오키프의 양향을 바기화하여 특유의 여성적 색채 추상 세계를 구현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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