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명절 설이다. 쇼핑몰마다 설 선물세트가 가득 진열돼 있고,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설 연휴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저마다 양손에 선물세트를 들고 고향을 찾는 이들의 설렘은 고속도로 정체로도 억누를 수 없다. 명절 연휴를 맞은 사람들은 평소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을 전하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다. 우리는 1월1일(신정·新正)에도 똑같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왜 새해 명절을 두 번에 걸쳐 지내는 것일까.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고(故) 윤극영 선생이 1924년 일제강점기 때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을 안타까워해 만든 동요 《설날》이다. 동요에 등장하는 까치의 설날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내려온다. ‘어저께’로 등장하는 섣달그믐날을 과거에 ‘아치 설’로 불렀다는 해석이 정설로 여겨진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와 엮여 까치 설날이 나왔다는 해석도 있다. 최근에는 가설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엮어 동요를 해석하는 흐름도 있다. 양력 1월1일 신정을 설날로 쇠던 일제를 까치로 비유했고, 우리 민족의 설날인 음력 1월1일보다 앞선 시점이기 때문에 ‘어저께’라고 했다는 주장이다.
-지금은 자연스러운 음력설은 일제 식민지 시절 없어질 뻔한 위기를 겪었다. 1992년 설날 제사를 지내는 모습
100년 수난 견디고 민족 명절이 된 ‘구정’
이 같은 해석이 나온 이유는 설날이 안고 있는 수난의 역사 때문이다. 실제로 설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민족의 수난과 함께 부침(浮沈)을 겪은 역사를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 전통을 말살하려는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해방 이후에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설날은 1989년에 이르러서야 공식 명절 대접을 받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설도 불과 33년 전까지만 해도 공휴일이 아니었다.
음력설(구정·舊正)은 한때 역사 속에서 지워질 뻔했다. 설날이 폐지된 시점은 1896년 1월1일이다. 대한제국을 건립한 고종은 이날부터 태양력을 공식 역법으로 도입했다. 그렇다고 해서 음력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임금이 결정한다고 해서 수백 년간 지속돼 온 전통이 사라질 리 만무했다. 왕실조차도 음력설에 각종 행사를 지냈다. 양력 1월1일에 대해선 휴일로 지정했을 뿐 별다른 행사를 하지 않았다.
음력의 진짜 위기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친일 내각이 구성된 순종 시절부터 시작됐다. 1907년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친일파 이완용이 “국가는 이미 태양력을 준수해 쓰고 있는데, 음력 원단(새해 아침)과 동지에 의식은 이제부터 하지 않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순종은 이를 허락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모든 명절과 기념일을 양력으로 바꾸고, 완전하게 태양력을 시행해 왔다. 일제는 신정 때 학교에 10일가량의 방학을 주고, 관공서와 기업은 그날을 공식 휴일로 지정했다. 반면 구정에는 일부러 조업을 강요하고 학생들이 학교를 빠지지 못하게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오랫동안 지속된 민족의 풍습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자 일제는 1930년대 이후 구정 문화를 없애기 위해 더욱 강력한 조치에 나섰다. 이후에도 강제적으로 방앗간의 조업을 금지해 상차림에 필요한 떡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설빔을 해 입은 아이들에게 먹물을 뿌린 기록도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도 구정은 여전히 대접을 받지 못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4일 공휴일을 지정하면서 음력설을 빠뜨렸다. 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 등 국경일과 식목일·한글날·추석, 심지어 크리스마스까지 공휴일로 지정됐음에도 음력설만은 외면받은 셈이다. 대신 신정은 1월1일부터 3일까지 3일간 연휴로 정했다.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은 ‘민족의 수치’라고 표현할 정도로 음력설을 없애려는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 정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62년 경찰은 설을 앞두고 극장 광고물에 ‘구정 프로’라는 문구를 넣을 수 없도록 했고, 구정 때 임시열차의 증편 운행도 중지했다. 설을 앞둔 떡방앗간 조업 단속도 더욱 강화했다. 이 같은 기조는 전두환 신군부 초기까지 이어졌다.
-2010년 2월11일 울산시 남구 울산가족문화센터에서 다문화가족 주부들이 설맞이 민속 가족놀이로 윷놀이를 체험했다.
다시 부활한 설
전두환 신군부는 매년 국무회의에서 ‘음력설 공휴일 지정 여부’를 놓고 논의했지만 번번이 합의에 실패했다. 1984년 12월 민주정의당이 “내년부터 구정 하루 동안을 공휴일로 지정하여 국민적 여망을 수용해 나가기로 정부 측과 원칙적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발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결국 1월21일 대통령령이 개정돼 처음으로 음력설은 공휴일이 됐다. 다만 명칭은 ‘민속의 날’이었다.
‘민속의 날’이란 불분명한 이름으로 이어지던 음력설이 본래의 이름을 찾은 것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신군부가 무너진 뒤 1989년에 이르러서다. 1989년 2월 정부는 ‘민속의 날’의 명칭을 ‘설’로 바꾸고, 음력설과 추석을 3일 연휴로 하는 방향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했다. 공식적으로 정부가 ‘음력설’을 인정한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의 수난과 군사독재 정권을 지난 후에야 우리 민족은 전통을 지켜낼 수 있었다.
방송통신대학교 통합인문학연구소 이임하 학술연구교수는 저서 《문화로 읽는 한국 현대사》에서 음력설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른 것은 다 바뀌었는데 유독 음력설만큼은 고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 의례나 기념 투쟁은 하나의 역사적 상징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새해 새 출발을 하는 ‘설’만큼은 서민들의 뜻대로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