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구체적인 삶 속에 있다
-강태기 시집 <사랑은 죽지 않는다>
안 성 수(문학평론가)
시인 강태기는 자신의 시집 <사랑은 죽지 않는다>의 서문에서 한때 50살을 넘긴 사람을 보면 참 지겹게도 오래 산다고 터무니없이 경멸하던 때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이 이냥 저냥 살다 보니 50을 넘기고, 게다가 일궈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한다.
"한때는 사회를 위해 전쟁하듯 치열하게 살며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건만, 지금은 무명용사가 되어 초췌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실직을 하고 비절, 참절할 때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등불처럼 떠올랐다. 그들은 공을 들여 사랑했으나, 나는 그 빚을 갚지 못했다. 이는 죄악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화장실의 거울을 보며 별 볼 일 없는 사내에게 욕을 퍼부을 때가 있다."
이와 같은 자기 성찰과 반성으로 시작하는 이 시집은 시인 강태기가 50살이 넘는 평생 동안 발표한 시집들 중에서 좋은 시들만을 뽑아 모은 것이다. 비록 그가 깊은 반성으로 책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시 속에 반영된 그의 삶은 치열하고 아름답다.
특히 그의 시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시적 정서는 바로 '애정'이다. 아내와 어머니,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삶에 대한 애정이 그의 시에는 절절히 넘쳐흐른다. 그의 솔직한 정서 표현에 담긴 사랑은 뜨겁지는 않으나 은근한 아랫목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더욱더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을 담아낸다.
술 좀 묵지 말그라/ 어머니 계신 부산에 가면 제발 술 좀 그만 먹으라고/ 둘째 아들한테 늘 이렇게 빌 듯이 통사정하십니다/ 밤저녁, 홀로 쓸쓸하여 허여멀거니 텔레비전 보는데/ 부스스 방문 열리고 팔순의 우리 어머니/ 관절염과 함께 겨우 밤참 들여옵니다/ 그리고는 미어지도록 슬프고 그윽하게 바라봅니다/ - 밥 비볐다, 좀 묵으라, 재첩국이다/ 찬장문 여닫는 소리 들리고 다시 방문이 열립니다/ - 술 좀 그만 묵으라, 제발!/ 그러면서 어머니는 치마폭 감춰온 소주 한 병 주십니다
- 시 <어머니>
어머니의 관절염과 함께 들여오는 밤참, 술 좀 그만 먹으라고 하면서도 치마폭에 소주 한 병을 감춰 오시는 마음. 이게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시인은 잔잔한 어조로 어머니를 묘사하면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애틋한 마음을 시적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다.
아내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애정과 부끄러움이다.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 오랜 기간을 함께 하면서 정들어 버린 세월, 그리고 그 오랜 세월 속에 얻어진 보배와 같은 사랑.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부부란 바로 이런 모습으로 늙어 가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명동에 나가면 예쁘지도 않은 마누라 떠오른다/ 어느 천 년에 돈 벌어 저렇게 좋은 옷 한 벌 입혀 보겠느냐/ 쇼윈도에 비친 검은 얼굴의 사내/ 그 남자의 아내로 파뿌리 되었다/ 151번 버스 타고 집에 간다/ 그러나 헛되이 끝나지는 않으리/ 젊은 애들이 파는 군고구마 한 봉지 사서/ 이거 건네주면 참 좋겠다 하여/ 잰걸음으로 집을 향하면 불현듯 아내가 보고 싶다/ 따끈한 봉지의 감촉, 옛날에도 그러했거니와 지금도 생각한다// ...달이 떴다, 부끄럽게
- 시 <부끄러운 달>
부부는 악연으로 만나 서로 피 마르게 갉아먹다가 마감한다고 그가 설명했다./ 아내 때문에 속상해 쓰러질 뻔한 날이 많았다./ 저번에 다림질하던 아내가 말했다, 나직이./ - 나 죽으면 가슴 열어봐. 시커먼 숯등걸만 가득할 거야.
- 시 <인연>
시인이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는 아내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잊혀 버린 옛사랑에 대한 회상도 포함되어 있다. 그 회상은 과거의 아름다웠던 청춘에 대한 기억이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사랑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며 살아간다. 시인 또한 그러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한 남자이다.
그렇다면 연병장 주변으로/ 우리가 꺾꽂이했던 미루나무는 얼마나 자랐을까.// 세월의 더께가 앉은 중늙은이들이지만/ 첫눈에도 알아볼 만치 나는 그대로였을까./ M1소총이 사라지고 그녀가 휴대하던 카빈소총도 없어졌다./ (그밖에 소멸된 것으로는 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이제는 청춘이 될 수는 없지만 50대에서 만난 20대 남녀.// 팔랑팔랑 구보도 잘하던 여군 하사 윤명옥
- 시 <윤명옥> 중에서
이처럼 과거에 대한 애틋한 기억 한 조각쯤은 누구나 갖고 있는 감정일 것이다. 시집의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시 또한 이와 같은 애절함이 담겨 있다. 단 두 줄로 구성된 시이지만 그 속에 담긴 시적 의미는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기다려다오.
아직도 변함없이 날 사랑한다고 말해다오.
- 시 <무명용사(9) - 이 땅 위에는 없는 묘비명>
누군가에 대한 애정과 함께 시집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부끄러움이다. <무명용사> 연작 시리즈는 시인이 겪었던 삶의 여파를 여실히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월급쟁이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과 극심한 심리적 압박감. 이러한 심리는 많은 직장인들이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머슴처럼 땀 흘려 일해 받는 새경 아니다.
봉급쟁이는 피 말리는 스트레스의 대가로 월급 받는다.
(중략)
한때는 청운의 꿈 위에 고상하고 아름다운 인생 펼치리라 다짐했어도
월급쟁이가 되면 그렇지 아니하다.
몸 파는 계집보다 더한 중압감으로 날마다 삭아가고 스러지나니
대관령 덕장의 황태만 말라 가더냐,
나는 오늘도 심신이 내 걸린 채 건조되어 간다.
얼마나 더 꺼칠하고 딱딱하게 말라야 하는가.
자존심 긁힐 때마다 먼 바다로 떠나고 싶다.
사람으로 살지만 우리는 인간이 아닐 때도 있다.
- 시 <무명용사(5) - 스트레스의 바다> 중에서
문학평론가 안성수 씨는 이 시집에 대한 평론에서 "그의 시는 관념의 시나 형이상학의 시가 아니다. 그가 캐는 시의 광맥은 구체적인 생활 속에 있다"고 평가한다. 그리고는 인간이 찾고자 하는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처럼 우리의 생활 속에 숨어 있다고 전한다.
그의 말처럼 삶의 진리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공기처럼 녹아 있는 것이다. 굳이 멀리서 진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일상의 한 조각 한 조각 경험을 통해 한 발짝 진리의 세계에 다가서 보자. 그 현명한 혜안(慧眼)을 통해 세상은 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될 것이다.
약력:
경남 하동 (1950년 5월~2012년 3월). 부산공업고등학교 자동차과를 졸업.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중퇴. 1969년 제13회 학원문학상 시부문 수상. 1971년에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 1981년에는 삼성문예상 수상. 저서: 시집 <사랑은 죽지 않는다> 동화집 <누워서 듣는 아빠의 이야기>, <아프면서 크는 나무>, 장편소설로는 <마음이 아픈 사람은 인도로 가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