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여행자의 눈으로 일상 속 자신을 찾다
이택화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시인)
1. 시간 여행자의 확장된 눈으로 보다
시간(時間, Time)은 과거의 역사와 찰나보다 빠른 현재의 상황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시간이 우주와 사람에게 그림과 글자를 새긴다. 시간 여행자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간 여행자의 눈은 현재만 볼 수 있는 눈과 달라서 자유로이 시간 속의 영상을 펼쳐 낸다.
사람들은 시간 여행자의 눈을 가지고 있어서 다채로운 영상물을 시간 속에서 꺼내 상영할 수 있다. 빅뱅 우주론에 의하면 우주의 나이는 137.99억 년이다. 우주는 별들로 구성되어 있고, 지구는 우주의 별 중 하나이다. 사람은 생사를 반복한 별의 성분으로 만들어졌으니, 우주의 시간이 담긴 영상물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기억과 자유로운 상상력은 우주의 시간이 기반이라서 넓고 풍부하다.
시간은 고대 바빌론과 이집트에서 태양과 달의 움직인 거리를 측정해 시간을 표현한 이래 오랫동안 인간의 관심을 받았다. 그리스 천문학자인 히파르코스(Hipparchos, 기원전 190? ∽ 120?)는 하루를 24시간으로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네덜란드 천문학자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 1629.04.14. ∽ 1695.07.08.)는 1초 단위까지 측정할 수 있는 진자시계(振子時計)를 발명해 인류가 정확한 시간을 볼 수 있도록 공헌했다. 이러한 시계를 보는 인간은 시간 속을 공전하며 살아간다. 시간의 흐름은 시 속에 항상 내재해 있기 때문에 작가나 독자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시인 안호는 시간의 흐름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통찰해 시를 창작하고 있다.
시인은 시간 여행자의 확장된 눈으로 과거·현재·미래를 넘나들며, 시의 소재와 제재를 엮어 『안호의 시간 여행』을 출간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독일 태생의 이론 물리학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03.14. ∼ 1955.04.18.)의 상대성 이론으로 시간의 흐름이 관성계에 따라 상대적인 물리량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간은 우주의 원리를 내재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복잡한 물리학을 알지 못해도 시간의 흐름이 상대적임을 직시한다. 사람은 즐거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지루한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는 경험을 많이 한다. 이럴 때마다 그는 시계에 의존하는 시간의 흐름을 계량적으로는 이해하면서도 심리적으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안호는 사람에게 절대적 시간의 수량보다 상대적 시간의 질량이 삶에 있어서 중요함을 인식하고, 이를 시로 풀어 예술미를 형상화하고 있다.
나른한 오후를 휘젓는 시간
바다에 왔다고 다 파도를 볼까
미역 냄새라도 풍기는 사람
가슴 속 찌그러진 사연 하나쯤 품은 사람만
저 바다를 만난다
서해안 안면도 동쪽 해안가
또 하나의 섬으로 태어난 나문재 펜션
수채화 번지듯 아침해가 떠오르면
두 손 들고 새벽어둠이 달아난다
기지개 켜며 다가오는 살아있는 풍경들
동화 속의 아름다운 정원이 이쯤은 될까
꿈꾼다고 다 이루어질까
혼신으로 이곳을 만든 한 사람
밤새도록 많은 비를 맞았으리라
가슴속 뜨거운 피가 솟구쳐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천혜의 정원
나문재 펜션이 태어났으리라
이제는 가야 할 세월 잠시 잊어버리고
지나간 시간 앞에 묻는다
잃어버린 시간은
그 빈틈의 길목 어디쯤에 있는가를
- 「나문재 펜션」 전문
「나문재 펜션」은 ‘서해안 안면도 동쪽 해안가’의 ‘동화 속의 아름다운 정원’이면서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천혜의 정원’이다. 시적 화자는 ‘나문재 펜션’에서 ‘나른한 오후를 휘젓는 시간’에 ‘미역 냄새’를 풍기며, ‘가슴 속 찌그러진 사연 하나쯤 품은 사람’으로 ‘파도를’ 보고 ‘바다를 만난다’. 또한 그는 ‘수채화 번지듯 아침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두 손 들고 새벽어둠이 달아’나자 ‘기지개 켜며 다가오는 살아있는 풍경들’을 감상한다. 그리고 화자는 ‘가슴속 뜨거운 피가 솟구’치는 ‘꿈’인 ‘나문재 펜션’을 만들기 위해 ‘혼신으로 이곳을 만든 한 사람’의 노고를 칭찬한다. 끝으로 그는 ‘지나간 시간 앞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본다.
1연에서는 오후에 바다를 보는 현재, 2연에서는 새벽에 ‘나문재 펜션’에서 풍경들을 보는 현재, 3연에서는 ‘나문재 펜션’을 만든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과거, 4연에서는 자신을 찾아보는 생각으로 과거·현재·미래의 시제가 나타난다. 특히, 4연에서 ‘이제는 가야 할 세월’이라는 미래, 묻고 있는 현재, ‘지나간 시간’이나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과거를 하나의 연에 엮어 내고 있다. 이러한 시간성은 시간의 흐름이 보여주는 정지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아름다움을 중첩하여 보여준다.
사람의 시간은 정지성과 연속성을 지닌다. 사물을 사진처럼 한 장씩 정지한 모습으로 인식할 때는 정지미를 드러내고, 이러한 사진들이 연속인 동작으로 인식할 때는 연속미를 드러낸다. 사람은 눈으로 사물의 형태와 움직임을 받아들여 무한한 모습으로 뇌에서 재생해 정지미와 연속미로 구성한 형형한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여행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안호 시인은 ‘나문재 펜션’을 사진 같은 정지미로 구현하기도 하고, 영상물 같은 연속미로 구현해 독자가 그곳에서 동행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독자는 ‘나문재 펜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숭고미도 느끼고, 휴양을 하며 우아미도 느끼고,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아쉬워하며 비장미도 느낀다.
「강가」의 ‘이미 사랑은 / 바다로만 향하고 있는데 / 무게를 더해가는 기억 / 설사 꽃이라 해도 / 몸에서 향기만 날 수 있으랴?’에서도 과거·현재·미래 시제가 드러난다. ‘이미 사랑은 / 바다로만 향하고 있는데’에서는 미래, ‘무게를 더해가는 기억’에서는 과거, ‘설사 꽃이라 해도 / 몸에서 향기만 날 수 있으랴?’에서는 현재의 의미가 들어 있다. 시의 내용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성이 드러나는 시로는 「경건한 꽃」, 「다시 차오르는 것이 있을까」, 「소화기」, 「소화기의 꿈」, 「종로5가쯤 오면」, 「종점」, 「침묵이 큰소리치는 이유」, 「가을 애상」, 「12월에 서서」, 「5호선 막차」 등이 있다. 시인은 한 편의 시에 과거·현재·미래 시제를 사용해 시야를 확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기법은 독자의 시야를 확대해 감상의 폭을 넓게 만든다.
2. 일상 속 시간 여행으로 삶의 의미를 찾다
(1) 만남과 관계의 확장으로 일상을 벗어나다
일상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로 시간과 공간의 동일 패턴이 형성되어 있다. 일상의 반복성과 동일성은 안정을 주는 대신 새로움과 즐거움이 적다. 일상은 틀로 굳어져 나아가지 못하는 벽이 된다. 벽에 갇힌 생활은 지루하고 고단하다. 이러한 생활에 활력소가 되는 것이 여행이다.
여행은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을 의미한다. 안호의 시는 일이나 유람을 위해 색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나가 체험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기보다는 일상이나 일상에 가까운 상태에서 시간 여행을 한 내용이 중심이 되고 있다. 시인은 평범한 일상에서 시간 여행을 떠난 화자를 통해 만남과 관계를 확장해 시야를 넓히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시적 화자는 시간의 통로를 오가면서 일상의 벽을 부수고, 인생의 여정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여행이 한 사람의 인생이다. 인생은 여행 과정의 총합이다. 사람의 여정(旅程)은 중간에 멈출 수 없다. 인생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는다. 안호는 이러한 사람의 특징을 시로 구현하여 시간의 구체성을 밝혀주고 있다.
언제나
가장 익숙한 단어는
허기보다 취함이었다
가슴 한가운데
우그러진 양재기 하나쯤 품은 사람들
어둠이 내린다
그리고
가을 서리 같은 술시
낮이 밤보다 밝다는 것
진실 아니다
어두울수록 더 선명해지는데
잊기 위해 술 마신다는 것
또한 진실 아니다
멀어질수록 얼굴이 가까이 오는데
오늘 역시 내 것 아니다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낯선 전화번호처럼
저장되어가고 있을 뿐
어둠조차 반겨주지 않는
일그러진 조각달
각진 턱밑으로 다가오는 하얀 물여울
텁텁하게 경계되어진 공간
가라앉은 자나 떠있는 자나
서로를 기억조차 않는다
구별이란 그런 것
섞이는 것과 합치는 것이 다르듯
떠나지 못한 상처를 어루만지는
목쉬며 부르짖는 건배 같은 것
가슴은 주먹이 묻고
배는 손바닥에 답하며
버릇처럼 흔들어대는 생각
이제는 누군가 나를 부순다
앞뒤로 흔들면 그네가 될 수 있을까?
길 떠나면 나그네라 할 수 있을까?
심장은 뛰니 살아 있다 말해도 되나?
가라앉거나
떠오르거나
순장되는 꿈속일 뿐
흔들고 흔들리며 만나는
또 하나의 여로
- 「막걸리를 흔들며」 전문
안호 시인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한다. 시인에게 있어 술은 사람 관계의 접점이고 확인이며 수용이다. 「막걸리를 흔들며」는 많은 술자리에서 시인이 경험한 사색의 농축이 드러나는 시이다. 이 시에는 ‘흔들고 흔들리며 만나는’ 인생의 여정이 담겨 있다.
‘가슴 한가운데 / 우그러진 양재기 하나쯤 품은 사람들’이 ‘어둠이 내’리는 ‘가을 서리 같은 술시’에 ‘서로를 기억조차 않’을 술자리를 하고 있다. 그들은 ‘허기보다 취함’을 위해 술을 마시고, ‘텁텁하게 경계되어진 공간’을 흔들어 정해진 틀을 부순다. 여기에서는 ‘낮이 밤보다 밝다는 것’도 ‘진실이 아니’어서 ‘어두울수록 더 선명해지’고, ‘잊기 위해 술 마신다는 것 / 또한 진실이 아니’어서 ‘멀어질수록 얼굴이 가까이’ 온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의 시점을 넘나드는 ‘버릇처럼 흔들어대는 생각’의 열차를 타고 시간을 여행하며 일상 밖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려냈다.
「관계」에서는 ‘나뭇잎조차 다 사라진 공간 / 그 사이로 별들이 뜨고 있는데 / 시골 뒷마당 쌓인 땔감 나무 / 기다림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지’라는 문장을 통해 기다리는 상황을 연출한 후 일상의 통념을 시간으로 뒤집어 확장한다. 이 시는 만남과 헤어짐이 하나이고,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만나는 중이라 했고, 헤어지는 중이라 했지 / 살아가는 과정이라 했고 /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했지’라는 시간성이 드러나는 시구로 표현하고 있다. 기다림이 있는 곳에서는 ‘잊혀버린 계절마저 / 차질 없이 오고 / 어김없이 가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시간의 순환성이 드러나면서 멈추어진 시간에서 흐르는 시간을 인식하게 한다.
일상의 모습에서 만남을 연장하고 관계를 확대하는 시로는 「낙조」, 「경건한 꽃」, 「운중로 벚꽃이 필 때」, 「홍시」, 「자명종 사랑」, 「입동」, 「안부」, 「바람이라는 이유로」, 「첫눈」, 「세월 저편으로」, 「명함」, 「내비게이션」, 「다시 차오르는 것이 있을까」 등이 있다. 안호 시인은 이러한 시들을 통해 짊어진 일상의 무게를 가볍게 하면서, 삶의 진솔한 가치가 일상에 있음을 시간 요소를 가미해 알려준다. 영화 『매트릭스(MATRIX)』(1999년)에서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걷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모피어스의 명대사가 있다. 이 시들은 독자에게 이 명언을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일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2) 치유의 여정을 통해 자유를 얻다
인간의 몸은 시공간에 매여 있다.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어서 몸을 편하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사람이 몸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하루하루의 궤적을 돌다 보면, 피로가 쌓인다. 사람은 피로를 풀기 위해 일상의 탈출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의 묶은 껍질을 벗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일과 사람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들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다.
인간의 정신은 신의 축복과 진화의 능력으로 시공간에 매여 있지 않으므로 언제나 자유롭게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시간 여행은 마음의 긴장을 풀리게 하고, 마음을 정화해 평정심을 찾게 한다. 이럴 때 사람은 상처가 치유되면서 자유의 날개가 돋아 활기를 얻는다.
안호의 시 속에 등장하는 시간 여행자는 기억과 상상력으로 생을 푸르게 만들려는 의지를 보인다. 일상의 반복이 황량한 겨울 벌판처럼 확실한 수확을 얻지 못하고 빈손만 주어질지라도 그는 희망의 싹을 놓지는 않는다. 시인은 현재의 답답한 땅에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상상력으로 채운 희망의 씨앗을 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는 시인이 어떠한 악천후에서도 인간의 사랑과 진실은 무너질 수 없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해갈 비가 쏟아진 저녁
목발을 던져버린
청계천을 본다
흘러가는 것에 대해
모자를 벗어 본 적이 있던가
오늘은
모자를 벗는 경건함으로
신발이라도 벗고
당당히 흘러가는 것들과
한없이 입맞춤하고 싶다
강가에서
얼굴 마주 보려면
누군가는 풍덩 물속에
몸을 담가야 한다며
물빛으로 다가오는 미소
수많은 마주침 속에
눈과 눈은 별로 빛나고
흘러가고 흘러오는 물 위
별빛조차 박수로 튕겨 나가는데
흐르는 물이라도
말과 말의 흔적이 자꾸 쌓이면
여름 화석이라도 되겠지
다 씻지 못한 시심
아직도 발 담그며
주름진 물결 오선지 위에
노래 몇 자락 던져두고
캔맥주 눈물로 건배하는 밤
- 「청계천의 밤」 전문
「청계천의 밤」에서 시적 화자는 목마름을 해소할 ‘비가 쏟아진 저녁’에 싱그럽게 살아난 ‘청계천’을 보면서 자신도 시심을 회복한다. 그는 ‘흘러가는 것에 대해 / 모자를 벗어 본 적이 있던가’를 회고하면서, ‘오늘은 / 모자를 벗는 경건함으로 / 신발이라도 벗고 / 당당히 흘러가는 것들과 / 한없이 입맞춤하고 싶’어 한다. 그가 ‘경건’함을 갖추고 ‘당당’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생활의 고달픔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시인의 대변자로 ‘말과 말의 흔적을 자꾸 쌓’아 ‘여름 화석’ 같은 시를 쓸 힘을 얻는다. 비로소 그는 일상으로부터 놓여나 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성스러운 ‘눈물’로 시를 위한 ‘건배’를 할 수 있게 된다. ‘청계천’은 ‘흘러가는 것’에 대한 시간 여행의 중심지로 치유의 마력을 지닌 채 화자를 자유롭게 만드는 시공간이다.
「소화기」의 ‘어쩌면 그래도 / 유효 기간이 있다는 것 / 참 좋은 것이다’, 「당구공 에피소드」의 ‘어쩌면 너를 만난 것 / 너를 만나게 해 준 것 / 심지어 너를 만나지 못한 것까지 / 감사요 축복이며 기적이다’, ‘때론 / 날카로운 모서리에 치명상을 당해도 / 날 존재하게 밀어주는 힘을 / 기억하고 또 사랑했다가 / 자신 있게 살아가 주는 것 / 삶이란 늘 승부하기에 신기하다’, 「뷔페」의 ‘죽은 적 없는 자가 부활하는 공간이다’, 「소금」의 ‘쨍쨍한 햇빛에 말라 / 한 방울의 눈물까지 비틀려 갈 때 / 바스락거리는 하얀 영혼 // 가슴 밑바닥 쌓이고 쌓여 / 쌀이 되고 피가 되는 화석 무더기’, 「과메기」의 ‘푸른 눈으로 마주하는 / 위안의 술잔’, 「가을 애상」에서 ‘지나온 세월 흔적은 / 아름다운 흉터라 하자 / 가야 할 언 땅마저 / 다음 날을 위한 평평한 길이 되니’, 「종점」의 ‘누구도 / 견디지 못하는 기억이란 없다 // 다시 낙엽이 / 되어 돌아가는 계절의 발끝 / 봄을 위해 놓아준 / 손마디를 기억하라고’, 「종로5가쯤 오면」의 ‘오늘 밤 종로5가는 / 채 지나지 않은 달력을 뜯어내며 / 먼 길 재촉하는 사랑을 배웅한다’ 등에서 치유의 힘이나 내재한 자유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시구를 통해 안호 시인의 시간성 인식과 이를 활용하는 창의력을 엿볼 수 있다. 유사성을 지닌 작품으로는 「는개」, 「들풀」, 「빈 깡통」, 「사금파리 시인의 꿈」, 「선거 날에」, 「신경통 사랑」, 「정답이 없다」 등이 있다. 위의 시를 통해 우리는 일상에서 시간 여행이 주는 건강한 힘을 느낄 수 있다.
3. 시간 여행을 통해 자신을 찾다
인생은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몸을 구성하는 물질의 세계도 무한하고, 정신을 이끌어가는 사고의 세계도 무한하다. 이렇게 무한한 세계 속에 던져졌으니, 자신 하나를 찾아내기에 100년은 부족하다. 하물며 함께 연결된 세계를 이해해 자신의 지도를 모두 해독하려면, 우주의 나이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한 세계를 확실히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02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내역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피에르 아고스티니, 페렌츠 크라우스, 안 륄리에는 ‘물질의 전자역학 연구를 위한 아토초, 즉 100경분의 1초의 펄스광을 생성하는 실험 방법’과 관련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빛으로 시간 썰어낸 트리오’란 별칭을 받고 있는 그들은 ‘원자 내부에 있는 전자의 움직임을 잡아낼 정도로 파장이 짧은 찰나의 빛을 만들어 내는 새 실험 방법을 고안해 냈다.’ 전자 세계를 관찰하려면, 100경분의 1초 단위로 사건의 변화 과정을 관측하거나 측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그들이 해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연구가 아직도 진행 중이니 그 끝을 어찌 안다고 장담하겠는가.
과학자처럼 시인은 자신에 대한 정답을 찾지 못한다 해도 자신에의 여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시마다 인생의 철학을 풀어 인생길마다 꽃처럼 피어난 자신의 열매로 자기를 표현한다. 안호 시인은 색다르게 시간 여행이라는 자신만의 경험을 시에 스미고 녹이면서 자신 속으로 나아간다.
그동안 어떤 꿈들을 꾸었을까
수없이 많은 꿈을 꾸다가
그 꿈들이 뒤섞여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
한쪽 귀퉁이에서 홀로
무채색의 꿈이라도 품었을 것이다
살아온 발자취에 흔적은 없고
잠자코만 있어도
혈관은 굳어져 간다
정기적인 검사를 받지 않으면
살아있다 할 수 없는 몸
오늘도
부족한 체액을 수혈한 후에
합격필증이라는 증표 하나 받았다
이렇게 기다림으로 사는 것이
맞기는 한 건가
나의 존재 이유는 불과 싸우는 것
어느 날 활활 타는 화마에게
온몸을 내던져 박수 받으며 사라지고 싶다
마지못한 연명 치료나 하면서
어느 날 결국 폐기되어 사라져 가면
과연 잘 살아왔다 할 수 있을까
자꾸만 다른 질문이 밀고 들어오는
소외된 모퉁이에서
나의 꿈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 「소화기의 꿈」 전문
「소화기의 꿈」에서는 인간의 이어지는 꿈의 알갱이를 이해할 수 있다. 소화기 안의 분말처럼 인간도 꿈의 알갱이들을 품고 태어난다. 세파가 꿈을 흔들어 상황에 따른 꿈의 변형이 있을 뿐 꿈은 죽는 날까지 새로운 가지를 뻗어나간다. 사람은 꿈을 지우고, 새로 꿈을 세우며 산다. 그래서 꿈은 자아를 이해하는 척도이며 증표이다.
이 시 안에서 드러나는 과거, 현재, 미래로의 여행은 꿈의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어떤 꿈들을 꾸었을까’, ‘수없이 많은 꿈을 꾸다’, ‘무채색의 꿈이라도 품었을 것이다’는 과거 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잠자코만 있어도 / 혈관은 굳어져 간다’, ‘오늘도 / 부족한 체액을 수혈한 후에 / 합격필증이라는 증표 하나 받았다’, ‘이렇게 기다림으로 사는 것이 / 맞기는 한 건가’는 현재의 꿈을 실현하며 일어나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어느 날 활활 타는 화마에게 / 온몸을 내던져 박수 받으며 사라지고 싶다’는 미래의 꿈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간 여행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안호는 ‘나의 존재 이유는 불과 싸우는 것 / 어느 날 활활 타는 화마에게 / 온몸을 내던져 박수 받으며 사라지고 싶’은 꿈을 「소화기의 꿈」에서 펼쳐낸다. 시인은 ‘마지못해 연명 치료나 하면서 / 어느 날 결국 폐기되어 사라져 가면 / 과연 잘 살아왔다 할 수’ 없기에 꿈을 꾼다. 그는 ‘자꾸만 다른 질문이 밀고 들어오는 / 소외된 모퉁이에서 / 나의 꿈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하며 꿈을 조각한다. ‘수없이 많은 꿈을 꾸다가 / 그 꿈들이 뒤섞여 /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 / 한쪽 귀퉁이에서 홀로 / 무채색의 꿈이라도 품었을’ 시인이 이제는 여생 동안 시를 품고 활활 타오르기를 바란다.
「몽매」의 ‘만족을 모르던 서툰 욕심 / 서둘러 지워버린 전화번호 / 이리저리 눌러보는 멍한 손끝 / 꽃도 바람도 흔적 지워진 / 꿈 조각이 흩날리고 있다.’, 「순천만 갈대처럼」의 ‘하나하나 모여 광장이 되고 / 한 덩어리 빛이 되어 / 저렇게 일어서는 무릎을 보았다’, 「거울에 답하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당신 / 대체, 너는 누구냐?’, 「낮달」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닌 / 말하지 않는다고 잊은 것이 아닌 / 우리 반쪽을 나눈 영혼’, 「루스벨트 대통령마저 싫다」의 ‘팽팽하게 당겨진 / 화살촉 하나가 / 노곤하게 풀어진 내 안을 / 겨누고 있다’, 「그런 날」의 ‘스러져 / 한 줌 불꽃으로 탈 때 / 한번은 / 뜨거운 가슴 있었구나’, 「5호선 막차」의 ‘하루라는 주문서에 / 바를 정(正)자를 자꾸자꾸 더하던 날’ 등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는 시인의 의도가 검출된다.
위와 유사한 작품으로는 「어둠 속의 염치」, 「누구나 책상은 눈물로 닦는다」, 「벽」, 「나문재 펜션」, 「강가」, 「침묵이 큰소리치는 이유」, 「12월에 서서」가 있다. 안호 시인의 힘차고 섬세한 표현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스미고 번져 세상 여러 곳에서 꽃등처럼 그의 꿈들이 향기를 품고 하늘가로 퍼질 날이 오리라 믿는다. 시인이 충실하게 뻗어나가는 시간 여행이 생의 기회가 되어, 문학계에서 축포가 터지고 환호성이 들리는 소식을 기대한다.
교육학석사(고려대), 정책학석사(고려대), 문학박사(충북대).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 1년 수료.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석사과정 수료. 충북대, 충북과학대 출강 역임. 중등교사 33년 역임. 새한국문학회 운영위원장 역임. 한국미래예술총연합회장, 미래시학작가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 펜클럽 회원. 출판사 <아름다운 만남> 대표. 미래시학대상, 새한국문학상, 탐미문학상, 포장, 국무총리상(봉사 부문) 등 저서: 시집 6권, 소설집 2권, 수필집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