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 시인(2)

조회 수 316 추천 수 1 2026.02.01 09:39:45

        우리나라 최연소 등단 시인이형기(2)

 

                                                                               강희근(경상대 교수)

 

   조연현은 먼저 문덕수를 부르고 그다음 최원을 불러 정관 개정은 평화스러운 문단을 표로써 좌우하는 좋지 못한 풍토를 조성할 수 있으므로 이를 원상대로 회복시키라고 지시했다. 문덕수는 어쩔 수 없이 조연현의 말에 따라 총회를 다시 소집하려고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이형기와 문덕수는 견해를 달리하는 편에 서고 말았다. 총회가 다시 소집되지는 않았고 다음 총회에서 이형기 등이 밀었던 김동리가 직선 이사장이 되었다.

  나중에 있었던 일이지만 직선(直選)은 직선의 논리에 따라 동료를 떼어놓고 우정을 짓밟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김동리 이사장이 임기를 마쳤지만, 중임하고자 했을 때 이번에는 조연현의 도전을 받았다. 김동리와 조연현이 어떤 사이인가. 광복 이후 난마와 같이 얽혀 있던 문단에서 청년문학가협회를 같이 만들고 우익 진영의 향도로서 이와 잇몸과 같은 관계로 이론을 개발하면서 최전선의 동지로 살았던 것이다. 어느새 이들은 한국문단의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지만, 선거로 맞서는 서로서로 표로써 제압해야 하는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문단은 순식간에 김동리파와 조연현파로 나뉘었다. 이때부터 필자도 한 표를 행사하는 문인협회회원으로서 따질 것도 없이 조연현 지지의 쪽에 서게 되었다. 대학의 은사이자 문단의 초년병을 [현대문학]에 무시로 발표케 해 주시는 든든한 후견인 조연현 선생이 아  니던가. 이때 이형기는 적어도 조연현 편은 아니었다. 뭔가 조연현과 서먹한 거리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자리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선거는 사람을 이렇게 어정쩡하게 하거나 서로 얼굴 쳐다보기 민망한 관계로 만들어놓는 것이었다. 당시 김동리 지지자    들은 노대가나 중진들 쪽에서 많았고 조연현 지지자들은 응집력이 강한 젊은 작가들 쪽에서 더 많았다.

  일차 투표에서 득표수가 백중하게 나왔다. 단상에서 단하에서 조연현은 이 시간 담배 다섯 갑을 내리 태웠다는 것 아닌가. 2차 투표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노쇠한 중진들은 다 집으로 갔고 젊은 작가들은 조연현을 외치며 똘똘 뭉쳐서 유감없이 투표했다. 어쩌다 필자 옆에 있던 소설가 이문구(당시 김동리 이사장 아래 '월간문학'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강형, 내 모가지 떼러 왔지?"하는 것이었다.

그즈음 이 이문구가 하동 옥종에서 청운의 뜻을 품고 단신 상경을 해 월간문학 주변을 맴도는 정규화를 보고 "형씨는 어디서 왔소?" 물었고, 정규화는 하동에서 온 촌놈입니다 했을 때 "시는 진주에 있는 강희근이한테 배우면 되지, 상경은 무슨 상경"했다는 말을 후에 진주에 온 정규화가 필자에게 일러준 일이 있었다.

  투표 결과는 조연현의 득표수가 게임도 되지 않게 앞서 버렸다. 젊은 작가들은 적어도 문인협회가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다 높은 수월성을 가지게 될 것이란 믿음으로 환호했다. 조연현은 당선의 말에서 문인들의 친목과 역량제고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했다. 뒷풀이를 위해 문인들은 삼삼오오 갈라져 선술집으로 갔는데 필자가 참여한 뒷풀이에서 어떤 소설가(김동리쪽)"예이 거지 같은 놈들!" 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이형기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형기는 진주 중안초등학교를 나와서 진주농림학교로 진학했다. 초등 동기로는 강동호 교수(작고, 전경상대학교 법대 학장)가 꼽히는데 이형기와 강동호는 초등 재학 내내 책벌레라 불릴 정도로 명작 읽기에 빠져 있었다. 강동호 교수가 법학을 전공했지만, 문학이나 교양에 유달리 강했던 일이나 이형기가 시인 일반의 수준을 웃도는 이론이나 문학적 교양을 섭렵해 있었던 일은 다 초등학교 시절에서 비롯된 독서지향의 생활 태도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농림학교 시절 친구로는 경상대학교 빈영호 초대 직선총장을 들 수 있다. 필자는 강동호 교수, 빈영호 교수(당시 학생처장)와 이형기    시인이 만나는 자리에 합석한 일이 있다. 그때 빈 교수는,

"자네, 이 사람, 학교 다닐 때 몸이 아주 약했었는데 건강에는 이상이 없는가?"하고 이형기에게 물었다. ", 골골할 정도는 아니야자네 아다시피 그때 기계체조에 매달렸었지. 뭐 특별히 다른 운동을 해볼 것도 없고 해서 평행봉 같은 것을 열심히 했었지."

   그 자리에서 이형기는 빈 교수에게 "좀 프랙티컬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하고 말했었는데, 그 자리를 파한 뒤의 필자의 머리에 와 닿았던 그 프랙티컬한 것은 신문사 통폐합 이후 교수직으로의 전환에 관한 건이 아니었나 싶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 언론사 통폐합을 시행했을 때 진주에 있는 경남일보가 마산의 경남매일에, 부산에 있는 국제신문이 부산일보에 통폐합이 되었었다. 국제신문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번갈아 맡고 있었던 이형기는 이 사태로 막 직장을 잃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후 이형기는 부산 경성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발령이 났었고, 몇 년 후에는 정년을 맞이하게 된 서정주의 자리, 곧 동국대학교로 옮겨 앉게 되었었다.

  대충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진주 문인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남명문학상'을 제정했었다. 부산교통 조옥환 사장을 이월수와 함께 찾아가서 남명문학상 제정의 취지를 설명하고 상금 출연을 요청한 것이었다. 이때는 필자와 조옥환 사장은 구면이었다. 필자가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남명학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때 조사장은 남명학연구원을 고려대학교 김충렬 교수의 협조를 얻어 이미 개설해 놓고 있던 터였다. 일본과 대만의 교수들이 참가한 학술회의는 국내 연구진들이 총망라된 맘모스 회의였고 이 회의 역시 조사장의 지원을 파격적으로 얻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사장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시상금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해 주었다. 이 문학상의 심사를 필자는 이형기에게 맡겼다. 그는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수상자를 결정해 주곤 했다.

  이때 이형기가 진주에 왔을 것인데, 어느 초밥집이었던 듯하다. 최용호 이월수 김석규 박재두 필자 등이 한자리를 하고 술잔을 나누는데 이형기의 빈 잔이 이월수에게로 향했다. 그때 이형기는 이월수를 빤히 쳐다보고 "왜 이월수씨는 시집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요? 고향에 사는 시인들이 많은 것도 아닌데, 성의를 성의로 받아 줄 수 없는가, 이 말이요.\" 이월수는 잠시 홍당무가 되면서 "저는 책을 못 받았습니다. 웬만하면 분실이 되지 않는데이상하네."하고 말을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필자에게도 해당되는 질타였다. 그 무렵 필자도 이형기 시집을 차곡차곡 받아 쌓고는 답 한 줄 써 보내지 않았던 터였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니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도 이하동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런데 이형기는 왜 여류시인 이월수를 표적으로 삼았던 것일까? 그 자리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필자를 표적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인데도 전혀 필자의 안면으로는 시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른바 '성동격서(聲東擊西)'였던 것일까.

 

  국제신문에서 이형기와 같이 근무했던 김규태 시인은 이형기의 술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센 편은 아니었고, 따라서 주사도 없었지요. 다만, 술이 좀 되면 '진주라 천리길'을 잘 불렀어요. 고향을 생각하듯 지그시 눈을 감고 '내 어이 왔던고''내 어찌 떠났던고'로 개사한 것처럼 그렇게 들리도록 노래했지요."

 

  그리고 "성격이 겉으로는 매우 오만해 보여도 자기 과오가 분명하다 싶을 때는 깨끗이 사과하는 그런 태도를 보였어요. 그는 재벌을 아주 싫어했고, 신문이나 문화가 돈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곤 했지요"라는 말을 보탰다.

  필자가 본 이형기는 성격이 깔끔했다. 자기 생각을 감추어 두는 편이 아니라 즉석에서 드러내 보이는 편이었다. 이월수에게 질타했던 '책 보내준 데 대한 무답신' 건도 그런 것이었다. 필자에게는 또 다른 형태로 그의 즉반응이 있었음을 기록해 둘 수 있겠다.

  1984년쯤이던가, 필자는 한국시에서 참여파 시인으로 우상화되고 있었던 김수영의 시를 분석하여 한 편의 논문으로 쓰고자 했었다. 이 의도에는 평소 김수영의 시가 필자의 안목에 들어오지 않았던 데 대한 불만이 깔려 있었으리라. 이 논문의 내용을 진주 어느 다방에서 이형기에게 소상히 신나게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이형기는 "그건 형식론자의 주장이야. 시는 형식 이상의 것이야"하고 잘라 주었다. 필자는 순간 기분이 심히 잡쳐 들었다.

  필자가 말했던 '김수영 시 연구'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김수영 시중에 의외로 실패작이 많았다. 둘째, 대체로 시의 말이 시인의 태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셋째, 시를 논의한 글들이 작품 자체를 보는 쪽보다는 시인의 시론에 끌려가는 쪽이 많았다. 넷째, 시를 논의하는 사람들이 시를 완성된 한 편, 곧 유기체로 보는 데 소홀했던 듯했다. 이런 전제 아래 김수영의 시를 '되는 시와 안 되는 시'로 가르고, 시의 틀에 '맴도는 말''할말'의 되풀이 구조가 있음을 밝혀낸 것이라고, 그것이 김수영 시의 비밀이요 정체라고 그렇게 조목조목 설명했던 것이다.

  이형기는 이쯤에서 화를 버럭 내면서 "그것은 형식론자의 주장이야. 시는 형식 그 위에 있단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황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는 형식 위에 있지만, 형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요, 라고 말하려다 말을 입에서 끄집어내지 않았다. 선배의 충고를 두고두고 새기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이것이 필자에게는 시에 대한 선입견 지우기에 있어 남다른 의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어 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 선배가 이 강희근을 아직도 직업교수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구나."하는 섭섭함은 좀체 가시지가 않았었다.

  그런데 얼마 뒤 홍익대학교 문덕수 교수가 진주에 왔을 때 필자가 예의 김수영론을 넌지시 띄워 보았더니 "그것참 들을 만하네. 나도 김수영 시에 대해 불만이 많은데 어디가 무엇 때문에 그런지 꼭 집어내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 논문 한 번 봤으면 해요"하는 것이었다. 사실 김수영 비판은 아직도 거의 금기사항이 되어 있다. 작년이던가, 서울대학교 오세영 교수가 김수영 시 비판을 어디다 했는데 비평가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박종한 축구에만 벌떼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머리 아프다, 이형기로 돌아오자. 이형기의 시 <연애편지>부분을 옮겨 본다.

 

이쪽도 혼자 저쪽도 혼자

실은 저쪽한테 묻지도 않고 이쪽이 혼자

또박 또박 제깍 제깍 밤을 새우는

지금도 창밖에는

답장 없는 스산한 찬바람

낙엽이 굴고 있다.

(그래야지 그래야지)

그래야만 애가 타서 또 쓸 밖에 없는

편지는 역시 연애편지가 제일이다

 

  월간 [현대시] 19936월호는 <이형기 선생 문우 회고담> 특집을 실었다. 그때 집필한 사람은 박재삼, 강계순, 김종해, 강우식, 박제천 등의 시인들이었다. 여기 실린 내용들을 발췌하여 재구성해 볼까 한다.

  625가 나기 전인 1948년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중학생]이라는 잡지가 나왔었다. 그 잡지는 10호 정도 나오고는 흐지부지 끊겼다. 그만큼 책이 안 팔리는 어려운 시대에 나왔던 것이다. [중학생]은 소설가 방기환이 팔을 걷어붙이고 낸 것이었다.

그 잡지의 3호에는 전국 중학생의 응모시들이 2페이지에 걸쳐 실렸다. 전국에서 뽑힌 작품들 가운데 이형기의 <달밤>이 있었는데 중학생이 쓴 솜씨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는 평을 들었다.

 

비인 거리마다 달빛 서러운

개구리 무논에서 한밤을 울어

- 顯考學生府君神位

잔 대신 고향의 얘기를 권하니까

향목 피우며 피우며

호박꽃초롱 앞세우고 가소서

편히 쉬소서.

 

  이형기 본인도 마음에 들었던지 이 작품을 그의 첫 시집 '적막강산'에 실었었다. '중학생'에 박재삼의 시와, 송영택의 시가 함께 실렸다. 이 세 사람의 인연은 그때로부터 시작되었다. 뒤에 다 문단에 나왔고 개천예술제에서는 제1회 장원 이형기, 차상 박재삼, 2회 장원 송영택으로 개천예술제 입상군(入賞群)을 이룬 것이었다. 백일장의 제목으로 시는 만추’, 시조는 촉석루가 제시되었다. 이때는 통합 시상을 했는데 시, 시조 구별도 없었고 중고등 대학부도 나뉘어 있지 않았다. 이형기의 장원작은 자료로 찾아지지 않고 있다. 진주문인협회에서 1980년 발간한 입상집 '꽃불 수놓은 하늘'에는 2회 장원작인 송영택의 남강을 보며부터 실리기 시작한다. 참고로 송영택의 장원작을 보자.

 

남강을 보며

 

한결 푸른 논개의 마음이

삼백년 예대로 흐른다

 

촉석루

자취 없는 옛자리에 서면

파르르 하늘이 질리는 것

 

님을 기대려

님을 기대려 애타던

내 마음이

 

오늘

진양성 다 허물은 폐허에

경건히 들국화를 피운다

 

  매우 소박한 시다. 이때는 송영택의 주소가 부산시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등학교 재학시절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송영택 시인은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나왔고 릴케의 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를 번역한 것이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한동안 실려 있기도 했다. 어쨌거나 제1회 때 장원한 이형기와 차상한 박재삼은 입상자 방이 붙었던 그날 저녁 진주극장에서 경연했던 연극 프로그램 사이에 입상작 낭송이 있을 때 처음으로 만났다. 진주농림학교 학생과 삼천포고등학교 학생의 반가운 악수였던 것이고 이 악수가 한국문단에서의 상호 부상(浮上)을 예약해 두는 것이기도 했다.

  박재삼은 이 악수 이후 194911월호 '문예'잡지를 서점에서 사서 보고는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이형기의 시 비 오는 날이 추천작품으로 실려 있어서였다. 무슨 변고 같은, 무슨 꿈결 같은 기적이 흐르는 체험이었다는 것이다. 중학생이 이 나라의 기성시인의 반열에 들어가다니, 어째 이런 일이 있을까, 가슴 가누기 힘들었다는 것 아닌가.

  1952년 수도가 부산에 옮겨와 있을 때였다. 이형기는 그때 '민주여론'이라는 주간지 기자를 하고 있었다. 박재삼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무작정 부산으로 갔는데 이형기는 박재삼에게 작은 일거리 하나를 마련해 주었다. '희망'이라는 잡지에 김말봉이 소설 파도에 부치는 노래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그 소설을 다시 베껴 적는 일이었다. 그때는 복사기도 없는 시절이어서 일일이 육필로 베껴 쓸 수밖에 없었다.

  후에 이형기와 박재삼은 또 주례와 혼주라는 입장에서의 인연을 맺었다. 박재삼의 큰 딸이 결혼했던 것이다. 그리고 박재삼이 대한일보 기자를 하고 있을 때 고혈압으로 쓰러져 입원하게 되었는데 이형기는 즉각 박재삼 돕기운동을 펼쳤다. 문인들에게 호소했던 일이라 큰 돈이 모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형기는 그 돈을 박재삼 몰래 그의 아내에게 전달했다. 후일 박재삼의 아내는 "당신은 이형기씨의 은혜를 평생 잊어서는 안 돼요"하고 남편에게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이형기가 술친구로 만났던 여류시인에 강계순이 있다. 강계순에 비해 이형기는 나이로는 4년 연장이고 문단 데뷔로는 10년 선배다. 요즘처럼 시인들이 한 해에 수십 명 수백 명씩 쏟아져 나오는 때가 아니라서 당시의 시인들은 모처럼 만나게 되면 10년지기가 되기 마련이었다. 강계순은 "우리는 술 마시다 만났고 술 마시면서 만나고 있고 또 앞으로도 만나면 계속 마시게 될 것이다"라 말한다. "그는 또 보통보다는 좀 큰 키에 한 번도 비대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길고 휘청한 허리와 약간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는 지쳐 쓰러질 듯 쓰러질 듯한 걸음걸이로 어찌 보면 좀 지치고 쇠약한 노인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다닌다"고 지적한다.

  이형기는 술을 마셔도 꼭 소주만 마시는데 마셨다 하면 언제나 '인생은 길을 묻는 지친 나그네'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형기가 이 노래를 부를때마다 강계순은 이형기의 시 <랑겔한스섬의 가문 날의 꿈>을 떠올린다는 것이었다.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섬.

 

  이형기는 이 시를 욀 때에 '허무자체'라고 강계순에게 이 시의 세계를 정의하면서 늘상 시는 비수를 갈듯이 쓴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한국시인협회 야유회에서 한껏 취해 있는 이형기를 보고 시인 이인수는 "형기, 그렇게 몰아붙이지 말아.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라구" 하면서 술잔을 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김종해는 시인 이형기의 주소라는 시를 썼는데 이는 이형기 시를 설명하는 것으로 연구의 한 자료가 된다.

 

그가 머물고 있는 주소가 어딘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허무라 하기도 하고

유미적이라 하기도 하고

즉물적이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막강산이라 하기도 하지만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가 가진 예리함

그에게는 사물을 자르는 면도날이 있다

확실한 것은 그의 시에서 그으지는

면도날 검법이다

 

...(줄임)...

 

미당의 깊이, 목월의 높이가 어우러진

그가 머물고 있는 주소가 어딘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쨌거나 김종해는 이형기의 주소를 "미당의 깊이 목월의 높이가 어우러진" 곳으로 판정하고 있다. 김종해는 고교 재학 때 개천예술제에 와서 차상에 입상했던 시인이다.

  1980년대 초에 이형기는 한일 아시아 시인회의 창립 발기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타이페이로 여행한 일이 있었다. 당시 한국측 단장으로 김광립이 참가했고 참석 시인으로 허영자, 정진규, 김종해, 강우식 등이 참여했다.

타이페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형기 옆 자리에는 강우식이 앉았다. 강우식이 문학 이야기와 문단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이형기는 가방 속에서 문고본 하나를 찾아내고는 독서삼매에 빠져 버렸다. 강우식은 하품을 몇 번 하다가 깊은 잠에 들어갔다. 잠에서 깨어나 옆으로 보는데 이형기는 여전히 문고본을 읽고 있었다. 강우식은 "책 읽고 있는 모습이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겠는가?" 하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한국측 시인들은 그날 타이페이에 무사히 도착했고, 여장을 풀고 이곳저곳의 초청행사에 참석하기도 하며 며칠을 보낸 어느 날이었다. 이형기가 강우식에게 다가가 "강형, 자유시간도 좀 있는데 우리 서점 구경 안 갈래요?"하고 다그치더라는 것이다. 강우식은 그 말에 쾌히 승낙하고 타이페이 중심가에 있는 서점으로 동행했다. 그 서점에서 강우식은 갖고 싶었던 책 한 권을 들었는데 그 책은 <산해경(山海經)> 이었다.

  <산해경>은 중국 고대 전적중 가장 독특한 품격을 지닌 책으로 옛부터 '기서(奇書)'의 하나로 일컬어지던 책이었다. 이 책 속에는 중국의 고대지리, 역사, 신화, 민족, 동물, 식물, 광산, 의약, 종교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한자(漢字)로는 31천여 자밖에 쓰여져 있지 않은 작은 책이다. 강우식은 이 <산해경>을 이형기와 같이 사들고 나온다는 것이 흐뭇하고 뿌듯한 느낌이 더 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타이페이에서 귀국하는 길에 일행은 동경에서 2박할 예정으로 우에노공원 근처 여관에서 여장을 풀었다. 거기서 초저녁부터 문인들이 고스톱판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이 고스톱판은 여행 중에 이루어지는 것이라 중화민국돈, 일본돈, 달러, 한국돈이 뒤섞일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환율대로 계산하여 판이 끝날 때마다 주고받는 게임이 되었다. 그날 밤 강우식이 판돈을 싹쓸이했고, 이형기를 비롯한 시인들은 수리치 잎사귀 씹는 맛을 다시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고스톱으로 밤샘을 한 그 다음날 아침, 일행들은 동경시내 관광을 떠나고 강우식은 여관방에서 잠깐 눈을 붙인 뒤 '간다(神田) 고서점' 거리로 나갔다. 당시 강우식은 시인 이우석이 경영하던 '문학예술사'에 몸 담고 있던 때라 출판 자료를 찾아볼 심산이었다. 흔히들 '간다'를 고서점 거리라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딱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를 읽지 않은 일본의 전후세대가 없다 할 정도로 일본 젊은이들이 들어가 일하고 싶은 직장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와나미 서점'등 출판사들이 있고 대형서점들이 즐비한 동경의 명물 거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간다'의 대형서점 3층에서 강우식은 놀랍게도 이형기와 맞닥뜨린 것이다. 이형기는 동경의 시내 관광을 포기하고 책 관광을 온 것이었다. 오늘날 동경의 인구를 12백만이라고들 한다. 12백만의 거대한 도시에서 약속도 없이 아침에 헤어진 사람을 한 장소에서 만난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강우식은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 참으로 당연한 일을 당연 밖에서 해석하고자 한 것이 놀라운 일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강우식의 기억을 찾아가 보기로 하자. 1970년대 이후 강우식은 박재삼과 더불어 답십리에 살았는데 이런저런 관계로 50년대 시인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신년 하례식 때면 문단의 어른이시던 서정주, 황순원, 선생댁에 세배를 우루루 몰려서 가는 것이 상례가 되었었다. 두 분 선생께 세배가 끝나면 그다음 집합 장소는 이형기의 집이었다. 이형기의 일가 중에서 진주에 사는 사람은 사촌 형제가 세 사람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찍 돌아간 이원부 시인을 제외하고 세 사람이다. 필자가 1968년 진주에 내려올 때 어디서 만났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형기 시인이 "진주에 가거든 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을 하는 이창호 선생께 가서 인사를 드려요. 진주 유지니까, 많은 도움이 될 거요"하는 것이었다.

  진주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자리 잡은 필자는 동성동의 당시 MBC빌딩에 있었던 상공회의소 사무실을 찾았다. 이 국장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 국장은 젊을 때 시를 쓰는 시인이었지만 이때는 시 쓰기를 멈추고 있었다. 이형기는 그의 숙부인 이창호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많이 접하면서 교양을 쌓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창호는 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을 거쳐 경남일보 전무, 진주문화원장을 몇 임기 지냈다. 하얀 피부에 단정한 차림의 신사로 언제나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형기 시인의 일가 중에서는 필자로서는 고 이원부(李源夫)시인과의 인연이 크게 닿았다. 이원부는 이형기의 사촌 동생으로서 문산읍에 있는 '세화택시'의 전무였다. 당시 문산읍에 있던 진양고등학교 국어교사 김영화 시인(작고)의 소개로 이원부를 알게 되었는데, 이형기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지내게 되면서 의외에도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루는 습작 뭉치를 들고 와서는 좀 살펴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깐깐한 성격답게 군말이나 수사적 비유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시였다. 어떤 격()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 무렵(80년대)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타의 시인들에 비겨 떨어지는 작품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필자가 주간으로 발행하던 [문예정신](발행인 최용호. 진주상호신용금고에서 출연)에 신인으로 데뷔를 시켰다.

  그런 뒤 이원부는 묵묵히 작품을 썼고, 진주문인협회와 경남문인협회에 가입하여 회원으 로 성실히 활동을 했다.'세화택시'를 그만두고 나서 그는 폐에 이상이 오고 점점 쇠약해 갔다. 마침 그가 천주교 신자로서 필자와 같은 교회(봉곡동 성당)에 다녔는데, 미사가 끝나면 근처 다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숨이 사위어 가는 것이 눈에 띄는 그의 그런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는 신을 이야기하고 시를 이야기하고, 시의 절정기에 있는 이형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원부(프란치스꼬)는 결국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천국에 갔을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은 그가 남긴 시집 한 권 분량의 작품들이 다른 유품들과 함께 소실되었다는 사실이다. 이형기는 동생을 바라보는 눈이 늘 대견하다는 듯이 "시 활동 잘해?" 라 말했고, 필자에게 "잘 챙겨 줘요"하고 당부하곤 했다. 이원부의 아랫동서인 송천종(경상대 시설과, 율리아노)"형님은 대쪽 성품에 지나치게 완고했고, 글만 쓰고 있었던 분"이라고 이원부의 단면을 회상했다. 그리고 "형님은 이형기 형을 집안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수시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형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월간 [현대시]의 원구식 주간은 "이형기 선생과는 만나면 술이었지요. 술 실력은 소주 3병 정도는 되었어요. 술 마실 때는 늘 친구같이 대해 주었기 때문에 속에 있는 말을 여과 없이 뱉어내기도 했어요." 그렇게 말한 원구식은 이형기와의 약속에 대해 들려주었다.

  "원형, 내 재산은 탈탈 털고 나면 3억 정도가 돼요. 1억은 딸 시집보내는 데 쓰고, 1억은 아내에게 주고, 남은 1억으로는 '이형기문학상'을 만들면 싶은데 그 일을 원형이 해 줘요"하더라는 것이다. 얼떨결에 "선생님 그렇게 하죠. 상을 제정해야 되지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지요."말하고 원구식이 이형기에게 약속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형기는 시간이 나면 월간 '현대시'에 들러 원구식 주간과 자주 술을 마셨다. 그러던 중에 '이형기 문학상' 제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급기야 원구식이 제정해 드리겠다고 구두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형기 시인이 별세한 뒤 부인 조은숙은 서재에 있던 일체의 책을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했고 책을 제외한 일체의 유품은 '현대시'에 보내 그 처리를 부탁했다. 이 유품은 한 대의 차량에 적재되어 북가좌동 현대시 사무실에 전달되었다. 유품 속에는 원고, 편지, 상패 등과 시인이 생전에 지니고 있었던 생활용품 등이 들어 있었다.

  원구식은 이 유품이 가장 바람직한 자리에 전시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형기 선생은 한국시인협회 재건을 위해 특별히 힘을 많이 쓰신 분인데, 2년 임기 중 1년차를 보낸 뒤 쓰러지셨던 것이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이 선생은 등산을 많이 했기 때문에 실질로는 몸의 근육질이 단단하여 장수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하여 생각보다 일찍 돌아간 것에 대해 허전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다음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오세영은 이형기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94312일 이형기가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임원진을 구성한 내용을 보면 이 점이 드러난다. 평의원 (전임 회장)으로는 조병화, 김남조, 김춘수, 김종길, 홍윤숙, 김광림 등이 당연직이었고 심의위원장에 성찬경, 기획위원장에 박재삼, 상임위원장에 오세영 등의 이름이 보인다. 시인협회의 골격으로 보면 사두체제(四頭體制). 회장과 부회장격인 심의위원장, 기획위원장, 상임위원장이 그 사두(四頭)이다.

  그런데 임원진에서 1950년대의 숲을 헤치고 1960년대 출신 시인인 오세영이 등장한 것을 눈여겨 볼 수 있다. 기라성같이 많은 60년대 출신 시인들 중에서 오세영을 왜 낙점했던 것일까? 이것은 물론 이형기와의 친소관계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던 60년대 출신들 가운데서는 화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세영은 이형기 회장에게 자기를 선임한 것을 재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유로는 자기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나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 중에서 뽑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 그 첫째였고 자기는 1995학년도부터 1년간 미국 버클리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 그 둘째였다. 이형기는 그럼 누구가 좋은지 추천해 보라고 말했는데 오세영은 T씨와 F씨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이형기는 "T씨는 시협에 대한 기여도가 없고 F씨는 문예지 주간을 임원으로 두지 않는 관례가 있어 안돼요. 오교수, 1년 후에 버클리대학에 가더라도 가는 그때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일단 상임위원장을 맡아 주는 것으로 해요"하면서 밀어부쳤다.

  이형기가 대산문학상 제1회 심사위원장이 되어 심사위원을 위촉할 때 그는 어김없이 심사위원으로 오세영을 위촉했다. 어떤 상이든지 1회 수상자의 면면이 그 상의 깊이나 격을 결정해 주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이형기와 오세영은 대산문학상 제1회 수상자의 잣대위에 고은(高銀)을 올렸다. 그러고 난 뒤 제2회 수상자로는 이형기가 뽑혔다. 재미있는 일은 수상자 두 사람이 다 미당(未堂) 서정주의 천()에 의해 문단에 데뷔했다는 것이다. 이 두 시인의 시는 한 분의 스승 밑에서 서로 다른 개성으로 달려가서 일가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형기가 도달했던 '허무'에 대해 이형기는 <나의 시, 나의 시쓰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기억에 오른다.

 

"허무는 나를 절망케 하지만 동시에 나를 꿈꾸게 한다. 허무는 별들이 거기서 죽고 거기서 태어나는 블랙홀이다. 허무는 은총이고 제기랄이다."

 

  이형기의 동국대학교 제자 중에 시인, 평론가 허혜정이 있다. 허혜정은 1966년 진주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서울로 갔다. 허혜정의 할아버지는 산청출신으로 진주에서 교직생활을 했고 아버지 허천택 교수는 동국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정년을 맞이했고 동 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허천택 교수의 진주고등학교 동기(26)로는 허유(시인, 전 투자신탁 사장), 고영근(전 서울대 교수), 권해병(전 경북대 교수), 김영민(전 서울대 교수), 이동녕(전 서울대 교수), 오철한(전 서울대 교수), 박중경(전 진주중 총동창회장) 등의 면면을 들 수 있다.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진주 비봉산 아래 돌공장 근처에서 하숙했는데 하숙집은 변창희 선생(전 단성고 교장 당시 진주사범 국어교사)댁이었다. 안골목으로 들어가면 허혜정의 할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당시 허혜정의 아버지 허천택은 필자보다 5회나 선배가 되어 만날 수는 없었고 필자보다 두 해 아래였던 허혜정의 작은 아버지 허응택과는 친하게 지냈다.

  어쨌거나 허혜정이 그 골목에서 세 살까지 살았다 하니까 그 골목과 그 골목을 지나가던 그의 할아버지의 근엄했던 풍모가 잠시 떠올랐다. 인연의 고리는 이렇게 약간씩 비켜서는 것이면서도 어느 시간대에서는 하나의 물결에서 함께 뜨는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허혜정은 1994년 월간 '현대시'에 신인 평론으로 데뷔한 데 이어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었다. 이후 시도 쓰고 평론도 쓰는 2개 장르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형기가 부산 경성대학에서 동국대 교수로 전출해 갔을 때 허혜정은 학부 2학년 학생이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현대시를 전공하면서 이형기의 지도를 받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서도 지도교수는 이형기였다.

  그런데 과정 중에 이형기가 정년을 맞이하게 되어 허혜정의 학위논문 지도교수가 공백이 되었다. 허혜정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정을 딱하게 여긴 홍신선(시인, 동국대 교수)교수가 주선을 하여 퇴임한 이형기를 허혜정의 지도교수로 그대로 유효하게 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정년한 교수를 학위논문 지도교수가 되게 한 경우는 이형기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허혜정은 "선생님은 연구실에서 늘 글을 쓰셨고, 문학청년 같은 패기를 잃지 않으셨어요. 댁으로 제자들이 몰려가면 밤 12시까지 술을 마셔도 짜증 내지 않고 받아주셨지요. 병상에 있으신지 13년 동안에 많이 적막하셨고, 댁에 방문하면 휠체어에 앉아 계셨고 무릎에다 담요를 덮고 맞아 주셨어요. 대화는 언제나 세속적인 것은 피하셨고 문학 이야기만 진지하게 하셨지요."

  허혜정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은 이형기의 대학 재임 중 이형기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허혜정이 유일하다는 데 있다. 허혜정의 논문은 <한국 근대 낭만주의 시와 불교적 정서 연구>인데 심사위원장에는 서울대 오세영 교수가 맡았다.

  허혜정은 말했다. "선생님께서 쓰러지신 뒤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시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부축하여 동숭동 수여식장까지 갔지요. 선생님께서 빨리 회복이 되지 않아 1996년쯤일 거예요. 중국으로 치료를 위해 떠나셨는데 그날 공항은 참으로 매서운 추위로 꽁꽁 얼어붙을 때였어요. 추위와 눈물이 하나로 엉겨 떨어지지 않는중국에서 수개월 지난 뒤에 선생님은 시 한웅큼 써가지고 돌아오셨지요. 이때의 원고는 제가 정리하고 뒤에 실린 '아포리즘'도 발췌 정리하여 1997년 시집 '절벽'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형기는 생전의 최종 시집인 '절벽' 이후에도 병상에서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적 투혼의 불사름이라 할까. 정리를 하면 한 권의 유고시집이 될 분량이라 한다. '절벽' 다음이니까 시집 이름은 '낙하 落下'가 어떨까. 월간 [현대시] 발행인 원구식 시인은 이형기에게 약속한 '이형기문학상' 제정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리에서 결심하고, 또 추진하게 되었다.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하 시사사라 줄여 부름)을 창간한 몇 년 뒤 '시사사' 임원회의(회장 고석종) 자리에서 원구식의 이형기와의 문학상 약속 이야기를 들은 임원들은 이 상의 추진체를 '시사사'로 한다는 것과 당장 2006년부터 시상한다는 데 전격 동의하였다.(계속)

 

이형기 1.jpg

약력:

이형기(李炯基.1933.62005.2)

시인경남 진주 생경남 진주농업고등학교를 거쳐 1956년 동국대 불교과 졸업. 1949년 진주농림학교 재학생으로 [문예]지에 <비 오는 날>(1949), <코스모스>(1950), <강가에서>(1950)가 추천을 받아 데뷔. 16세에 등단함으로써 최연소 등단기록을 세웠다대학 재학 중부터 언론계에 투신근 30년간 종사했으며, [연합신문], [서울신문기자, [대한일보정치부장 및 문화부장을 거쳐 [국제신보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다가 1980년 언론계 통폐합으로 신문사를 그만두었다부산산업대 교수동국대 국문과 교수 역임. 1949년 16세의 중학생으로 [문예(文藝)]지에 시 <비오는 날외 2편이 추천되어 시단에 등단중후한 시들과 예리한 시론을 발표, <적막강산(寂寞江山)> <꿈꾸는 한발(旱魃)> <보물섬의 지도> <그해 겨울의 눈>의 시집과 <감성의 논리> <한국 문학의 반성> <시와 언어등의 비평집 등 10여 권의 저서를 냈다한국문학가협회상(1959), 문교부문예상(1966), 한국시인협회상(1976), 한국문학작가상(1982), 부산시문화상(1983), 윤동주문학상(1985), 대한민국문학상(1990),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1), 공초문학상(1993), 대산문학상(1994), 대한민국문학상(1995), 예술원상(1999), 은관문화훈장(2002), 서울사랑시민상(2003) 등 수상.

 

강희근

1943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호는 하정(昰玎). 진주고동국대 국문과를 졸업동아대 대학원 문학박사과정 수료. 1965년 <서울신문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시집으로 <연기 및 일기> <풍경보> <산에 가서> <사랑제> <사랑제 이후> <화계리> <소문리를 지나며> <중산리 요즘등이 있음그 밖의 저서로는 <시 짓는 법> <우리 시문학 연구> <한국카톨릭시 연구> <글예술 이론> <오늘 우리시의 표정> <시 읽기의 행복> <경남문학의 흐름> <우리문학 맛보기등과 편저로 <한국 고전소설 20> <세계 명작단편 50>등이 있음국립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장인문대학장도서관장전체교수 회장 및 전국국공립대교수협의회의 부회장배달말학회장경남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현재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경남펜클럽회장공보부 신인예술상경남도 문화상조연현 문학상동국문학상시예술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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