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 시인(1)

조회 수 459 추천 수 2 2026.01.01 08:49:44

 

 

                     우리나라 최연소 등단 시인, 이형기(1)

 

                                                                               강희근(경상대 교수)

 

  진주 출신 이형기(李炯基.1933~2005) 시인은 진주 촉석루 건너편 망경동에서 살았다. 진주 중안초등학교(경남·부산 최초의 초등학교)를 나오고 진주농림학교를 다녔다. 대학은 동국대학교 철학과로 갔는데 "시를 쓰자면 종교나 철학 쪽의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하고 종종 말했었다.

  이형기는 1949년 농림학교 재학시절 제1회 개천예술제 백일장에 나가 당당 장원으로 입상했다. 이때 차상에는 시조를 쓴 박재삼이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 백일장에서 장원한 것은 그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한 줄이다. 그런데 이 무렵 만16세의 나이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학잡지 '문예'에 시 <비 오는 날> 2편이 서정주의 추천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에 속한다. 아동문학을 제외한 성인 문학계 데뷔 절차에서 16세의 까까머리 학생이 출현한 것은 이형기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시가 우수하여 뽑아 놓았더니 인사하러 왔는데 까까머리라 황당했다는 심사위원 서정주의 회고담이 인상적이다. 서정주는 시를 뽑았지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고 웃어넘겼는데 정작 경남의 어디에선가 어떤 분은 "무슨 문예지가 그래 애송이를 신인으로 뽑는가? 권위에 문제가 있어."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대학 시절 한두 번 이형기 시인을 만났었다(그 이후 물론 서울이나 진주에서 여러 번 만났지만)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5월 문학의 밤 프로그램을 들고 선배인 이형기 시인의 언론사(아마도 국제신문 서울 편집국인 듯)를 찾아간 것이다. 행사진행 지도교수가 [현대문학]의 주간으로 있던 조연현 교수였으므로 당시 초대된 외부 문인들은 하나같이 '반드시' 참석하겠노라고 확답해 주었는데 이형기 시인도 "조선생 말씀하신 대로 하겠다."고 짧게 말했다. 이형기 시인이 [문예]지에 추천을 받아 서울에 올라갔을 때 적당히 거처할 곳이 없는 것을 안 조연현 교수가 자기 집에 있게 하고 후에 자기 질녀에게 이형기를 소개하여 결혼하게 했었다. 그렇기에 이형기의 입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겠다."는 말이 쉽게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필자가 '65년도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그해에 한국문인협회에 입회했는데 가을 세미나에 갔을 때 이형기와 박재삼을 만날 수 있었다. 이형기와의 두 번째 만남이고 박재삼과는 첫 번째 만남이었다. 수유리에서 세미나(세미나가 아니라 술 마시는 대회)를 마치고 오는 길에 대부분 문인들이 삼삼오오로 종묘로 들어가 담소하거나 남은 술을 마셨다.

  종묘로 들어서면서 이형기 시인은 박재삼 시인을 보고 강희근과 시가 같으니까 잘해 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자기는 초기의 서정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고 박재삼은 초지일관 서정시니까 이번에 신문에 당선된 강희근의 작품이 정통 서정시이므로 교감을 잘해 보라는 것이었으리라.

 

   이형기는 후기 시들이 우리나라 본격비평에 의해 평가를 받고 있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작품은 초기에 쓴 서정시 <낙화>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낙화> 전문 -

 

 

  이형기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유달리 강했다. 필자와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다른 주변 시인들을 만났을 때도 예의 그 자부심은 송곳이 포대를 뚫고 나오듯이 노출되곤 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나서 최고의 일이 시 쓰는 일이지"라고 시작되는 시인 일등주의 선언을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허영자 시인에 의하면 우리 문단에서 이형기와 같은 일등주의에 젖어 살았던 시인으로 김종문과 김구용, 이형기를 떠올리며 이들의 작품들을 되새겨 보곤 했다고 필자에게 술회한 적이 있다. 이형기는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를 때 좀 젊었을 때는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가.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 기둥을 얼싸 안고"로 시작했고 좀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비 오는 네거리에 비 오는 네거리에 우산을 마주 잡고"로 시작했다. 어느 쪽이든지 늘어지거나 청승맞은 데가 있다. 필자의 귀에는 노래를 자기식으로 희롱할 뿐이지 노래로 승부를 걸겠다는 의지는 없는 것으로 들렸다.

 

  그런데 문제는 노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자리 어느 순간을 디카로 찍듯이 찍어서 고정하면 다음과 같다.

 

"비 오는 네거리에 비 오는 네거리에 우산을 마주 잡고지금 누군가가 내게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한 사람을 들으라 하면, 하면 나는 아무래도 이 이형기밖에는 없다고 말할 것이야. 비 오는 네거리에 비 오는 네거리에 우산을 마주 잡고"

 

  노래 속에 신파조 대사가 들어가는 이른바 액자형 '가요 콩트'를 묘출하는 것이다. 그 뒤로부터 필자는 비가 오거나 심히 무료하거나 하면 "비 오는 네거리에 비 오는 네거리에 우산을 마주 잡고지금 누군가가 내게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한 사람을 들으라 하면, 하면 나는 아무래도 이 강희근밖에는 없다고 말할 것이야."하고 중얼거리며 이쯤에서 대사를 중단하고 만다. 멋쩍기 때문이다. 술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의 이형기식 '가요 꽁트'는 불발이거나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남이 흉내내기가 절대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형기의 일등주의 내지 자부감 발현의 다른 이야기 한 토막이다. 이형기가 K신문사 편집국장일 때(논설실장일 수도) 그 신문의 사주(社主) 측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하게 되었는데 그 그룹의 계열사 직원들이 이 선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때였다. 물론 그 후보는 내리닫이 J지역구에서 계속 당선되어온 터여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형기 시인이 느닷없이 J시에 나타난 것이다. 필자와 김석규, 이월수, 박재두(작고) 네 시인이 달려나와 횟집에서 반가운 인사, 그다음에 술잔이 오고 갔다. 그날은 '비 오는 네거리'는 부르지 않고 시 이야기와 술 이야기만 했다.

 

  이형기는 "오늘은 내가 산다."라는 말만 하고 그 뒷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후배시인들의 말을 들어주기로 작정하고 귀향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여 주거나 간간히 짧게 토를 달 뿐이었다. 그러나 필자와 달려나와 참석했던 시인들은 침묵의 행간을 읽고 있었다. 행간에 일등주의와 자존심이 찍혀 있다는 것과 사주와 편집권과의 갈등 한 줄기가 눌어붙어 있다는 것, 귀향도 언제나 같은 귀향일 수 없다는 것 등의 의미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누가 먼저였던지는 모르나 이형기의 <무슨 짐작 있어>를 외고 있었다.

 

무슨 짐작 있어 흔들리는 나뭇가지

바람은 이제사 눈을 뜨네.

밤이 오기 전 희부연 한때를

그 속에 떠오르는 아낙네들

하얀 얼굴.

 

  이형기 시인이 본격적으로 시를 쓰면서 시적 전환을 보인 때가 1960년대이다. 이 시기에 그는 평론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현대문학'을 통해 L 비평가와 논전을 벌인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64년이던가, 필자가 대학 시절 동국문학회 시화전이 구내 오솔길에서 열렸는데 어떤 중량감 있는 여자분이 학교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동문 선배 코너에서 이형기 시인의 시화 작품을 보더니 놀라는 눈치를 보이며 "이형기 시인이 이 학교 출신이냐?"고 물었다. 필자가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시를 꼼꼼히 읽어보다가 돌아갔다.

  돌아간 뒤 선배 이우석 시인에게 "저분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유명한 여류 시사평론가 정충량 씨라고 답해 주었다. 그 무렵 논전으로 장안의 시선을 모으고 있던 이형기에 대한 관심이 이런 형태로도 드러나고 있구나 하고 잘난 선배를 둔 것에 한껏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 번은 미당 서정주 선생댁에서 몇 사람이 몰려가 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김현승 시인이 화제가 되었다. 미당은,

"김현승은 꼬장꼬장한 사람이야. 소정의감(小正義感)에 불타는 사람이야. 그러다가 대정의(大正義)를 못 보는 편협에 빠지기도 해. 문협에서 전국 순회 문예강좌에 대해 '왜 맨날 서정주, 김동리, 박목월, 조지훈인가? 이형기, 문덕수 같은 후배들도 좀 보내면 되지 않겠나' 하고 딴죽을 건단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서정주, 김동리, 박목월이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지역사정과 문단 사정이 겹쳐 있단 말이야. 그걸 못 보는 사람이야. 아니 이형기, 문덕수를 챙긴다면 내가 더 챙길 사람들이 아닌가?"

  1960년대 시단은 현실파로 김수영, 예술파로 김춘수가 대립각을 세우면서 전개되는데 이들과 같은 반열에 서는 시인들로 이형기, 문덕수, 박재삼이 죽순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60년대 사화집' 동인이 우수 시인들을 중심으로 시단 권력을 형성해 갈 때였다. 제주대학에서 홍익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서울로 갓 올라온 문덕수와 이형기 등이 황금찬, 성춘복, 유경환, 박재릉, 최원 등 20여 명 시인을 규합하여 '시단(詩壇)' 동인회를 결성한 것이다.

  이때 이형기는 동화통신 정치부에 있다가 서울신문 정치부로 옮겼다가 다시 대한일보 문화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정치부에 염증을 느낀 이형기가 대한일보 문화부장으로 옮기면서 필생의 숙원인 색채가 있는 시인, 의식 있는 시인으로의 대감행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셈이었다.

  이형기는 시에도 지성의 날카로움을 획득하면서 전천후 비평가로서의 칼날도 번뜩이며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다정다감했다. 부드러우면서 안으로는 지적인 기둥을 확고히 세워갔다. 당시 이형기는 MBC 보도제작부에 근무했던 후배시인 최원과 가까이 지내며 매주 산행을 즐겼다.

  최원은 1936년 원산 출생으로 6·25때 월남하여 마산에 정착해 마산에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나오고 19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효종대왕릉 망두석>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는 '일요일 그 아침에'가 있고 MBC에 입사하여 보도제작부장, 마산 MBC 상무 등을 지냈다. 뒤이어 진해 에브랜드 사장, 경남매일 사장을 거쳤다. 성격이 호방하고 의리에 강하여 그의 곁에는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이형기는 대한일보 안에 산악회가 결성되어 있었지만 주로 최원과 산행을 했다. 문화부에 거느리고 있던 이종석 기자를 대동할 때도 있었다. 북악산, 도봉산, 관악산은 물론이고 경기도 일대의 산과 강화도 마니산에까지 섭렵을 했다. 이형기는 이 산행으로 유약한 서정의 언덕을 뛰어넘고 인간의 존재와 부조리와 실패하게 되어 있는 삶의 질곡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형기가 문덕수와 더불어 [시단] 동인을 만들고 최원과 함께 산행을 하던 그 무렵이었다. 이형기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박종화 혼자 오래 한다는 데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한국문인협회 총회가 열렸을 때 이형기는 그동안 이사회에서 간선으로 뽑던 이사장을 총회 직선으로 뽑는다는 정관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안을 '시단'동인이 중심이 되어 전격 통과시켰다. 이것은 문협의 관례로 보나 문단 선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보나 하나의 쿠데타에 속하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문단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던 평론가 조연현은 이 일련의 사태를 뒤늦게 알고는 노발대발했다. 조연현은 생존 문인 선배 중에서 박종화를 깍듯이 예우해 오고 있었다. 그런 터에 문단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형기 등의 신진 세력의 동향에 대해 좌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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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이형기(李炯基.1933.62005.2)

시인. 경남 진주 생. 경남 진주농업고등학교를 거쳐 1956년 동국대 불교과 졸업. 1949년 진주농림학교 재학생으로 [문예]지에 <비 오는 날>(1949), <코스모스>(1950), <강가에서>(1950)가 추천을 받아 데뷔. 16세에 등단함으로써 최연소 등단기록을 세웠다. 대학 재학 중부터 언론계에 투신, 30년간 종사했으며, [연합신문], [서울신문] 기자, [대한일보] 정치부장 및 문화부장을 거쳐 [국제신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다가 1980년 언론계 통폐합으로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부산산업대 교수, 동국대 국문과 교수 역임. 194916세의 중학생으로 [문예(文藝)]지에 시 <비오는 날> 2편이 추천되어 시단에 등단, 중후한 시들과 예리한 시론을 발표, <적막강산(寂寞江山)> <꿈꾸는 한발(旱魃)> <보물섬의 지도> <그해 겨울의 눈>의 시집과 <감성의 논리> <한국 문학의 반성> <시와 언어> 등의 비평집 등 10여 권의 저서를 냈다. 한국문학가협회상(1959), 문교부문예상(1966), 한국시인협회상(1976), 한국문학작가상(1982), 부산시문화상(1983), 윤동주문학상(1985), 대한민국문학상(1990),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91), 공초문학상(1993), 대산문학상(1994), 대한민국문학상(1995), 예술원상(1999), 은관문화훈장(2002), 서울사랑시민상(2003) 등 수상.

 

강희근

1943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 호는 하정(昰玎). 진주고,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 동아대 대학원 문학박사과정 수료. 1965<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연기 및 일기> <풍경보> <산에 가서> <사랑제> <사랑제 이후> <화계리> <소문리를 지나며> <중산리 요즘> 등이 있음. 그 밖의 저서로는 <시 짓는 법> <우리 시문학 연구> <한국카톨릭시 연구> <글예술 이론> <오늘 우리시의 표정> <시 읽기의 행복> <경남문학의 흐름> <우리문학 맛보기등과 편저로 <한국 고전소설 20> <세계 명작단편 50>등이 있음. 국립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장인문대학장, 도서관장, 전체교수 회장 및 전국국공립대교수협의회의 부회장, 배달말학회장, 경남문인협회 회장을 역임. 현재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경남펜클럽회장. 공보부 신인예술상, 경남도 문화상, 조연현 문학상, 동국문학상, 시예술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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