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아동문학의 불모지 일제강점기에 방정환과 함께 아동문학을 싹틔운 선구자. 우리나라 근대 어린이문학과 문화운동의 거성으로 평가되며 그의 대표작으로는 홍난파에 의해 작곡된 <고향의 봄>[3]이 있다. 방정환이 한국의 페스탈로치라면 이원수는 한국의 안데르센. 이원수와 방정환은 약간의 접점이 있었다. 방정환은 생전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동화 구연 행사 등의 활동을 행했다. 방정환이 당시 이원수의 고향인 경남 양산까지 내려오자 이원수는 이에 대단히 감동했고 방정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가르침을 얻었다. 이는 이후 이원수가 어린이 문화의 길로 가는 계기 가 되었다.
배우자 역시 "뜸북뜸북 뜸북새"로 시작하는 '오빠생각'이라는 동요의 가사를 지은 아동문학가 최순애(1914~1998)이다. 이 부분은 2018년 2월 1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생애:
일제강점기:
1912년 1월 5일 경상남도 양산군 읍내면 북정동 하북정(現 양산시 북정동 하북정마을)에서 아버지 이문술(李文術)과 어머니 여양 진씨 진순남(陳順南)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0달 만에 창원군 창원면 소답리(현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로 이사,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1922년 마산부로 이사해 마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전학했다. 마산부에 정착한 후 방정환이 1923년 창간한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와 '신소년'을 애독하며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1924년 '신소년'에 '봄이 오면'을 발표했다. 마산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25년에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그리움과 창원 소답리에서 지낸 유년시절에 대한 향수를 그린 동요 '고향의 봄'이 1926년 4월 '어린이'지에 입선하면서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또한, 1925년 마산에서 활동하던 소년 단체인 '신화소아호:년회'에 가입하여 문학을 접하고 민족애를 키워나갔다.
1926년 마산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 조선인을 학대하는 일본인의 만행을 비난하는 글을 학급신문에 게재하여 경찰에서 문제를 삼았으나 당시 담임교사가 책임을 져 처벌을 면했다. 1928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상업학교[8]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기쁨사'의 동인으로 가담, '어린이'지의 집필동인으로서 동시 '비누풍선'과 누나에 대한 그리운 감정을 그린 '섣달 그믐밤' 등을 발표했다. 1931년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경남 함안군 함안금융조합에 취직하였다. 같은 해 9월 조선의 아동예술운동을 위한 단체인 '신흥아동예술연구소'가 창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5년 2월 27일 상술한 함안금융조합의 조합원들과 결성한 항일 문학모임인 '함안독서회사건'[9]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함안독서회 회원이었던 나영철(羅英哲)·김문주(金文株)·제상목(諸祥穆)·양우정(梁雨庭)·황갑수(黃甲洙) 등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마산(부산형무소 마산지소)과 부산(부산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고 1936년 1월 30일에 26세의 나이로 출옥했다. 옥중에서도 아동문학 집필을 이어갔으며, 1981년 투병 중에 옥중에서 쓴 동시〈두부 장수>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출소한 후, 1936년 6월 기쁨사 동인 최순애와 결혼했다. 한성당 건재약방의 서기로 잠시 근무하다 함안금융조합 이사 김정완의 도움으로 1937년 함안금융조합에 복직하게 된다. 문제는 이 금융조합에 입사한 것이 이원수의 생애에 불명예를 안기게 된다.
광복 이후:
이원수는 광복 이후, 경남 함안군 가야면 치안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글강습소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1945년 10월 경기공립공업학교사로 취직하였고, 12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에 가입했다. 1945년 2월 8일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 통합하여 결성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 당시 좌익계열의 '새동무'와 '아동문학', 우익계열의 '소학생'에 모두 참여하여 좌우익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즉, 이원수는 좌파와 우파 모두 넘나드는 중도파로 분류되는 문학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점 때문에 이원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국민보도연맹에 반강제로 가입해야 했고, 우익 문학단체인 '한국문학가협회'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1947년 10월에 경기공립공업학교 교사직을 사직하고, 박문출판사의 편집국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동시집 '종달새'가 '새동무'에서 간행되고, 동시 '송화가루 날리는 날', '삘기', '바람에게'와 소설 '새로운 길', '눈 뜨는 시절' 등을 발표했다.
전쟁 발발 이후:
이원수가 40세의 나이였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가지 못하고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까지 경기공립공업학교에서 사무를 보게 된다. 당시 북한군에게 점령된 서울에서는 점령지의 주민을 소집해 놓고 인민재판을 진행하며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당시 경기공립공업학교의 교장이자 첫째 동서였던 고백한(高白漢)을 집에 숨겨 보호하였다.
1951년 1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대공세로 인한 1.4 후퇴 때 피난과정에서 차녀·3녀·3남을 잃어버리게 된다. 피난지인 경기도 시흥군 논곡리에서 영국군 부대에 노무자로 뽑혀 동두천에서 1년간 천막생활을 하게 된다.
1952년 대구로 이동해 아동월간지 '소년세계'를 창간하고 주간으로 일했다. 1953년 창작집 '오월의 노래'와 '숲 속 나라'를 신구문화사에서 간행하였고, 1954년 한정동과 함께 아동문학회 창립에 참여하여 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56년에는 아동 월간지 '어린이 세계'의 주간을, 1958년에는 자유자유문학가협회 아동문학 분과위원장을 지냈으며, 1959년에는 서울시 문화위원회 문학분과위원을 지냈다. 1960년 삼화출판사 편집장을, 1965년에는 경희여자초급대학 강사를 지냈다. 1968년 시 '고향의 봄'을 기리는 노래비가 경남 마산시 산호공원에 건립되었고, 같은 해 창작집 '메아리 소년'이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판되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
‘민들레의 노래’ ‘메아리 소년’ ‘호수 속의 오두막집’ 등 반전(反戰)메시지를 담은 작품과 ‘땅속의 귀’ ‘어느 마산 소녀의 이야기’ ‘벚꽃과 돌멩이’ 등 4.19혁명의 민주주의 의식을 담은 작품, ‘토끼대통령’, ‘명월산의 너구리’, ‘잔디숲의 이쁜이’ 등 독재정치를 비판한 작품을 썼다. 또 전태일 분신 사건 때는 의로운 죽음을 의인동화에 담은 ‘불새의 춤’을 발표했다. 이후 1978년을 전후해서는 계몽사에서 발간한 소년소녀 시리즈(소년소녀 세계위인전집,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소년소녀 세계동화전집 등)의 감수를 담당했다.
아동문학에 많은 공헌으로 '고마우신 선생님상'과 한국문학상 등 각종 상을 받았는데, 그만큼 그는 '아동문학계의 거성'이었다. 1979년 11월에 갑자기 구강암이 발병하여 1981년 1월 24일에 별세했다. 장례 후 용인공원묘지에 시신을 안장했다.
1984년에 대한민국의 1등급 문화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1984년 서울어린이대공원에 그를 기리어 문학비가 건립되었고 경상남도 양산시에 고향의봄로가 명명되었다. 또한,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경상남도 창원시에는 위 문단에 적힌 것처럼 산호공원에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는데, 고향의 봄을 쓴 곳이 바로 이 용마산 앞 오동동의 주택가 골목 하숙방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을 거쳐 1970년대까지 활발히 활동한 아동문학가였기 때문에 작품도 상당히 많고, 동시, 동화, 아동소설, 위인전, 수필 등 장르도 다양하다. 활동 시대도 넓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1950, 60, 70년대의 사회 및 생활상이 작품 속에 다양하게 녹아 있다는 것도 특징할 일이다. 1983년에 웅진출판에서 이원수의 작품을 모두 전집으로 출간한 적이 있는데, 무려 30권의 분량이었다.
친일행위 논란:
이원수는 아동문학계의 거성으로 어린이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문학인이었다. 그리고 이념도 중도적인 노선을 띠었던 인물이며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문학모임인 함안독서회에서의 활동으로 체포되어 부산과 마산에서 투옥되는 등 민족운동에도 참여하였으나, 2002년, 일제강점기 말 전시체제 때 내선일체에 관한 글 5편을 기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오점을 남긴 탓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정작 대한민국 정부에서 오랜 연구와 조사를 통해 공식 발간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며, 친일인명사전 문서에서도 언급되듯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문제가 많은 시민단체의 일방적인 비공식 서적이기도 하고, 당시 문학가들의 친일 행적을 야마구치 요시코(중국명 리샹란)가 했던 그것과 같다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전두환 시절에 '아 대한민국' 같은 건전가요를 부른 정수라의 사례와 비슷하다 보아야 할지, 혹은 일종의 강제징용이거나 북한 김씨 왕조 치하 연예인의 경우와 유사하다 볼 수 있는지는 개별 문학가들의 행적에 대한 더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되었듯 이원수 본인은 일제강점기 당시 여러 항일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다수 관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친일 관련 행보들은 당시 식민지 시대상 감시나 박해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 기고 자체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후 2011년 이원수 선생의 유족들은 친일행위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으며, "아버지를 비난하더라도 일제의 압박을 받던 당시의 어려운 상황도 고려해주면 좋겠다."라는 소망을 밝혔다.

약력:
아호: 동원(冬原). 1912~1981년. 경주 이씨. 경남 양산 출생. 성호초등학교. 마산동중학교. 마산용마고등학교. 창원시. 인물구강암 사망. 수상: 대한민국예술원상. 금관문화훈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