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함축적 언어의 탄환이다
배우식
시인은 어둠속에서 빛의 세계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어둠속에서 어둠의 살을 보지 않고 어둠의 살을 낱낱이 해체하여 그 속에 감추어진 빛의 뼈를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이다. 어둠의 살이 아닌 빛의 뼈를 원료로 하여 언어의 탄환을 만드는 사람이 시인이다. 언어의 탄환은 밀도가 조밀할수록 폭발력은 더욱 커진다. 시인은 오직 혼자서의 힘으로 이 탄환을 함축적 언어로 만들어 사람들의 가슴을 향하여 쏘아 올리는 것이다.
두 모녀 전철 안에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소리 없어 더 눈부신
상처 어르는 저 손의 말
꽃잎을
다 떨어뜨리고
숨 돌리는
손가락
― 김영주, 「수화(手話)」 전문
김영주 시인의 시조, 「수화(手話)」의 폭발은 따뜻하고 환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시를 해석한다는 것은 시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속에 감추어진 의미와 정서적 울림을 찾아내는 행위이다. 시인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조용하며 다정하다. 「수화(手話)」의 초장에서 ‘대화’라는 언어가 시인의 시적 문법 속에서 ‘꽃’으로 용도변경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시 해석의 출발점은 바로 이 용도변경 된 두 모녀가 ‘이야기꽃’을 피우는 지점이다. 전철 안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두 모녀의 첫 인상에서 우선 이들이 고통과 상처가 없는 시적 아름다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니체가 “시인의 형상들은 ‘그’ 자신에 지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다채로운 객관화 혹은 대상화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두 모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시인 그 자신의 형상이자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자아일 것이다.
손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은 소리가 없어 더욱 눈부신 것이다. 극단의 눈부심은 표현이 짧아야 더욱 눈부시게 된다. 시조가 길어지면 자칫 의미가 장황해지고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시인이 의도한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김영주 시인은 이미 이 모두를 알아차렸는지 시조를 단수로 짧게 설정하여 감동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한다.
손은 심장이고 마음이다. 천 마디의 말보다 상처를 어르는 따뜻한 손의 말이 고통을 훨씬 잘 씻어주고 위로해주는 것이다. 두 모녀가 소리 없이 나누는 언어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다가온다. 고요하지만 웅장하게 들려오는 시적 언어의 울림이 매우 크다.
손가락 끝에서 만발한 이야기 ‘꽃’은 어느새 그 꽃잎을 다 떨어뜨린다. 꽃잎을 다 떨어뜨리고 숨 돌리는 ‘손가락’의 평화로운 종장을 읽으며, 시조가 어떤 의미 이상의 맛있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두 모녀의 수화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풍경이다. 이런 제재는 자칫하면 진부함과 상투성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인 특유의 시적 문법으로 극복한다. 김영주 시인의 「수화(手話)」는 작품을 전개하는 방식이 깊고 참신하여 울림이 매우 크다. 「수화(手話)」는 밀도 있는 언어와 깊은 상상으로 공감을 자아낸 눈부시게 환한 작품이다.
쑥잎 쑥덕공론을 한 푼도 셈하지 않고
쑥부쟁이, 쑥 비탈을 쑥물인양 들이켠다
나는 예, 앉아 있건만 버섯 따는 저 손 누구냐
감자바위 잔솔나무 솔버섯 나던 자리
대신한 아파트를 하모니카 부는 바람
아무리 흐느낀다 해도 버섯 끓는 장국만 할까
할머니 양은솥에선 솔새 우짖었는데
양념 변변찮아도 솔밭 우거졌는데
쑥, 뽑힌 아파트에는 쫑긋 솟는 노래가 없다
― 서정택, 「버섯장국」 전문
현대시조는 노래방식에서 읽기 텍스트로 진화 발전해나가고 있다. 따라서 시조의 언어는 사전적 의미의 객관적 언어를 시인의 문법 속에서 주관적으로 재구성하여 의미를 확장시켜 새로운 시적 언어로 창조하여야 한다. 이런 면에서 서정택 시인의 시조 「버섯장국」의 언어는 새로운 인식과 의미로 새로운 시적 언어를 창조해낸 개성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시조 작품의 수준을 평가하는데 강조되곤 하는 독자성과 창의성은 다름 아닌 개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개성이 넘치는 「버섯장국」은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생각의 진정성과 상상의 깊이가 또한 그 수준을 말해준다.
세 수로 구성되어 있는 「버섯장국」은 각 장과 장 사이를 벌려놓아 형식적인 여백미는 물론 의미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시조에 있어서의 여백이란 침묵을 뜻하는데, 장과 장 사이에서 말하지 않음으로 더 많은 말의 의미를 담는 것이 여백이다. 시인은 여백을 의도적 시적장치로 도입하여 많은 울림을 주고자 한다.
첫째 수에서의 ‘쑥잎’은 아파트가 들어서는 지역에 사는 민초들의 은유이며, ‘쑥덕공론’은 그들의 생각과 여론을 말하는 것이다. 난폭한 개발현장에는 항상 힘없는 쑥잎 사람들의 의견과 사정이 무시되는 것이 현실이다. ‘쑥 비탈’을 쑥물을 들이켜듯 쉽게 파괴하는 것을 보고 화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들끓는 슬픔 혹은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감정을 억누른 채 언어를 감추고 그 뜻을 숨김으로써 긴장감을 극대화하여 결국 시의 미학을 성취한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고도의 시적 전략이 행간에 스며있다. 화자는 ‘나는 예’ 앉아 있건만 ‘버섯 따는 저 손 누구냐?’하고 폭력적 개발을 일갈한다. 감정을 쏟아내며 소리 지르는 언어보다 훨씬 무겁고 울림이 크다. 절제미가 돋보이는 첫째 수의 종장이다.
둘째 수의 초장은 감자바위 잔솔나무 솔버섯 나던 자리,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그야말로 천연의 자리이다. 자연을 밀어내고 인공의 자리에 들어선 네모난 구멍의 하모니카 같은 아파트를 그때 그 바람이 돌아와 불고 흐느껴도 ‘버섯 끓는 장국만 할까?’하고 화자는 신음하듯 언어를 토해낸다.
셋째 수에서는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을 상상하며 ‘우짖었는데’와 ‘우거졌는데’의 반복적 문장으로 아쉬운 마음을 강도 높게 표현한다. 다 헤아릴 수 없는 환경파괴를 질타하는 화자의 시적 언어가 공감으로 전해온다. ‘쑥’이 뽑힌 아파트에는 ‘쫑긋 솟는 노래가 없다’라는 종장은 매우 다의적이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언어들을 아우르고자할 때 애매성은 탄생한다. 현대 생활은 복잡하고 애매하기 때문에 시인은 애매성을 추구한다. 이 애매성은 의미가 불분명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애매성이 클수록 시적인 미감은 더욱 증가한다. 영미의 신비평가인 웰리엄 엠프슨은 이 ‘애매성’을 ‘다의성’의 의미로 사용한다. ‘의미의 겹침’과도 일맥상통한다.
「버섯장국」에서 가장 돋보이는 시어는 단연 ‘쑥’이다. 시조 창작에서 경계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같은 말의 반복을 배제한다. 그러나 서정택 시인은 의도적으로 ‘쑥’이라는 시어를 여섯 번이나 사용해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쑥’이 주는 리듬감으로 이상하고도 묘한 매력을 주는 것은 물론 시조 전체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서정택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시적 언어의 운용이다.
현대시조의 앞장에서 현대시조를 현대시조답게 창조해나가는 서정택 시인은 다의적 시조미학을 실현하며 시조가 나아갈 방향성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또한 시인은 일상적 어법을 비틀어서 진실에 닿으려는 창작방법으로 실험적 시조 쓰기에도 열성을 갖고 있다. 이런 시조는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로잡는다. 시인의 시조는 작품마다 맛있는 시적미감을 갖고 있으며 또한 시적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시인들 중에 두드러진다. 우리가 서정택 시인을 주목해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늘줄기 잎을 벌려 간구하듯, 비손하듯
끝끝내 말하지 못할 명치 끝 응어리 남아
진초록 절개도 접고 훗날 다시 기약한다.
잎 진 자리 울대 뽑아 꽃등 하나 켜 드는가
허우대 멀쩡한데도 열매 없는 내시란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홀로 삭인 긴 속울음
그르친 제 발길을 어찌, 어찌, 되돌릴까?
시간을 어긋놓아 시샘하는 가이아여
상사화 묵언수행에 그리움만 달무리진다.
― 정평림, 「목울대 세운 상사화」 전문
현대시조는 인간의 감정이 다양하듯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 시조의 표현방식은 비논리적 언어를 사용하여 비논리적으로 시인 내부의 감정을 발설한다. 이때 시인의 언어는 함축을 향하여 달려간다. 치밀한 말의 밀도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평림 시인의 「목울대 세운 상사화」의 언어들은 버릴 것 하나 없이 함축적이다. ‘잎 진 자리 울대 뽑아 꽃등 하나 켜 드는가’에서 보듯이 하나의 음보에 두 개의 의미를 결합시켜 의미를 확장시켜나간다. 시조 기법의 하나인 잘게, 잘게 썰어 쓰는 방식으로 언어의 밀도를 조밀하게 만든다. 정평림 시인이 즐겨 쓰는 좋은 시조 창작법이다.
상사화의 비늘줄기에서 올라온 잎은 꽃이 피기전인 6월경에 없어진다. 화자는 그 시점에서 상사화를 만난다. 넓고 긴 잎이 마치 두 손으로 간구하고 기원하는 형상은 시인 내면의 모습이기도 하다. ‘꽃’을 피워달라는 소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고 끝끝내 말하지 못할 응어리로 남는다. 여기에서의 꽃은 여러 가지 의미로 유추할 수 있다. 화자의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이루고 싶은 꿈일 수도 있다. 화자의 의식을 상사화에 투사시켜 에둘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은 꿋꿋한 태도와 함께 접고 다음을 기약한다. 부드러운 화자의 시적태도는 그 어떤 강함도 이겨낼 수 있는 엄숙함마저 느끼게 한다. 다수 시인들의 시적태도와 차이나는 부분이다. 이 차이가 정평림 시조의 새로움과 고유함으로 각인시킨다. 부드러움을 더욱 부드러움으로 밀착시키는 시인은 그래서 더욱 훌륭한 시인이다. 시인의 나이나 성격 등을 아는 것은 시조 해석하는데 중요하다. 시인은 어감은 항상 포근하고 자애롭다. 보름달의 어감을 갖고 있다. 따라서 화자의 어감도 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시조 평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깊이’이다. 시조의 깊이를 재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나 시인의 고뇌와 다른 시인의 작품과 변별되는 정신의 경지가 느껴질 때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시조를 읽는 사람마다 그 ‘깊이’의 편차가 발생할 수 있으나 정평림 시인의 시조는 함축을 통한 긴장된 언어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상당히 깊은 수준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화자는 아무것도 없는 잎이 진 자리에도 울대 뽑아 꽃등을 단다. 화자는 등불을 켜서라도 어두움의 세계를 밝히고 싶은 것이다.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까지도 밝히고 싶은 것이다. 밝힘은 기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끝내 그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내시처럼 서럽지만 속으로만 울며 그 울음을 삭이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걸어온 제 발길을 되돌리지 않겠다는 화자의 의지를 땅의 여신인 ‘가이아’가 시샘하더라도 화자의 은유인 상사화는 묵언수행을 계속한다.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하는 그런 그리움에 젖는다. 화자의 그리움의 깊이는 달무리가 말해준다. 달무리가 있으면 비가 올 징조임을 화자는 알고 있다. 비는 곧 울음으로 의미 전환을 일으킨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시적 분위기의 달무리를 등장시켜 화자의 감정을 절제하는 세밀하고도 성숙된 내면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시조는 이렇게 하나의 시어로 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정평람 시인은 이미 이 점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정평림 시인은 한편의 시조를 통하여 자신 앞에 놓인 세계와 존재를 탐구한다. 한 편의 시조를 통해 삶의 실상을 꿰뚫어보고 성찰한다. 정평림 시인은 높은 정신을 갖지 않으면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시적 경지에 오른 것이다.
쪽빛 하늘 바라보다
괜스레 웃음난다
저게
만약
툭 터져서
쏟아져
내린다면
싸울 일
진짜 없겠네!
온 누리가
청군이니
― 변현상, 「쪽빛 하늘 바라보다」 전문
시조 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외부로 분출하는 행위이다. 내면에 응집된 생각 등을 최소한의 언어로 되살려내는 것이 시조 쓰기의 근본 태도이다. 이로부터 시조의 미감이 발생한다. 여기에는 감정의 소란스러움과 구질구질한 신파를 정화해가는 쾌감이 있다.
변현상 시인의 시조, 「쪽빛 하늘 바라보다」는 감정의 과잉이 없는 맑고 투명한 쪽빛 시조이다. 단수의 짧은 시조이지만 동심 같은 상상력이 발동한 「쪽빛 하늘 바라보다」는 묘한 매력을 던져준다. 화자는 하늘을 보며 상상한다.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면 싸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상상하며 웃는다. 이렇듯이 시조의 표면적인 의미해석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의미를 확장하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온 누리가/청군이니’의 시적 언어 속에는 우주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 남과 북 혹은 보수와 진보처럼 이분화 되어 대립된 세계의 모든 것들이 싸우지 않고 모두 청군인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변현상 시인의 시적 세계관은 보다 넓고 큰 우주적인 하나 됨에 있음을 확장된 의미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의미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시 감상의 목표가 의미해석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해석 이상의 그 무엇에 도달해야 한다.
변현상 시인의 「쪽빛 하늘 바라보다」는 ‘쪽빛 하늘’을 바라보는 한 순간의 상상을 초점화 하고 있는 시조이다. 이와 같은 시조는 아주 적은 양의 언어로 단숨에 진술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시각적인 언어 배치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변현상의 시조 「쪽빛 하늘 바라보다」는 의미와 리듬감이 함께 살아 있는 깨끗한 쪽빛 시조이다.(*)
약력:
2003년 《시문학》 등단.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시조) 당선.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시집 『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 시조집 『인삼반가사유상』 외 다수. 중앙대문학상, 조운문학상, 시선문학대상 등 수상. 작품 「북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각각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