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복과 삐딱모자

조회 수 40 추천 수 0 2025.02.07 05:51:31

세라복과 삐딱 모자 / 유경순

여학생은 하얀 포플린세라복에 검은색 플레어스커트를 입었다. 삼각형 노랑 비닐 이름표를 달았다. 이름은 영희다. 왼쪽 가슴에 학교 배지도 달았다. 빨간 네모난 학교 가방을 들었다. 표정이 쭈뼛쭈뼛한 남학생은 파랑 반소매 셔츠에 검은 통바지를 입고 있다. 검은 바탕 흰색 글씨로 된 이름표엔 철수라고 씌어있다. 회색 가방은 옆구리에 찼다. 모자만 쓰면 등교 준비 끝이다. 국화꽃이 파인 바랜 은빛 테가 둘린 거울 앞에서 이리도 써보고 저리도 써보다 뒤에 서 있는 여학생을 향해 씩 웃으며 돌아선다. 빳빳이 앞을 세운 모자가 삐딱하다. 35도쯤 기울었다. 영희와 철수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다. 변두리에 있는 학교 가는 길은 봄엔 양쪽에 초록 모가 심어지고 가을엔 누렇게 익은 쌀 벼가 고개숙인 사잇길이 있다. 초여름 논둑 고인 물속에 뭉글뭉글 뭉쳐있는 개구리알 들은 신비감을 느끼게 했다. 알에서 깨면서 올챙이가 되어 논 속에 있는 물속을 헤엄쳐 다닌다. 영희와 철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여름방학이 될 무렵이면 작은 개구리들이 길가에 올라와 팔짝팔짝 뛰어다니고 했다. 개굴개굴하면서 여름을 알리고 있다.

하늘엔 새털구름이 땅 위로 떨어질 듯한데 그 사이로 햇빛은 따갑다. 멀리서 기차가 오는 듯 기적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칙칙! 폭폭! 영희와 철수는 철길 위에 양쪽으로 올라서서 한쪽 다리를 들고 뒤우뚱 거리며 양손을 잡는다. 철 둑길 양쪽 길에 피어난 낯익은 들꽃들과 철 이른 코스모스가 딸랑거리는 교차로 옆에서 구색을 갖추듯이 서 있다. 길옆에는 파란색 포니 택시가 반짝반짝 광을 내고 서 있다. 꿈에도 그리던 자동차다. 택시 앞에서 허리에 손을 대고 포즈를 잡는다. 자동차 앞에서의 사진은 백만 불짜리 사진이다. “한방 박아 주세요" 철컥! 카메라 셔터 소리에 완전 기대가 된다. 길 건너엔 원색으로 그려놓은 여주인공의 섹시한 몸매가 뭇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예고편 극장 간판이 보인다. 상영 중인 <고교 얄개>를 보러 종이 티켓을 끊어 영화관에 들어간다. 천진난만한 모습의 고교생 이승현의 모습은 천상 삐딱 모자 철수의 모습과 똑같다. 극장에 접혀있는 빨간 의자는 푹신하면서도 기분 설레게 하는 흥분을 느끼게 한다. 새로운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짓궂은 얄개들의 모습에 가슴이 쿵쾅쿵쾅 댄다. 모처럼 발을 구르면서 낄낄댔다. 회춘하는 시간이다. 영화가 끝나니 갑자기 허기가 밀려온다. 유리 진열대 속에 맛있는 빵과 도넛이 보이는 <만나 제과점>에 들어가 앙꼬 빵을 시켜놓고 앉았다. 어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추억 여행을 했다. 오십 년 전으로,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아직 갈길이먼 추억 여행 이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힘이 빠지다니! .

 8월 중순 3 복날이 막 끝났는데 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세계 기후변화로 인하여 기온 이상이었던 올해다. 10년 만에 한국방문을 했다. 항상 설레는 것이 여행이지만 한국 방문은 여행이라기보다 명절날 고향을 찾는 기분이 된다. 마음이 들떠서 며칠 밤을 설쳤다. 한국 도착 후 38년 만의 신혼여행지였던 제주도에 갔다.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들과 만나고 싶고 한국에서만 느꼈던 소중했던 순간들을 한국에서 느끼고 싶었다. 하늘에서 보이는 제주도는 나의 꿈속에 있던 것과 똑같았다. 노란 유채꽃과 웅장했던 용머리 바위는 살짝 바뀌었지만 내가 만나는 제주도 바람은 변함이 없었다. 가이드의 안내로 1970년대를 재현해 놓은 추억 속으로의 명소를 찾았다. 입장권을 사는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잊어버린 고향을 보는 느낌이었다. 골목길에 늘어선 잡화점들과 동네 레코드 집에서 흘러나오는 코끝 찡한 ‘타향살이’ 노래는 추억여행 내내 배경음악이 되어 주었다.

 

”하하 여보 인제 그만하자" 숱 없는 흰머리가 빳빳이 세운 모자 아래에 땀이 흥건하게 나고 물 찬 제비 꽁지같이 되었다. 흰머리만 없으면 삐딱하게 쓴 모자는 영락없이 말 안 듣는 중학생 철부지다. “당신은 아직도 여고생티가 나는구려! 공주병이 발동한 내가 듣고 싶던 말이다. 세월이 50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여고생티가 난다고 하니 거짓말이지만 기분이 괜찮았다. 나의 고향은 관광 지역 이어서 학교 규율이 심했다. 시장을 갈 때도 꼭 교복을 입어야 하고 머리는 귀밑 1cm이었다. 학생과장 선생님은 얼마나 읍내를 훑고 다니셨는지 월요일 조회 시간에는 사복 입다가 걸리는 애들이 그 큰 운동장 풀 뽑기로 벌을 섰다. 그때는 그렇게 교복 입는 것이 싫었고 무슨 우리를 조이는 것같이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사복 입는 것이 멋있어 보이던 시절이었다. 지금서야 깨닫게 된다. 교복을 입으면 관광지에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학생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들 하셨다. 안전이 첫째라고 생각하셨던 우리들의 선생님들이셨다. 그만큼 우리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느냐가 지금도 중요함을 느낀다. 제주도에서 맛본 흰머리 두 학생의 추억여행이었다. 가끔 세월 속에 너무 빨리 사라지는 추억이 아쉽기는 하지만 누구한테나 시간은 흐르고 있는 것이지 묶어둘 수는 없다. 세라복과 삐딱 모자의 기억이 얼마 동안 열일곱 살의 순수함으로 남아있을까! 잘 간직하고 잊지 말고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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