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내 생일
유경순
쌀가루 같은 눈발이 누런 잔디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섣달그믐 닷새
새 달력 위에 그어진 빨간 동그라미는
황혼으로 넘어가는 석양의 가느다란 테두리 같다.
서서히 떨리며 빛을 잃어간다.
딸만 내리 셋, 막내딸
십 년 터울 딸들이 엄마 설움, 엄마 애처로움
장손 집 손 끊겼다는
매서운 시모의 한마디는 야릿한 엄마의 몸짓에
알 수 없는 힘이 나게 했다.
내가 지킬 거야!
머리엔 빨간 꽃 리본
초등학교 시절 내 머리 꽃 리본을 잡아당긴 같은 반 머슴애를
혼내 주던 우리 엄마의 낮지만, 힘 있던 목소리.
‘다음에 또 그러면 정말 혼난다.’
그때부턴 남자애들이 나를 공주 모시듯이 했다.
생일날엔
열 살까지 인절미를 해주면 시집가서 잘산다는 말을
굳게 믿어오신 우리 엄마
우린 해마다 인절미를 의미하며 먹었다.
습자지 같은 커다란 벽 달력에
동그라미 쳐진 딸들의 생일,
엄마의 붉은 손으로 그려진 동그라미는 우리의 기다림이기도 했다.
소고기미역국, 기름 발라 구운 김, 흰 쌀밥, 조기 한마리, 그리고 인절미
최고의 밥상 앞에서
우리 세 자매는 꼭 부모님께 절을 올렸다.
이순을 터벅터벅 걷는다.
오늘은 내 생일
탁상 달력에 그린 동그라미 앞에서, 오늘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세월은 달력에 관심도 없고
돌고 도는 음력의 날은 알 수도 없지 않은가!
올해 엄마 생일은 며칠이지요
엄마 늦지 않게 꼭 얘기해 줘야 해
평생을 갖고 살아온 내 생일날
그믐달이 차가운 공기 속에 뿌옇게 보일 듯말 듯하다.
엄마의 입김이 훅하고 내 가슴속에 밀려온다.
잠시 울컥!
오늘 저녁엔 미역국이나 끓여야겠다.
<시작 노트>
팬데믹이 막 끝나던 2021년 내 생일이다.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치고 내 생일을 맞는다. 남편은 가게에서 일하고 딸은 맨해튼 오피스에서 너무 바쁘고 아들은 캐나다 토론토에 출장을 갔고, 마음이 약간 서운했지만, 며칠 후인 양력 생일로 날짜를 바꾸어서 공포를 했다. ‘내일이 엄마 생일이다.밥먹자.’ 이젠 생일을 양력으로 바꾸어서 지내고 있다. 남편도 아이들도 일정한 날짜라서 스트레스 안 받는다나? 핑계 같지만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