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의 즈려밟음, 시집 ‘진달래꽃’ 100주년
한국 근대시를 열어젖힌 ‘기적 같은 사건’
-유려한 운율과 친근한 일상어로 서정시의 전범 마련
-문학관도 기념행사도 없는 쓸쓸한 현실은 안타까워
100년 전인 1925년 우리 역사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우선 3월23일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이었다. 국내에서는 4월17일에 조선공산당이 창당했고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이 결성되었다. 좌익 정치 운동과 문예운동을 표방한 두 단체는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1928년과 1935년에 각각 해산했다. 해가 저물기 직전인 12월26일에는 김소월(1902~1934)의 첫 시집 ‘진달래꽃’이 출간되었다. 그러니까 올해는 ‘진달래꽃’ 출간 100주년이 되는 해다.
최초의 신체시로 꼽히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것이 1908년이었다. 시인 단체와 출판사 등은 2008년 각종 행사와 기념 출판 등으로 ‘한국 현대시 100년’을 기린 바 있다. 그러나 문학사가들과 평론가들은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한국 현대시의 출발점으로 삼는 데에 회의적이다. 이 작품은 전통 시가와 현대시 사이의 중간 지점에 놓일 뿐 시의 현대성에 미달했다는 판단에서다. 그보다는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을 한국 현대시의 조종(祖宗)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데에 많은 전문가가 동의한다. 원로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김소월을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 시인”으로 꼽았고, 문학평론가 정과리도 “한국의 근대시는 1925년에 출현하였다”는 말로 시집 ‘진달래꽃’ 발간의 문학사적 의미를 평가한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시집 ‘진달래꽃’ 사이에는 17년의 시차가 있다. 그사이에 김억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와 최초의 개인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1923)를 필두로 박종화·주요한·변영로·조명희·김동환의 시집이 나왔고, 1926년에는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전문가들은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 두 시집이 한국 현대시의 문을 활짝 열었다는 데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이 두 시집과 이전의 한국 시 사이에 해명을 요하는 일종의 ‘문학사적 단절’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되고 나서 불과 십수 년 만에 ‘님의 침묵’ ‘진달래꽃’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향수’ 같은 모국어 걸작들이 태어난 것은 생각할수록 기적 같은 사건이다.”(염무웅)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1920년대 김소월, 한용운의 시적 성취에는 동시대 시인의 가시적 혹은 잠재적 기여가 적지 않았다”며 시인들 사이의 상호 모방과 영향의 가능성을 짚지만, 염무웅은 “그들(=김소월, 한용운)의 업적은 그 시대 우리 시문학의 수준이 낳은 것이 아니라 그들 천재적인 개인의 우발적 소산으로 보인다”며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 ‘진달래꽃’ 출간에 즈음한 신문 광고에서 소월의 스승 김억은 “우리 시단 생긴 이래의 가장 큰 수확”이라며 제자의 작업을 상찬했다. 이후 소월의 시들은 한국 서정시의 뚜렷한 전범을 이루었고, 문인들과 일반 독자들의 사랑을 아울러 받았다. 김소월은 한국시인협회가 선정한 한국 현대시 10대 시인 중 1위로 뽑혔고(2007년), ‘진달래꽃’은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가 평론가 75명의 설문을 받아 선정한 한국 대표 시집 중 역시 1위를 차지했다(2012년). ‘진달래꽃’은 2011년 현대 문학 서적 가운데에서는 처음으로 등록문화재(제470호)에 오르기도 했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 표지. 1925년 12월26일 매문사에서 나온 이 시집은 판매처에 따라 한성도서 총판본과 중앙서림 총판본으로 나뉘며 두 판본은 표지 디자인과 제목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사진은 한성도서 총판본 표지. 엄동섭, 소명출판 제공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 표지. 1925년 12월26일 매문사에서 나온 이 시집은 판매처에 따라 한성도서 총판본과 중앙서림 총판본으로 나뉘며 두 판본은 표지 디자인과 제목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사진은 한성도서 총판본 표지. 엄동섭, 소명출판 제공
그렇다면 ‘진달래꽃’의 어떤 매력이 100년의 세월 동안 독자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그 가장 큰 비결로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운율과 일상적인 어휘를 든다. 문학평론가 이남호는 “소월 시의 매력은 우선 운율에서 온다. (또) 그는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쉬운 우리말로 시를 지었다”고 평가했다. 김소월의 많은 시는 7·5조 또는 6·4조를 기반으로 삼는 정형률로 쓰였다. ‘진달래꽃’의 도입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나,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라는 ‘못 잊어’ 도입부 등이 대표적이다. 운율과 함께 시의 리듬감을 살리는 반복,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진달래꽃’)나 “차마 받지 다 못할 한과 모욕을”(‘물마름’)과 같은 절묘한 도치, “그리워 미친 날도 그런 때러라”(‘비단 안개’)나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가는 길’)에서 보이는 어미의 유려한 활용, “새라 새로운 환희를”(‘밭고랑 위에서’) 같은 참신한 표현 등은 말을 다루는 소월의 빼어난 감각을 보여준다.
주제의 측면에서 소월의 시를 요약하는 세 낱말은 임과 집과 길이다. “임 없음과 집 없음과 길 막힘을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노래했다.”(유종호) 앞서 인용한 ‘진달래꽃’이나 ‘못 잊어’ 같은 작품부터가 임과의 이별을 다룬다. “꿈에도 생시에도 눈에 선한 우리 집/ 또 저 산 넘어 넘어/ 구름은 가라”로 끝나는 ‘우리 집’, 또는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라는 ‘길’의 마지막 연 등에서 화자는 집을 떠나거나 길을 잃은 상태에서 방황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실 소월 시에서 임과 집과 길을 잃어버린 상실의 경험과 감정은 서로 구분하기 어렵게 한데 버무려져 있으며, 그런 인간의 보편적 정서가 친근한 언어와 가락에 얹혀 노래된다는 점이 소월 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소월 시가 멀게는 백제의 ‘정읍사’와 고려 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민요의 정서와 가락을 물려받았으며 그것이 소월 시의 대중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별리의 슬픔, 먼 곳에 있는 임에의 연가, 그리고 인간 상정(常情)인 회한, 이렇게 비근하고 보편적인 생각이 그의 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시에 대해서 별다른 조예가 없는 사람들이 ‘시란 이런 것이다’ 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시의 개념과 딱 들어맞는 것이 소월의 시 세계다.”(유종호)
소월 시의 이런 소극적·부정적 감정주의를 두고 원로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소월의 슬픔은 말하자면 자족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의 해결이 된다. (…) 그것은 자기 연민의 감미로움과 체념의 평화로써 우리를 위로해준다”고 비판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겨레가 식민 통치의 탐학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줄기차게 사랑의 상실을 읊조린 소월의 시에는 현실 도피라는 혐의가 따라붙기도 한다. 그러나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이나, 시집 ‘진달래꽃’ 이후에 발표한 ‘옷과 밥과 자유’ 같은 작품들은 식민 체제의 질곡과 궁핍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도 한다. 작고한 국문학자 김용직은 소월 시 ‘초혼’에 그가 번역한 두보의 우국 시 ‘춘망’(春望)의 흔적이 뚜렷하다며 “그렇다면 여기서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애정의 범주에 그치는 이성일 리가 없다. 그와 달리, 그것은 국가, 민족의 의인 형태로 해석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 관점을 더 넓혀 보자면, 임과 집과 길의 상실을 노래한 소월의 모든 시가 국권 상실기 겨레의 아픔과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소월의 대중적 인기를 말해주는 가장 뚜렷한 지표라면, 그의 시를 가사로 삼은 노래의 숫자를 들 수 있겠다. 소월 시와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연구해온 구자룡 시인에 따르면 소월 시 가운데 무려 60편이 노래로 만들어졌고 그것을 300명이 넘는 가수가 취입했다. 가곡을 제한, 대중음악에 국한한 집계다. 국민 동요라 할 ‘엄마야 누나야’를 비롯해 마야의 ‘진달래꽃’, 정미조의 ‘개여울’, 서영은 곡 ‘부모’, 송골매 배철수의 데뷔곡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밴드 라스트포인트의 노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가곡과 가요로 각각 만들어진 ‘못 잊어’ 등 제목만 들어도 곧장 입에서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들이 숱하다. 지난해 12월31일 만난 구자룡 시인은 “김소월 시는 정형률로 되어 있어서 노래로 만들기에 편하다는 게 우선 장점”이라며 “시의 내용과 정서도 특정 시대나 상황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서 지금도 꾸준히 노래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문단과 학계, 출판계에서 ‘진달래꽃’ 100주년과 관련한 별도의 기념행사 소식이 들리지 않는 현실은 아쉽기만 하다. 소월 시를 이용한 뮤지컬 ‘어제의 시는 내일의 노래가 될 수 있을까’의 공연(1월7~26일)만으로는 아쉬움이 달래지지 않는다. 한동안 운영되던 소월시문학상은 2013년 제28회 시상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문인의 이름으로 된 학회나 기념사업회, 문학관이 여럿이지만, 소월과는 유독 인연이 멀다. 지금 소월의 흔적이라면 몇 개의 동상과 시비(시를 새긴 비석)가 전부인 형편이다. “한국 시 1천년사에 드문 조숙한 천재”(염무웅)로 평가받는 김소월. 그의 이른 죽음은 여전히 명쾌하게 해명되지 않은 채 여러 설이 맞서고 있다. 지난해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위상이 한껏 높아진 한국 문학이 그 성과를 딛고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국민 시인’ 김소월과 시집 ‘진달래꽃’ 100년에 합당한 관심과 대우가 요구된다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