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길성 시인

조회 수 3252 추천 수 3 2018.03.31 15:27:49


                                                              허기져 목 메인 다감한 것들의 기척


                                                                                                             정우영(시인)
 


  1.
  외로움이나 슬픔, 어둠 같은 그늘이 시에서 지나치게 드러난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움찔, 움츠려든다. 동시에 혹 엄살 아닐까 하는 경계가 작동되면서 의심의 눈초리가 열린다. 참으로 외롭거나 슬픔 속에 잠긴 자라면, 그 그늘조차 어둠 속에 잠길 거라 여겨서 그럴 것이다. 게다가 시인들이 좀 엄살쟁이들인가.
  그래서 나는 시의 겉에 드러나 있는 그늘은 그늘로 보지 않는다. 나를 통과한 현실이 눈을 넘어 들어가 마음에 가라앉아야 그늘이라 보는 것이다. 시의 그늘이라면 모름지기 마음에까지는 드리워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시의 그늘을, ‘심연의 그늘’이라 일컬으며 어떤 벽을 쳐두고는 한다. 내가 만일 그늘에 관한 시를 쓰고자 할 경우, 심연의 그늘까지는 가닿아야 한다고. 뭘 그렇게까지, 하고 의문을 가질 이가 혹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세상을 한번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자본주의의 탐욕이 얼마나 극렬하게 인간들을 닦달하고 몰아세우고 있는지 보시라고. 자기소외에 내몰리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그러니 어중간한 감상성(感傷性)으로 어찌 시에 감동이 감기겠는가. 어림없다. 이렇게 쓰인 시들은 마음의 파문은커녕 어설픈 변죽이나 울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인간 삶의 내면적 혼돈과 질서를, 그늘의 시정으로 포획하려는 자는 달라야 한다. 내 식으로 표현하면 그는, 현실의 시안을 열어 저 심연의 그늘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 몸의 현실을 바탕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현실을 잊거나 버리고 내면에 들어가 만나는 심연은 공허하다. 무엇을 진하게 본다 한들 다 헛것의 세계이다. 자칫 잘못하면 내면을 왜곡하여 스스로를 크게 망가뜨릴 수도 있다. 실제로 이렇게 들어갔다가 내면에 갇혀 돌아오지 못하고 오히려 현실을 차단해버린 이들 더러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차라리 시에서 그늘을 걷어차 버리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어쩌랴. 생래적으로 음지를 앓고 있고, 현실적으로 온갖 간난신고(艱難辛苦)의 두려움들을 넘어서야 하는 시인들 적지 않으니. 이들은 숙명처럼 비우고 채우고 하면서 오랫동안 심연의 그늘에 머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2.
  나는 조길성의 시도 그늘 쪽에서 읽었다. 하지만 왠지 버거웠다. 시가 고여 드는 게 아니라 처연한 감상성에 젖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허어, 하는 헛바람이 자꾸 새들었다. 그의 시에서 직감적으로 무언가 다른 울림을 감지했으나, 글로 풀자니 자꾸 꼬였다. 그가 내보이는 시의 겉에 자꾸 미끄러지자 드디어는 이렇게 생각했다. 엄살인가. 곤혹스러움에 헤매고 있을 때, 그의 페이스북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접했다.
 “새벽에 일어나 앉아서 잠들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도 사방벽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도 내 방이 이리 낯설어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순간, 그제까지의 내 모자란 평석(評釋)이 아프게 접질려왔다. 그가 아니라 나였다. 내 고집스런 그늘관이 시의 겉을 훑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시에게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다만 그의 시를 내게로 끌어다 놓고 그저 들여다보고 있었을 뿐.
  저와 같은 도저한 자폐의 존재감을 느껴보지도 못했으면서 그의 시를 내 경험으로만 재단하고 있었다니. 등허리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면서 나는 그의 글귀를 거듭 읽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없었는데도 낯선 내 방”, “어둠 속에서도 땀을 흘리고 있는 사방벽”이란 얼마나 철저하게 모멸적인 이질감이란 말인가. 그가 흘리는 저 눈물이 내게서 처연한 감상성을 벗겨내자, 그로부터 인간 존재에 관한 근원적인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 흐느낌은 오래지 않아 잦아들고 먹먹한 시적 장면들이 차츰차츰 나를 채워왔는데 맨 처음 다가온 시가 「허기」였다. 울음을 말리는 데에는 먹거리가 제격이라는 것인가. 나도 갑자기 국수를 말고 싶어졌다.


오늘은 귀로 국수를 먹습니다 바람국수를요 바람이 키운 아이가 국수를 말고 있습니다 굶어죽은 사람의 마지막 숨결이 고명으로 얹혔네요 누군가 어깨 들먹이며 울먹이는 국수 흐느끼는 국수 한숨으로 울음으로 뜨거워진 국수를 먹습니다 내 안에 사는 허기라는 이름을 가진 짐승은 다리가 코끼리를 닮았고 대가리는 쥐를 닮은 놈이 배창새기가 흰고래수염만큼 커서 그 허기가 말도 못하여 저승 윗목에 부는 바람같이 막을 길이 없습니다 국수를 먹습니다 불치의 국수를 집 없는 국수를 문이 없어 꽉 막힌 국수를 팔다리 잘리고 몸뚱이로만 굴러다니는 불구의 국수를
                                                                                                        — 「허기」 전문


  허기를 끄는 데 국수보다 빠른 먹거리는 없었다. 그래서 국수는 가난한 자의 주요 양식이었다. 국수 삶는 냄새만 맡아도 허기가 달래지는 때가 있었다. 이 시의 국수는 어떨까. “누군가 어깨 들먹이며 울먹이는 국수 흐느끼는 국수 한숨으로 울음으로 뜨거워진 국수.” 흐느낌에 더하여 울음까지 그득해진 느낌이다. 게다가 “굶어죽은 사람의 마지막 숨결이 고명으로 얹”히기까지 했다. 이런 국수라면 허기를 꺼뜨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가파르게 허기를 피워 올릴 것 같다. 이뿐 아니다. “불치의 국수, 집 없는 국수, 문이 없어 꽉 막힌 국수, 팔다리 잘리고 몸뚱이로만 굴러다니는 불구의 국수”라니. 차라리 거부하는 게 나을 듯싶다. 허기를 피하려다 허기에 잡혀 먹혀버리지 않을까. 그도 이렇게 말한다. “내 안에 사는 허기라는 이름을 가진 짐승은 다리가 코끼리를 닮았고 대가리는 쥐를 닮은 놈이 배창새기가 흰고래수염만큼” 크며 “저승 윗목에 부는 바람같이 막을 길이 없”다고. 이쯤 되면 허기가 아니라 괴물이다.
  그런데 가만, 그가 그린 저 형상을 조심스레 떠올려보자. 왠지 짠하지 않는가. 좀비나 흡혈귀처럼 무지막지한 괴물체로는 보이지 않고, 어쩐지 덩치 큰 가여운 짐승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봐야 한다. 이 ‘허기’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가 국수로도 끄지 못하고 이토록 허겁지겁 굶주려 하는지.
  나는 그의 시 「식구」를 소환하고자 한다. 허기와 식구는 어딘가 모르게 상보적이지 않은가. 식구를 만나면 저 허기라는 짐승도 어쩐지 꺼질 것만 같은 것이다.


식구라는 말이 그리워 옥편을 들추니 밥식에 입구라고 쓰여 있다.
밥 먹는 입 밥 먹는 구멍 밥 먹는 아가리


거지엄마가 거지새끼들을 새끼줄에 묶어 주렁주렁 끌고 가는 걸 본 적이 있다
새끼줄을 왜 새끼줄이라 부르는지 그때는 정말 몰랐다


온 세상 숟가락 부딪는 소리 가득한 저녁 문득 새끼줄 맨 끄트머리에라도 매달려 따라가고 싶다
                                                     — 「식구」 전문


  나는 그가 ‘가족’이라는 말 대신에, ‘식구’라고 쓰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로 보건대 그가 바라는 곳은 그냥 집이 아니다. ‘함께 밥 먹는 사람’인 식구가 있는 곳이다. 식구, 하면 어떤 풍경이 떠오르는가. 한 밥상에서 함께 밥 먹으며 나누는 온기 아닌가. 그는 이 온기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다들 일마치고 들어와 맞는 “온 세상 숟가락 부딪는 소리 가득한 저녁”, 외로운 허기로 사무치는 그는 한 가족을 떠올린다. “거지새끼들을 새끼줄에 묶어 주렁주렁 끌고 가”던 거지엄마 가족이다. 당시에는 거지엄마가 끌고 가는 새끼줄이 단순히 짚으로 꼰 새끼줄인 것으로만 알았으나, 그는 이제 깨닫는다. 그 줄은 엄마와 새끼들 간에 이어진 피와 밥의 탯줄이었음을. 그 장면을 회상하며 그는, “새끼줄 맨 끄트머리에라도 매달려 따라 가고 싶”지만, 되돌릴 수 없다. 그는 이미 그 시절을 지나와버린 것이다.
  허기를 끄고자 식구를 찾았는데, 그는 혼자이다. 혼자라니, 그 외로움까지 더해져 허기는 더욱 커지는 것 같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혼자 먹는 ‘혼밥’에, 혼자 마시는 ‘혼술’, 혼자 사는 ‘혼방’이 유행처럼 번지는 세태에 식구의 부재가 뭐 그리 대수냐고. 혼밥이나 혼방을 선택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이들에겐 언제든 돌아가 같이 밥 먹을 식구들이 있다. 이들은 다만, 그 현실을 잠시 유보하고 있거나 그 현실을 벗어나고자 스스로 뛰쳐나온 것이다. 시에서 그가 부딪치고 있는 부재감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에게는 돌아가 수저질 함께 나눌 시공간이 없다. 현실 속에서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것이다.
  식구가 부재하니 허기는 강렬해지고 사태는 난감해졌다. 어떻게 해야 이 부재감을 지우고 허기도 꺼뜨릴 수 있을까. 현실에서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 그가 기댈 데는 어떤 가상현실 아니면 회상일 것이다. 그의 시 「다녀오겠습니다」에 그 바람들이 담겨 있다. 그가 그리는 시공간이 어떤지 「다녀오겠습니다」로 들어가 보자.


볕 좋고 바람 또한 좋아
나무그늘에 앉았는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두리번거려도
보이는 이 없는데
이번에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빈 병이 울고 있는 거였다
어떤 사연을 지녔기에 이 바람은 여기서 빈 병을 울리고 있나
 
다녀오겠습니다
이 말을 해본 지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에
빈집에 대고 다녀오겠습니다
중얼거린 적 있다
누군가 다녀오겠습니다 하던
꽃잎처럼 저문 그 말씀이
울고 있는 건 아닐까
                                  — 「다녀오겠습니다」 전문


  이 시에서 그는 가상의 실재를 산다. 빈집인데도 혼자가 아니다. 혼자이되 여럿과 함께인 삶이다. 보라, 나무그늘도, 울고 있는 빈 병도, 빈 병을 울리고 가는 바람도 있지 않은가. 이들은 나와 교감하는 객관화된 실체들이다. 빈 병의 흐느낌이 곧 자신의 흐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사물은 사물일 뿐, 입김도 나눌 수 없고 말로 전하는 안부도 물어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제로 “빈집에 대고 다녀오겠습니다 / 중얼거”려 본다. 받아줄 사람 없어도 실제처럼 행동해 보는 것이다. 그럴 때,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그의 소리가 그에게 어떻게 돌아올까. 울음의 이명처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되돌이치지 않을까.
  나는 저 빈 병의 울음이 바로 이와 같을 것이라 짐작한다. “누군가 다녀오겠습니다 하던 꽃잎처럼 저문 그 말씀”이 바람의 자극을 받아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메아리지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궁금해지는 이는 저 ‘누군가’이다. 맨 처음 저 ‘누군가’는 빈집과 연관된 그 ‘누군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누었던 인사인, “다녀오겠습니다”가 빈 병의 울음을 넘어 그에게 인식되었을 때, 그 ‘누군가’는 더 이상 남이 아니다. “꽃잎처럼 저문 말씀이 / 울고 있는” 저 ‘누군가’에는 나의 ‘서러운 그리움’이 스며들어가 있는 것이다.
  저 ‘누군가’와 함께 관심 기울여야 하는 대상이 바로 ‘빈 병’이다. ‘비어 있는’ 저 빈 병이야말로 그의 허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저 빈 병의 울음에서 그가 흐느끼는 허기를 듣는다. 허기의 흐느낌은, 따라서 저 ‘누군가’의 ‘서러운 그리움’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허기를 끄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를 반드시 찾아가야 한다.
  이때 내게 퍼즐의 열쇠처럼 「자연은 자꾸 냉정해만지고」 속 시구절들이 스쳐지나갔다. “누가 배고프다 하면 허벅지를 베어 피 뚝뚝 흐르는 살을 건네주던 손”과 “몸 허물어져서야 빛나는 집 이제 이 집도 비워야겠지요”라는 시행이다. 저 “손”과 “몸”이 사라지기 전 살았던 집, 그 집을 찾기만 하면, 빈집의 허기를 채웠던 그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이를 만나러 회상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몸살을 앓아야 한다. 이는 허기에서 비롯된 몸살이기도 하고, 더 리얼한 과거 속 현재를 재현하기 위한 의례로서의 몸살이기도 하다. 물론, 시 「몸살」의 회상 속 정황도 몸살의 현장이다.


햇살이 풀 먹여 잘 다려놓은 모시이불을 닮았다
문틈으로 향긋한 약 달이는 냄새가 새어 든다
누워 있지 왜 나완
마당 귀퉁이 돼지우리 곁엔 진흙 바른 간이부뚜막이 있다
이젠 패독산 한 첩이면 감기도 정나미가 떨어져 구만 리는 달아날 게다
당목저고리에 수목치마 정갈한 가리마가 먼 길 떠나실 차림 같아 서글펐다
대가리와 꼬리를 떼어낸 통통한 콩나물에 갱엿을 얹어 아랫목에 덮어두면
콩나물이 명주실처럼 가늘어졌다
그 국물을 마신 게 어젯밤 일인 것 같은데
한약을 먹으려면 속이 허하면 안 되지
할머니 말씀 때문인지 연기 때문인지 눈이 쓰려왔다
수수께끼를 하나 내랴
골백번도 더 들어 달달 외운 그 문제가 난 참 좋았다
층디층 로디훙 츠디 라
만주족 말인데 젊어선 푸르고 늙어지면 붉고 입에는 맵다
소주잔을 비운다
된장에 고추를 찍어 씹으니
입에는 맵고 눈이 붉어온다
                                                             — 「몸살」 전문


  여기는 어디인가. 할머니와 그가 함께 식구로 살던 집이다. “마당 귀퉁이 돼지우리 곁엔 진흙 바른 간이부뚜막이 있”는 걸로 보아 도심은 아니며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한 것 같지도 않다. 몸살 앓는 그에게 할머니가 ‘패독산’과 갱엿을 달여 먹이려 하는 걸로 연상해볼 때 상당히 오래전인 어떤 날의 정경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목저고리에 수목치마 정갈한 가리마가 먼 길 떠나실 차림 같아 서글펐다”는 구절이 복선으로 깔려, 지금 여기에 할머니가 부재함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과거가 현재로 재생된 듯 선명하게 포근하다. 할머니와 주고받는 만주족 말 수수께끼마저도 실감나게 들린다. 소주잔을 비우면서 그는 현실로 돌아오지만, 할머니의 살내 나는 품안 같은 저 집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그의 귀에는 여전히 “층디층 로디훙 츠디 라” 만주족 말, 잔잔하게 떠 있을 것이다.
  이로 보아, 이제 ‘누군가’의 정체를 대략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시 속에 나오는 손자인 그가 유력하다. 하지만 나는 특정하고 싶지 않다. 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한 뒤 사라져버린 그의 아버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찾아 나서긴 했지만, 나는 그 ‘누군가’를 굳이 하나의 대상으로 굳힐 필요는 없다고 여긴다. ‘누군가’는 그냥 그 ‘누군가’로서 족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회상 속 존재로 머물다가 찾아가는 이를 따라와 현재에서 재생되는 그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그리움은 마냥 설레지 않는가.
  ‘누군가’는 그렇다 치고, 그러면 ‘허기는?’ 하고 궁금해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몸살」에도 그 기미가 드러난다. 이 시에는 여타 시와는 다른 느낌이 들어 있는데, 그게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북방정조로의 귀소’쯤으로 불렀음 직한 안타까운 몸부림과 그것이 파생시킨 어떤 ‘시림’이 그것이다. ‘할머니의 부재에 따른 시린 그리움’이라고 표현해야 마땅할 이 정서적 울림은 통증처럼 아리고 아늑하다. 이 시린 그리움이 그에게 시적 에너지로 작용하기도 할 텐데, 그는 어쩌면 이 원초적인 갈망 때문에 뼛속 깊이까지 더 시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점으로 보면, ‘이 시린 그리움’은 그가 꿈꾸는, 저 북쪽 추운 곳, 함경도라든가 만주라든가 하는 땅이 그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생각도 든다. 그가 끊임없이 원초적 본향인 그쪽을 향해 허기의 영혼을 졸이자 이에 대해 그 땅이 응답한 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자, ‘허기’에 관한 탐색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고 있다. 이것의 정체도 굳이 토설해야 할까 싶은 것이다. 나는 참으려 하는데 당신은 어떠신지? 나와 함께 부디 그러셨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마음속에 그림자로 가라앉은 어떤 것들, 배고픔, 식구, 울음, 그리움 등등 그 모든 것들이 다 그가 허기져 하는 것들의 목록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허기져 하는 것들의 목록이 어우러져 서로의 허기를 메워주려 혹 손잡아주지 않을까. 
  이를테면 시 「성님성님하면서 눈이 내릴 때」의 조모 시인과도 같이.


입춘 추위가 매섭던 새벽 차비도 없이 눈 속에 갇혀버린 광명하고도 사거리에서 헤매다 찾은 조모 시인의 고시원


성님 시원한 물 쪼까 드셔 이 방 저 방 다니며 담배도 얻어 와서 성님 담배 잠 피워 보드라고잉 앗따 차비라도 구해얄 텡게 또 이방으로 저 방으로 돌아친다 성님 전철비가 천오백 원잉께 버스비가 팔백오십 원 이제 이천사백 원이면 갈 수 있제 성님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에 백동전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손에 쥐어준다 성님 참말로 미안하요 라면이라도 한 봉지 끼려 드려야는디 주머니 먼지밖에 가진 게 없어라 맨발로 따라나서며 우린 입춘의 눈발을 맞는다 성님 봄 되면 나가야지라 일거리도 많을 테고라 방도 얻어야지라 성님 도다리 좋은 놈 잡아 회도 쳐 묵고 찌개도 끼려 감서리 소주도 한잔 찌끄리고잉


새봄엔 광명한 햇살이 내리실라나 광명사거리에 눈 내린다 성님성님하면서.
                                                                                                            — 「성님성님하면서 눈이 내릴 때」 전문


  조길성의 시가 그늘과 허기를 지나 찾아든 곳이 바로 여기다. 나는 눈물겹게 저 고시원의 조모 시인을 만난다. 저 조모 시인, 혹은 자신의 분신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한들 또 어떠랴. 따뜻함이 이렇게 충만한데. 자본주의사회는 끊임없이 인간들에게 돈 벌어라, 돈 써라, 몰아세우고 닦달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루저(loser)라는 이름의 소외 딱지를 붙인다. 그러나 조모 시인에게는 이쯤 대수롭지 않다. 자신에게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는가. 속으론 어쩔지 몰라도 겉으로 보이는 조모 시인은 대단한 낙천가다. 성님성님하는 그에게, 허기와 결핍은 세를 펼치지 못한다. 나는 그가 세파에 주눅 들지 않고 “광명한 햇살이 내리”시는 광명에서 새봄에도 여전히 성님성님하면서 살아갈 거라고 믿는다. 
  이 시는 조길성 시의 미래를 예감케 한다. 감동 실린 울림이 여러 갈래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늘과 허기가 그의 중요한 자산이라고 해도, 더러는 이 시처럼 천연덕스러운 낙천성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 시는 회상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현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점이 무척 중요하다. 그의 발이 세상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회상보다는 상기, 상기보다는 리얼한 현재에 더 눈 두길 바란다. 아픈 과거를 잊으라는 게 아니다. 상기를 통해 과거를 여기로 가져오고 그 가져온 과거로 현재를 쓰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그가 좀 더 심하게 ‘몸살’을 앓아야 할까. 선택 쉽지 않아서 나는 은근슬쩍 그에게로 밀친다. 알아서 하시오 하고.


  3.
  그의 시 「몸살」에 내가 전염된 것일까. 여러 곳이 으슬으슬 시리다. 시려서 곱은 손을 잠시 조물락거리고 있다. 그는 어쩌다 이렇게 허기진 시들을 꺼내놓게 되었을까. 시린 손 조물락거리면서 자문한다. 드문드문 들었던 그에 관한 말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간난신고에 접질렸다는 전언들이다. 전언들이 다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그럴 법하다고 시린 귀가 말한다. 그는 또래보다 더 험한 역정을 헤쳐 온 것 같아, 시린 눈이 말한다. 시 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들이 그렇게 떠오른다면서. 흠, 그렇다면 이 시집은 간난신고에 관한 허기진 마음의 기록으로 읽어야 할까. 시린 이를 감싸며 혀가 문장을 가다듬는다. 에이, 그러면 재미없지. 시를 왜 그렇게 규정하려고만 해. 속내를 들킨 것처럼 화끈거린다. 그러자, 시림이 한풀 가셨는데, 무슨 언어유희처럼 시림이란 말이 다른 시림을 끌고 들어온다. 시림(詩林), 시의 숲이다. 허기는 벗고 그의 시를 다시 생각해 봐. 시의 맘이 요청하고 있다. 그래, 하고 답한 뒤 조길성의 시림으로 다시 들어선다. 시림의 그늘에서 아무 생각 없이 머물고 싶다.


KakaoTalk_20180330_021019016.jpg


조길성
과천출생
2006 계간 창작21 시부문 신인상
2010 시집<징검다리 건너/문학의 전당>

<나는 보리밭으로 갈 것이다./도서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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