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창민 기자

조회 수 794 추천 수 2 2019.08.01 19:10:13

                                                길상도서관과 다라니다원

 

                                                                                                                                           백창민

 


길상사 범종.jpg


 

길상사(吉祥寺) 이야기는 '요정 대원각'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길상사의 전신이 요정 대원각이므로. 대원각은 한때 삼청각, 청운각, 오진암, 한성, 회림, 옥류장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요정으로 꼽혔다.

 

대원각 주인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그 철학에 감화받아 1995년 대원각 건물과 땅을 시주했다.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 길상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대형 요정이 사찰로 바뀐 흔치 않은 사례여서 당시에도 큰 화제였다.

 

사찰로서 길상사의 역사는 짧다. 하지만 시민을 위한 선원과 템플스테이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 갖춘 '도심 사찰'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서울시는 2013년 길상사를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밀실 정치의 산실, 요정의 흥망성쇠

 

말 나온 김에 '요정' 이야기를 더 해 보자. 요정의 대명사 '명월관'이 광화문 네거리 황토현(지금의 일민미술관 자리)에 문을 연 것은 1903917. 명월관은 궁중 연회 때 음식과 기생 제공을 도맡을 정도로 유명했다.

 

요정은 손님 옆에 술시중 드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점에서 음식점과 다르다. 해방 전에는 권번 출신 기생이 한복을 입고 시중들면서 노래와 춤으로 술자리 흥을 돋웠다. 명월관 외에도 국일관, 송죽관이 이 시기 요정으로 유명하다.

 

191931일 민족 대표 33명 중 29명은 '유혈 충돌을 피하기 위해' 탑골공원 근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읽고 만세삼창을 했다. 민족 대표가 독립선언을 하고 경찰에 연행된 태화관 역시 유명 요정이다. 태화관은 요정으로 바뀌기 전 친일파 이완용이 살던 집터다.

 

해방 후 요정의 풍경은 사뭇 달라진다. 권번에서 교육받은 기생은 사라지고, 술자리에서 시중드는 화초기생과 접대하는 호스티스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194612월 명월관 같은 일부 고급 요정이 퇴폐 도색 영화를 상영하다가 경찰로부터 무기한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해방 후 요정은 더욱 번창해서 1947년 서울에만 무려 3천여 개가 넘는 요정이 있었다. 1947년 한복남의 히트 가요 <빈대떡 신사>는 요정에 관한 세태를 풍자한 노래다.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 앞에서 매를 맞는데 /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어 / 들어갈 땐 폼을 내어 들어가더니 나올 적엔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 뒷문으로 도망가다 붙잡히어서 매를 맞누나 매를 맞는구나 / 으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습다 에헤헤헤 우습다 우화화화 우습다 /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빈대떡 신사> 가사에 나오는 '요릿집', '기생집'이 바로 요정이다. 요정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 한국전쟁 때 후방 군인의 요정 출입이 잦자 육군 참모총장이 '장병의 요정 출입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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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백석 백기행

 

군부 시절에도 이어진 요정의 인기


길상사 요사채 요정으로 쓰인 길상사는 수많은 별채가 있다. 지금은 기도처와 요사채로 쓰이지만, 요정 시절 밀실 야합과 향응이 펼쳐지던 현장이다. ‘요정 공화국대한민국의 과거를 증언하는 곳이기도 하다.

 

1960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쿠데타는 행동 개시 5시간 전 정보가 미리 새서, 요정 '은성'에서 회식 중이던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에게 보고된다. 은성에 있던 장도영은 안이한 대처를 하는데, 그 때문인지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한다.

 

5.16쿠데타 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민정 이양에 대비해 비밀리에 민주공화당 창당을 준비한다. 김종필은 대학교수와 강사를 창당 요원으로 선발, 19624월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중앙정보부가 창당 요원 교육을 실시한 곳은 종로구 낙원동의 요정 춘추장이다. 요정이 정당 탄생의 산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요정 춘추장이 있던 건물은 해방 직후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이 본거지로 쓰던 곳이다. 길상사 전신인 대원각도 남로당을 이끈 박헌영과 관계 깊은 요정으로 알려져 있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은 대원각 실제 소유주가 박헌영 일가였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1970317일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승용차에서 숨진 정인숙은 고급 요정 선운각 출신 호스티스다. 그녀가 남긴 세 살 아들이 최고 권력자 자녀라는 소문 때문에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1970년대 삼청각은 한꺼번에 500-6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초대형 요정을 개업한다. 개업식에 이후락 부장을 포함, 중앙정보부 요원 50여 명이 참석했고 인기 연예인이 대거 출동했다. 중앙정보부는 요정에서 오가는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미림'이라는 팀을 따로 뒀다.

 

산업화 시대 요정은 밀실 접대와 밀실 정치의 온상이었다. '요정 정치'라는 말도 이때 등장한 말. 기생관광이라는 '외화벌이'를 위해 국가는 요정 산업을 적극 양성했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관광공사의 전신 국제관광협회에 '요정과'를 설치, 관광기생에게 접객원 증명서를 발급해서 통행금지 상관없이 호텔을 출입하며 일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11개 대형 요정 업체에 총 20억 원을 특별융자로 지원한다. 외국 관광객용 지도에 요정 위치를 다국어로 상세히 표시해 '기생관광'을 적극 장려하기도 했다. 누구 말처럼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였다. 사창가라 불린 집창촌과 함께 요정은 한국 섹스 산업의 한 축이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요정 수는 870여 개에 이르렀다. 이후 강남 룸살롱에 밀려 수가 줄기 시작해서 한정식집 등으로 변모했다. 대원각, 삼청각 같은 대표적인 요정도 1990년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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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각 주인 김영한

 

모던보이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


시인 백석 평안북도 정주 출신 백석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며 시인으로 데뷔한다. 조선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함흥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그는 운명적인 사랑, 진향(자야 김영한)을 만난다.

 

자산 가치 1천 억대였던 요정 대원각이 사찰로 바뀌는 과정은 흔치 않은 이야기여서, 요정 대원각 주인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다. 요정 대원각 주인 김영한(金英韓)은 젊은 시절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져 더욱 유명했다.

 

19127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난 백석(白石. 본명 백기행白夔行)은 정주의 명문 오산학교를 나왔다. 정주는 조선 시대 가장 많은 과거 급제자를 낳은 인재의 요람이다. 남강 이승훈이 19071224일 세운 오산학교는 김소월의 스승 김억이 교편을 잡고, 고당 조만식과 벽초 홍명희가 교장을 지내고, 시인 김소월이 졸업한 명문이다.

 

화가 이중섭과 소설가 황순원, 사상가 함석헌도 오산 출신이다. 192935일 오산고보를 졸업한 백석은 정주 출신 사업가 방응모의 도움으로 19304월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영어사범과에 입학한다. 공교롭게 백석이 일본 유학 시절 머문 하숙집 주소가 도쿄 기치조지(吉祥寺) 1875번지다. 기치조지를 우리 발음으로 읽으면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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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상사 도서관

 

19343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백석은 19344월부터 방응모가 인수한 <조선일보> 교정부에서 기자로 일한다. 기자 시절 시인으로 데뷔, 1936120일 그의 유일한 시집 <사슴>을 출간한다. 백석의 시집 <사슴>은 출간되자마자 많은 시인을 매료시켰을 뿐 아니라 후대 시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윤동주는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시절 <사슴>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다가 19378월 학교 도서관에서 <사슴>을 겨우 빌려 그 자리에서 필사했다. 이렇게 필사한 <사슴>을 윤동주는 끼고 살다시피 했다. 백석이 통영 출신 아가씨 박경련을 마음에 품은 시기도 이때다.

 

19364월 경성을 누비던 '모던보이' 백석은 <조선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 생활을 시작한다. 함흥에서 백석은 권번 출신 기생 진향(眞香)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진향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그는 진향을 자야(子夜)라고 부르며 아꼈다. 자야는 이태백이 당시(唐詩)로 남긴 동진(東晉) 여인 '자야 이야기'에서 따온 아호. 19374월 백석은 마음에 둔 박경련과 절친 신현중의 결혼 소식을 듣고 깊이 상심하기도 했다.

 

1937년 겨울 백석은 함흥에서 경성으로 향했다가 부모의 강요로 결혼한다. 상심한 자야에게 백석은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으로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하지만 자야는 거부하고 홀로 경성으로 향한다. 경성으로 떠난 그녀에게 여러 달 만에 백석이 찾아와 연인은 재회한다. 다시 만난 그가 함흥으로 떠나면서 그녀에게 쥐어준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19391월 백석은 함흥 교사 생활을 접고 경성으로 돌아와 <조선일보>에 재입사한다. 이 무렵 백석은 청진동 자야 집에서 1년 남짓 함께 살았다. 19392월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돌아온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 신징으로 떠나자는 제안을 다시 하지만 그녀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19402월 백석은 홀로 신징으로 향한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을 두 사람은 알았을까. 한국전쟁 후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두 연인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영영 만나지 못한다.

만주에서 살며 백석은 간간이 시를 발표한다. <흰 바람벽이 있어>는 이때 발표한 시. 1941년 백석은 신징에서 안둥(安東)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즈음 그는 피아니스트 문경옥과 결혼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43년 안둥 세관에서 일할 무렵 백석은 시라무라 기코(白村夔行)로 창씨개명한다. 백석은 일본 이름과 일본어로 작품을 쓰거나 남기진 않았다. 해방 이후 남한 문단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만주 시절 쓴 작품이다.

 

해방과 분단 이후 백석의 행적

 

해방 후 백석은 고향 정주로 돌아온다. 정주에 있던 백석은 오산학교 스승 조만식의 요청으로 평양에서 통역비서로 그를 돕는다. 19451229일 백석은 평양에서 리윤희와 결혼했다.

 

북조선에서 김일성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조만식을 돕던 백석의 입지도 좁아진다. 한동안 침묵하던 백석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 건 1947년부터다. 조선문학예술총동맹 4차 중앙위원회에서 그는 외국문학 분과위원을 맡았다. 백석이 러시아 문학 번역에 주력했던 시기도 이때다.

 

한국전쟁 포화가 휩쓰는 동안 백석은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한다. 한편 백석의 연인 자야는 김숙(金淑)이라는 가명으로 부산에서 요정을 운영한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그녀는 신익희, 조병옥, 이범석 같은 정치 거물이 드나드는 사교장으로 자신의 요정을 키웠다.

 

전쟁이 끝나고 1956년 백석은 동화시를 발표하고 아동문학 평론도 시작한다. 1948년 발표한 시 이후 8년 만이다. 1957년 북한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중 백석은 아동문학 논쟁에 휘말리며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된다. 그해 10, 그는 아동문학 토론회에서 혹독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195810월 이후 백석은 문학 활동을 중단하다시피 한다.

 

19591월 백석은 현지 파견 임무를 받고 평양을 떠나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관평협동조합으로 향한다. '삼수갑산'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바로 그 삼수다. 삼수군에 내려간 이후에도 백석은 1962년 상반기까지 꾸준히 시와 산문을 발표한다. 196210월 북한에서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면서 작품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후 백석은 농사일을 하며 지냈다. 19961월 백석은 삼수군 관평리에서 84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

 

한때 '모던보이'로 불리며 촉망받던 시인 백석. 그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백석에 대한 방대한 평전을 쓴 안도현은 '시인으로서 그의 말년은 행복하지 못했지만, 자연인으로 생을 마친 그의 삶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다'고 했다. "삶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므로."

 

월북 문인으로 남한에서 조명받지 못한 백석은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시전집>이 출간되고, 북한 문인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으로 재평가 받는다. 우리 문학사에서 '잊힌 시인' 백석은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자야 김영한은 성북동에서 요정 대원각을 다시 이어갔다. 한때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북한산 3'이라 불리며 거물이 드나드는 대표적인 요정이었다. 1995년 자야는 대원각 부지 7천여 평 땅과 40여 채 건물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다. 19971214일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난다. <내 사랑 백석>이라는 자서전을 펴낸 김영한은 창작과비평사에 2억 원을 기탁, '백석문학상' 제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시인의 연인은 19991114, 8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한겨울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내 뼛가루를 길상사 마당에 뿌려 달라."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나타샤는 그녀를 생각하는 그를 향해 갔나 보다.

 

길상도서관과 다라니다원

 

길상사에는 도서관이 있는데, 흔치 않은 사찰 도서관 중 하나다. 사찰과 도서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불교와 함께 한 우리 역사가 길다 보니, 사찰은 책이 전해진 또 다른 공간이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를 일반 대중이 공부하고 수련하는 절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길상도서관'을 세우고 개방했다.

 

도서관에 있는 장서도 무려 3만 권. 작은 규모 공공도서관에 육박하는 장서량을 자랑한다. 불교 서적뿐 아니라 일반 단행본도 함께 갖추고 있다. 도서관에는 입적 후 낙양의 지가를 흔든 법정 스님의 절판된 책이 전시되어 있다. 도서관은 책을 '사유'하지 않고 '공유'하는 공간이다. '무소유'를 갈파한 법정 스님 책이 도서관이라는 공유 공간에 있는 건 퍽 어울린다. 백석과 자야, 법정 스님 모두 책을 사랑하고 뛰어난 글솜씨를 자랑했다. 이들의 사연이 깃든 길상사에 도서관이 있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인연'일지 모르겠다.

 

길상사는 20161227일 도서관을 리모델링해서 북카페 '다라니다원'을 만든다. 저렴한 가격에 커피와 음료를 즐길 수 있고 365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다라니다원이 문을 열면서 길상도서관은 쉼터와 카페, 도서관 기능을 가진 복합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혹자는 사서 없는 다라니다원을 도서관이 아니라 할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이곳은 사랑이 시가 되고, 그리움이 전설이 되고, 한 권의 책이 기적을 만든 공간 아닌가.

 

자야 김영한은 대원각을 시주하면서 수많은 여인이 웃음을 팔기 위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이 종소리 울려 퍼지는 공간으로 바뀌기를 바랐다. 그녀의 소망처럼 대원각 여인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은 종루(범종각)로 바뀌고, 향응과 야합의 무대였던 수많은 별채는 기도처로 바뀌었다.

 

길상사 다라니다원 근처 자야의 유골이 뿌려진 곳에는 길상화(吉祥華) 공덕비가 서 있다. '길상화'는 요정 대원각이 길상사로 문을 연 그날, 자야 김영한이 법정 스님으로부터 염주와 함께 받은 법명. 길상화 공덕비 앞에는 그녀의 사연과 함께,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새겨져 있다.

 

그 많은 재산을 시주한 게 아깝지 않냐는 세인의 물음에 길상화가 이런 말을 남겼다 했던가.

 

"천억이 백석의 시 한 줄보다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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