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순옥의 수필세계|
값진 인생과 문학의 향연에
이명재
(중앙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글을 쓰고 문학을 통해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 일은 축복이요 행운이다. 재미 수필가 정순옥씨 부부와 필자는 문학으로 반갑게 만났고 이내 동지처럼 친숙해졌다. 내 시골의 동창 박정규 벗과 이어진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닐 만큼 좋은 인연이라 생각한다. 덕분에 첫 옥동자로 펴내는 수필집에 이렇게 축사와 추천사 겸 작품 소감을 적는 이 자리 또한 보람되게 여겨진다.
정순옥 수필가는 첫인상부터 현모양처의 밝은 인상으로 와 닿는다. 본디 한반도 남쪽의 전북 내륙지방 소쿠리 마을에서 8남매 중 막내따님으로 태어난 귀염둥이여서일까. 순박하고 여린 듯 다정다감하되 효성과 우애 가득한 심성으로 이민생활을 즐겁고 억척스럽게 이겨내고 열심히 사는 분이다. 이런 주인공의 품성이나 생활 모습은 그의 여러 글 속에 그대로 점철된 채 드러나 있다.
이민자 문인의 겹경사
광주에서 간호사로 직장생활을 하던 중 결혼한 주인공은 한동안 어린 아들을 시부모님에게 남겨두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L.A.인근병원에서 근무하며 따님 둘을 더 낳아 키워냈고 또 8년 동안 연거푸 미국간호사 시험에 도전하여 기어코 R.N.자격증도 따냈다. 현지 대학교수로서 그야말로 디아스포라적인 가정살림을 뒷받침한 부군의 노고 역시 짐작되고 남는다. 더구나 가사와 시험, 직장 일에 시달리는 틈틈이 글을 써내서 문인으로 입신한 정순옥 수필가의 노력은 박수갈채를 받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일인다역을 감당해낸 정순옥씨는 열여섯 번 응시 끝에 기어코 값진 미국자격증을 얻어낸 체험기로서 1989년에 현지 중앙일보 창간 15주년기념 공모에서 우수작으로 뽑히어 글 솜씨를 인정받는다. 그리고 2003년에는 현지의 한글문예 동인지에 어릴 적 어머니의 얼레빗 회상기로 신인수필 부문에 당선된 것이다. 이후 미주에서 발행되는 문예지에 수필작품을 발표해 오던 주인공은 2009년 모국의 중심수필지에도 정식 당선절차를 마쳐 당당한 문인으로서 본 궤도에 오른 것이다. 이처럼 각박한 해외이민 현장에서 반생토록 고생하면서도 한사코 모국어를 통한 글로써 자아를 추스르며 일상의 삶에서 ‘산소를 공급 받는’ 주인공의 자세는 가상하기 그지없다.
마침 금년으로 인생의 소중한 화갑을 맞아 첫수필집을 펴내는 터라 더욱 뜻 깊다. 그것은 실로 이민생활 삼십 년을 살아온 당사자의 감회에 그치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삼십 년을 지낸 데 이어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나이테를 해외에서 겪으며 쌓아온 보람을 찾는 기록은 통과의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면에서 이번 수필집은 정순옥 인생의 중간평가서이며 진솔한 고백이요 고마운 이웃과 그리운 이승, 저승의 임들을 향한 사랑의 노래이다. 그리고 오늘까지 많은 은혜를 베풀어준 창조주와 자연 및 조국에 대한 고마움은 물론 자기반성과 소박한 미래의 소망을 담은 기록으로서 우리의 관심을 모은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 및 친지들과 더불어 정순옥 수필가의 뜻 깊은 첫 수필집 출판과 새로 거듭날 연륜만큼 값진 회갑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리고 이렇게 문학과 인생의 향연에 모처럼 자리를 함께 한 동향의 문학도로서 그의 작품 세계와 성향에 대한 소감을 참고삼아 밝혀두고자 한다. 한국과 미국, 사회일상과 문학예술의 경계 선상에서 고뇌하며 가끔은 향수에 젖는 주인공과 더불어 독자 여러분에게 다소라도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정순옥 수필의 향기
필자는 정순옥의 수필집 원고들을 두 번이나 눈여겨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프랑스의 박물학자 뷰퐁의 말을 떠올렸다. 예의 ‘글은 곧 사람’이라는 명언은 글에 작가의 개성이나 품격은 물론 갖가지 체험과 의식이 담겨있게 마련이라는 의미이다. 불어 그대로는 개성적인 문체를 중심으로 한 것이지만 넓은 뜻으로 보면 결국 인품과 글이 합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고향기리기와 숱한 이민생활의 애환을 담은 여러 작품들에 배어 있는 정 사백의 빼어난 감수성과 알뜰한 마음은 물론 향기로운 개성미를 만날 수 있다.
정순옥 수필들은 우선, 오랜만에 동창 벗을 만나 밤새워 정담하듯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인간미가 물씬해서 좋다는 점이다. 몽테뉴도 은퇴 후쯤에 써낸 수상록에서 자신이 살아온 사사로운 일을 터놓고 고백하여 수필장르의 매력을 키웠던 바가 참고된다. 일상의 일을 속속들이 드러내는 요소들이 그대로 수필의 속성이요 매력인 에세이의 덕목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취약점을 숨기거나 곱게 꾸미기 마련인 일반과는 다른 장점이다. 미국생활 30년이 되었음에도 영어에 서툴다는 「콩글리쉬」나 아직 컴퓨터에 익숙지 못하다는 「콤퓨터스 다운」은 친근감으로 읽힌다. 「고운 이」에서는 자신의 비밀스런 치아 속까지 드러내 보일 정도이다. 또한 눈물, 콧물이 유난히 많은데다 열쇠꾸러미를 쓰레기통에 버린 실수까지 저지르는 일로 남편을 괴롭혀 미안하다는 「사는 것이 기적이다」도 재미있는 애교로 와 닿는다.
다음으로, 정 사백의 글들은 이민생활에서 겪은 숱한 난관 속에서도 성실하게 노력하는 생활 태도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앞에서 든 「기쁜 소식」에서의 경우처럼 가사와 직장에 응시준비는 물론 글쓰기까지 열심히 해내는 도전 모습과 투지는 갸륵하기 그지없다. 남들은 아예 응시를 포기하거나 낙방사실을 숨기기 마련인데 그 사실을 오히려 ‘전과자’라는 유머를 섞어 리얼하고 떳떳하게 쓴 자세가 좋게 받아들여진다. 이민 초기 자녀 교육의 어려움과 고독한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베틀」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치매 할머니를 정성껏 보살피다 생긴 선의의 실수로 인해 위기를 당하다 벗어난 「가시에 찔린 상처」 사연과 직장상사의 신뢰를 고마워한 「노마」 이야기 등. 숱한 이민생활의 애환을 나누며 친구로 지내는 「몬트레이 소나무」 등은 밝은 내용들이다. 그러나 정 수필가는 강산이 세 번 변할 세월동안 디아스포라의 삶을 감당해 오는 과정에서 여느 이민자 못지않게 생활전선의 무용담 같은 이야기 거리가 많음에도 겸손하게 몇 가지만 쓰고 있어 의연하게 보인다.
또한 정순옥 수필가의 두드러진 덕목은 항상 한국인의 정서로써 민족적 정체성을 기리고 지켜내려는 망향의식을 지니고 산다는 점이다. 더러는 적지 않게 분단 조국을 등지고 한국 전통문화마저 엽전적이라며 경원하는 여느 경우와는 대조되는 요소이다. 작가 스스로 밝힌 ‘지극히 토속적’이란 말에 어울릴 정도로 본디 한국 시골의 소쿠리 마을에서 자란 체질을 반영한다. 어릴 적 단오날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새 옷차림으로 그네 타는 「그네」이야기나 어머니가 지극사랑으로 먹여주던 「꿈속에서도」의 익모초만이 아니다. 오래 쓴 탓에 빗살이 빠진 채로 참빗과 더불어 대나무 향과 동백기름이 배인 「얼레빗」에 담긴 친정어머니 모습은 선연하다. 더욱이 ‘고향의 봄’을 곁들인 「오매, 복사꽃 피네」에서는 소박하되 굳은 신념으로 읽힌다. -“타향살이한 지가 벌써 삼십 년을 바라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고향을 잊어버리고 산다고 하지만 난 그러질 못한다. 나의 고향은 아름다운 내 사랑의 시작이었고 이 세상에서 평화와 행복을 안겨주는 가장 포근한 내 인생의 요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수필에는 기독교적 신앙이 생기 있는 생활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현상이기 마련이다. 교회에서 권사님과 손을 맞추어 바자 날에 만드는 「사랑만두」를 비롯해서 미니수필 형식의 성탄절 축하엽서인 「누군가에게」, 「마냥 좋아요」 등이 눈에 띈다. 또 성경 속의 달란트 화폐로 비유한 「부자란 과연 무엇인가」, 알래스카에 크루스 여행하며 신비스런 대자연의 창조주를 예찬한 「한 마음으로」 등. 여기에는 교통사고에서 기적이라 싶게 무사하게 살아난 체험을 쓴 「행복한 영혼」의 한 구절이 참고 된다.- “나는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동행해 주고 계신다고 믿는 ‘행복한 영혼’을 소유한 자로 살고 싶다.”
끝으로, 그의 글에는 누구보다 인정 넘치고 선연하게 타고난 감수성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매, 복사꽃 피네. 참말로 이쁘은 것.” 차원의 표현에서만이 아니다. 거기에 원초적 동심과 낙천적 유머감각이 신선한 문장의 맛을 더한다. 소쿠리마을, 몬트레이 소나무, 얼레빗 등의 기호적 이미지 활용효과 등의 재능이 어우러진 성과이다. 그럼에도 가상한 일은 그렇게 다정다감한 정 사백이 아까운 나이로 먼저 간 자식을 가슴속에 묻은 마음을 다룬 「하늘나라 아들에게 띄우는 편지」에서는 독자들에게 슬픈 감정을 절제하여 진중함의 본을 보인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정순옥의 장점만 살폈지만 첫 수필집인데다 글쓰기에 집중할 겨를이 없던 처지이고 해서 아직 아마추어성이 없지는 않음은 물론이다. 이를테면, 영문 번역을 의식해서이지 「아름다운 몬트레이」 등은 밝고 신선한 글 내용에 비해 문장의 호흡이 너무 길뿐더러 제목도 단조롭다고 여겨진다. 대체로 수록 작품 50여 편이 글의 짜임새나 밀도감들에서 고른 수준이 아니라 싶은 건 객관적인 사실이다. 이런 점이 오히려 옥의 티처럼 신진 수필가로서 앞으로 발전 가능성 많은 특장점이 되고 있음은 기쁜 일이다.
무엇보다 정순옥의 수필이 독자에게 공감을 주고 잘 읽히는 힘은 역시 남다른 감수성에 순박성 및 이웃 사랑에 대한 봉사정신이나 어버이에 향한 효성 지극한 개성미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을 연상케 하는 「아직도」와 부녀간의 뭉클한 사랑을 수채화처럼 그려낸 「사랑스런 코스모스」인상이 짙게 다가온다. 거기에 철따라 온갖 푸성귀와 과일을 수확하며 자식같이 아껴오던 텃밭을 마을길로 튼다며 농악놀이가 한창인데도 잠자코 안방에서 털실로 뜨개질만 하던 「사랑스런 땅」에서의 어머니 심경 묘사는 「얼레빗」 경우와는 또 다른 정황으로 가슴에 스민다.
그리고 대조적으로 「부모님을 찾아서」를 통한 고부간의 사랑이 선하게 느껴진다. -“침대 위에 깔린 이불 밑으로 손을 넣으며 온기를 확인하시는 시어머니의 마음이 폭신한 솜이불 속에 서리서리 묻혀 있다. 두 손을 잡자, 나의 가슴은 고부간의 사랑으로 옥매트의 온기보다 더 따스함을 느낀다.”
영예로운 글씨기의 보람을
위에서 인사말에 이어 작품세계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마무리할 차례다. 거듭 복된 정순옥 사백의 화갑과 첫 작품집 출판을 축하한다. 그리고 아무쪼록 주인공 가족과 이웃이 하느님의 가호 속에 건승한 가운데 앞으로 더 좋은 글 많이 발표하기 바란다. 가족과 정년 없는 글쓰기와 길이 남는 창작품을 정성껏 빚어내는 문인의 영예로운 특권을 맘껏 펴보길 바래본다. 가족과 그리하여 미국 전역의 한인 여러분을 아우른 영광된 작품 활동 소식이 조국의 독자들에도 연이어 닿도록 늘 새로운 삶의 보람과 행운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2010년 한 여름철에, 서울에서
정순옥 약력:
전북 정읍출생
미주 중앙일보 창간15주년 기념 이민기 우수상
한국수필 신인문학상 등단
제26회 허난설헌문학상 수필 금상
제4회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상
제2회 에세이포레 해외문학상
한국문인협회 본부 표창장(2018)
현재: 한국문협 미주지회 이사
수필집: 기쁜소식(2010)
오메, 복사꽃 피네(2013)
베틀(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