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렬 수필가

조회 수 878 추천 수 1 2020.01.01 08:32:58

 

                        앞서가는 수필 쓰기의 출구전략

 

                                                                                       한 상 렬

 

1. 문제의 함의含意

 

최근 S.K 텔레컴의 광고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는 낯선 광고의 일색이다. 몇 차례에 걸쳐 연속기획으로 틀을 깨고 있는 이 광고는 매번 다른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이상하자를 외치고 있다. 처음에는 다분히 낯설게 느껴졌지만 시청하다보니 어느새 그 낯섦이 낯익은 대사로 들려왔다. ‘기변機變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이 광고는 그야말로 사고의 전환, 새롭게 보기를 광고라는 매체를 통해 시청자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디지털 중심의 현대는 바로 이란 낯섦을 통해 시청자나 구매자를 유인한다. 문학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다.

롤랑 바르트의 모드의 체계는 이렇게 시작된다. “패션잡지를 펼친다.”라고. 이 문장은 우선 하나의 실제 행위로 읽힌다. 바르트는 실제로 패션잡지를 뒤적이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의 출발은 그 어떤 이론서의 출발보다 생생하다. 바르트가 그 유명한 저자의 죽음에서 했던 질문을 이 문장에 관하여 다시 대입해 본다.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그는 이론가 바르트인가? 아니면 자신의 일상생활을 적고 있는 기록자 바르트인가? 그도 아니면, 어떤 내러티브를 따라가도록 되어 있는 이 책의 주인공인 바르트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바르트로부터 얻기 위해 저자의 죽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글쓰기란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도주해 버린 그 중성, 그 복합체, 그 간접적인 것, 즉 글을 쓰는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음화negative이다.”

라고.

변화의 시대이다. 변화는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피다. 전통적 수필 창작에서 이젠 시대 변화에 맞춰 수필창작도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기위해선 새로운 수필창작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변화에 편승한 시대적 필요에 합당한 작품은 과연 어떤 작품이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고구는 창작자인 수필작가들의 손에 달려 있다. 지금 수필문단의 일각에는 변화에 앞장서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실험수필의 창작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수필의 실험이 필요한가? 이 문제에 대한 안성수의 수필오디세이에서의 언술은 시사적이다.

 

요즘 들어 수필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수필의 정체성과 미학이 왜곡되거나 변형되어가고 있다고 걱정하고, 변화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수필의 전통과 관습이 시대정신과 호흡하며 끊임없이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필의 실험은 궁극적으로 장르의 발전과 독자들에게 보다 바람직한 미적 감동을 제공하려는 데 목적을 둔다. 이러한 수필의 실험은 현실적으로 작가와 이론가의 두 집단에 의해 기도될 수 있다. 작가의 실험은 독창적이고 새로운 작법으로 창작의 세계를 열고, 비평가와 이론가는 새로운 장르 실험을 위한 기법과 논리를 개발한다. 이러한 실험이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수필 장르의 바람직한 발전을 위한 도전이라는 목표를 충족시킬 수 있는 미적 논리와 철학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새로운 세계의 문학은 전통에 대한 파괴와 전도, 고정관념의 해체로부터 시작된다. 메타문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변화의 한 축일 것이다. 문학의 이종결합이 보여주듯 이제 문학은 고고한 위치에서 타 장르와의 결합, 타 학문과의 결합을 통해 출구전략의 변화가 와야 할 것이다. ‘통섭은 그 변화의 한 줄기며 한 축이다.

한 마디로 문학의 본질은 사물의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조나단 컬러Jonathan Culler가 신문기사도 마치 시처럼 배열해 놓으면 문학적 책읽기를 유발할 수 있고,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했듯, 전통적인 것만이 만능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문학과 비문학의 차이는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2. 실험 의식의 외연 넓히기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키워드는 아마도 대상에 대한 통섭새롭게 보기일 것이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일컫듯 경계 넘나들기와 가로지르기가 하나의 주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은 지도 오래이다. 이른바 탈 경계와 상호 예술성의 지향은 경계넘기와 융합을 통해 상호 텍스트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으며, 문예학 연구의 주요한 흐름으로 파악된다.

철학자 데리다J. Derridark가 생각한 지혜의 본질은 들을 귀를 가진 영혼의 철학과 그 지혜보다는, 이 세계를 눈으로 보고 읽으려 한 그런 철학과 지혜를 담고 있다. 전자를 말중심주의Ie Iogocentrisme나 경건주의Ie pietisme로 본다면, 후자는 문자학이나 차연差延의 철학이라고 하겠다.(김형호, 21세기 문학1997, 29) 여기서 데리다는 문자를 글자 그대로 문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자가 부조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부조리라는 개념도 형이상학적인 의미와 함께 언제나 체계를 이루었다. 단지 문자는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숨넘어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충실하게 노력하고 애쓰고 시도해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앞의 책, 30)고 하였다.

수필은 그 소재를 생활 속에서 찾아낸다. 따라서 생활이 곧 수필이고, 수필이 곧 생활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너무도 낯익어서,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무심한 눈에는 아무것도 띄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으려면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 낯익은 것들이 낯설게 보이고, 그 낯설음이 자기 마음속에 어떤 느낌을 안겨주게 된다. 이런 논의는 수필의 새로움을 찾는 길이 될 것이다.

 

김정희의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은 디지털시대의 익명성을 잘 보여준다. “불로그의 알림배너에 붉은 색이 들어왔다. 단조로운 내 일상에 화룡점정이 되어 빛난다.” 이 수필의

 

서두는 사유의 단초를 보여줌으로써 기형과 잡종의 글쓰기의 일단을 보여준다. 화두의 단서

우린 <서로 이웃> 해요. 꽃그늘 아래선 생판 남이 아니라면서요?” 에 결려 있다. “그가 내 방명록에 글을 남긴 것이다.” 서두는 이렇게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사유의 프로그램을 요구하고 있다.

 

이 수필에서의 사유의 프로그램은 새로운 사유의 가동으로부터 출발한다. 불로거들끼리의 소통의 수단으로 이웃서로 이웃의 관계형성은 디지털시대의 소통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블러거들끼리 이어주는 소통의 수단으로 이웃서로 이웃이 있다.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이웃인 상태인데 비해 서로 이웃은 쌍방의 동의하에 양쪽이 함께 이웃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요컨대 서로 이웃이웃보다 더 친밀하고 고급한 관계라는 말이다.

 

사유의 조각들이 이제 하나하나 퍼즐을 맞추듯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 우리의 시대는 주어진 쾌락 속에서 우울하며, 강요된 안정 속에서 불안하다고 누군가 피력하였듯, 이 수필은 사유의 조각들을 서로 맞추고 조율하며 새롭게 연주하듯, 아니 외과 수술처럼 접합과 봉합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 수필의 비유는 어떤 하나로써 다른 하나를 지시하고나 의미하지 않는 언표장에서의 기표를 보여준다.

서로 이웃이웃보다 더 친밀하고 고급한 관계라는 소통의 개념은 베른하르트가 대위법적 변용된 음악적 글쓰기를 보여주었듯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은 물론 각 단락 사이의 연결을 전체적으로 규정하는 이른바 통합적 처리로서 구체화되고 있다. “나의 북 리뷰 란에 <아라비안나이트>라는 나이트클럽의 광고 글로 도배해 놓은 유흥업소 웨이터와 이웃이 되는 불상사는 없어야겠기에.”내가 그의 일기를 열어보는 첫 이웃이라니 인디아나 존스의 탐험 길에서나 볼 수 있는 처녀림에 들어선 듯하다.”는 화자의 언술은 이 수필에서 개별적 단어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텍스트 내의 다양한 문단들의 요소로 작용하고 이런 단락의 다양한 결합을 통해 비로소 텍스트의 의미 지시성이 형성되고 있다.

이윽고 수락의 버튼이 클릭되고 블로그의 알림배너가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빨갛게 반응했다.” 그리고 화자는 글자에도 그 사람의 음성이 배어 있다는 걸느낀다. 그리곤 벤자민 버튼의 거꾸로 가는 시간과 단박에 피부가 매끈해지는 스테로이드제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나이 차다.”라는 인식과 소통이 완결된다. 그러나 열림은 닫힘과 상호 대비적이다. 다시금 굳게 채워진 비밀의 정원 앞에서 화자는 막막해 한다. ‘서로 이웃생판 남보다 못한 꽃그늘의 봄날이라는 존재인식으로 텅 빈 실험실의 비이커와 접합되어 있다.

 

피카소의 스케치나 윌슨의 사진, 커밍스의 시를 그냥 한번 보는 것만으로는 뭐가 뭔지 알 길이 없다. 문제는 이것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기 때문에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놀랍게도 커밍스의 시는 피카소가 그린 <화가와 모델>의 언어적 등가물이다. 단순성을 통해 이미지들은 순수의 힘을 보여준다. 추상이다. 여기 추상은 어떤 대상의 전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덜 띄는 한두 개의 특성만을 나타낸다는 데 있다. 김정희의

실험적 수필쓰기는 디지털 시대의 소통문제를 새롭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언어의 자유로운 결합과 연상이 돋보이는 수필이겠다.

 

문윤정의 <네 가지 색깔로 다가온 현기증>는 구조주의적 측면에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의 문화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지구를 타면서 느끼는 노란 현기증 - 무희의 춤에서 느낀 회색 현기증 -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서 느낀 푸른 현기증 - 나의 삶에서 느낀 검은 현기증]과 같이 단자單子, digit들의 조합으로 된 융합된 개념을 보여준다. 정서의 사상화 측면에서 아날로그처럼 사물을 덩어리나 연속체의 측면에서 보지 않고 모래알처럼 서로 따로 떨어질 수 있는 어떤 알갱이, 즉 단자로 본 개념으로 이런 조합은 사물의 기능과 현상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이른바 극단적 형식인 비트bit의 조합으로 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서는 연구대상이 되는 요소가 다른 요소의 상관관계에서 그 가치가 빛난다. 복잡한 컴퓨터 장치도 따지고 보면 전기의 음극과 양극이 교차하는 비트의 체계로 환원시켜 이해는 인식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필의 결미부터 보자. “이 세상은 어릴 때 탔던 지구보다, 저 무녀의 춤보다 더 빨리 돈다. 현기증 나는 세상 속에서 삶의 현기증을 감당하지 못해 쩔쩔 매고 있는 나에겐 고흐가 즐겨 마신 압생트 한 잔이 필요하다.” 화자에게 있어 현기증은 네 가지 색깔이라 했다. 이들 하나하나의 색깔은 삶의 단자單子이면서 종국엔 하나로 조합되는 이미지의 융합이다. 때론 두렵고, 광폭하거나, 열정과 광기를 느끼게 하고, 예리한 통증까지 느끼게 하는 색체적 이미지는 바로 삶에 있어 우리가 감지하는 현기증일 것이다. 그래 지구보다 무녀의 춤보다 더 삶의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현실에서의 벗어나기 위해 그에겐 압생트라는 악마의 술’, 아니 신비의 술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떠나, 내가 설정한 삶이 있고 희망하는 또 다른 내가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삶은 번번이 내 기대를 배반했다. 삶에 대한 비의를 알아버린 난 지독한 현기증에 시달렸다.

 

화자에게 있어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 동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삶에 대한 비의를 자각하기까지 지독한 현기증에 시달리게 하였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이 작품의 구조적 측면에서 소재의 해석으로 볼 수 있겠다. 탁월한 발상이 문자학적 사유와 함께 독자를 낯설게 하면서도 철학적 함의를 감지하게 한다.

 

이 수필은 지구를 타면서 느낀 노란 현기증이라는 유년의 체험을 프롤로그로 하고 있다. 이를 주제의 직핍을 위한 실험적 방식으로 본다면, 네 개의 퍼즐을 통해 찾은 미로의 귀착지는 나의 삶에서 느끼는 검은 현기증일 것이다. 이는 네 번째의 퍼즐인 동시에 이 수필의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이런 구조적 글쓰기는 전통수필의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면서도 새롭게 하기의 일면을 보여준다. “새로이 변화된 세상을 서술 가능하게 하는 일관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함의가 유사성과의 연관을 통해 작품의 심미성을 파악하게 한다.

사르트르의 언명과 같이, “말하는 인간은 말의 저쪽에, 대상의 곁에 있다.”는 진술은 언어의 기성성을 뛰어넘는 제2차적 언어를 요구한다. 이를 바탕으로 문학작품이 갖는 의미라는 것은, 말이 갖는 상식적인 의미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메를로 퐁티의 말을 따른다면, 문자학적 사유는 새로운 수필쓰기에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한다.

 

3. 짧은 수필의 함정

 

최근 이모티콘 등 기호의 나열만으로 표현한 한 직장인의 하루가 나왔다. 과연 글자 없는 책을 책이라 할 수 있을까? 책에 대한 통념을 송두리째 흔드는 중국 설치미술가 쉬빙(60)의 실험적 저술 지서地書가 출간되어 국내에도 상륙했다. 전통의 복원과 현대적 재해석의 작업을 주도해온 저자는 서예를 기반으로 차이나 아방가르드’ 1세대로 불리는 실험

적 예술작품들을 선 보인 것이다. “기호의 영역은 넓다. 하지만 이를 모든 물적 형성체와 생산물로 확대해서는 안 되며, 기호가 모든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확대해서도 안 된다.” 이는 위르겐 링크Jiirgen Link의 말이다.(기호와 문학, 22)

이와 같이 모든 기호는 대체로 일정한 개체들의 집합 안에서 소통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나 기호로서 인지되지는 않는다. 여기서 집합을 해당 기호의 사회적 담당체라고 할 수 있다. 링크의 언명에 의하면, 언어의 요소도 기호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의 요소에서 기표와 기의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짧은 글이 유행하는 시대다. SNS가 이를 부추긴다. 요즘 젊은이들은 단문소통에 익숙하다. 이른바 스압(스크롤 압박)’을 느끼는 만큼 짧은 글로 소통한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은 10시간 이상 연속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있다하더라도 이런 짧은 글들 중에서 옥석은 가려져야 할 것이다. 신문과 잡지에 원고지3~5매 분량의 짧은 글에도 알짜 정보가 압축되어 있거나 심금을 울리는 문장도 있다. 이와 달리 무의미한 언어의 나열이나 애매모호한 문장, 현학적 수사로 연결된 글은 문학성과 거리가 있다. “쓰다 보면 문장 하나가 모자라거나 넘치는 때가 많다. 그렇게 글을 쓸 때의 호흡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다.”라는 견해는 분량이 적으니 상대적으로 쓰기 쉽다, 는 통념을 뒤집는 말일 것이겠다.

수필문학사상 이런 수필작품의 분량의 변화는 최근에 이르러 더욱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리하여 수필문학의 패러다임은 이제 새로운 수필 쪽으로 시선을 옮겨가고 있다.

 

날마다 이불 터는 집이 있다. 실내에서 조용히 해결하지 않고 창밖으로 긴 자락을 늘어뜨리며 펄럭펄럭 먼지를 낸다. 침실에 펼쳐졌던 다소 은밀한 삶의 흔적들을 그렇게 마구 흔들어댔다. 거실에서 산을 바라보며 글을 쓰는 나는 그것조차 하나의 풍경으로 삼아 버린 지 열여덟 해.

( )

그러다가 여름 장마가 끝나갈 무렵, 승용차에서 보퉁이를 들고 내리는 위층 남자를 만났다. “아이고, 아저씨!” 외에는 말이 생략되었다. 그 흥 많던 남자도 말없이 애호박 두 개를 불쑥 내민다. 영월 밭에서 딴 것이란다. 그 말에 나는 우리 시골 밭에 호박이 널렸음에도 불구하고 얼른 받아 안았다. 부부가 여생을 함께 보내고 싶었던 땅에서 거두었다는 말은 심정적으로 그냥 다 아는 것이고, 이렇게 의연하게 슬픔을 삭이고 있는 이웃사촌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느 날 부턴가 다시 들린다. 누구랑 통화하는지 걸걸한 목소리가. 자판을 두들기는 내 머리꼭지 위에서 드르륵드르륵 벨소리가 들리면, 목청에 힘을 실은 구수한 말소리가 한참씩 이어진다. 이불도 날마다 힘차게 춤을 춘다.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증거다.

머잖아 선들바람 불면, 다시 거나하게 술기 오른 음색으로 유행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새 나올 것 같다.

 

-김선화의 단수필, <위층 남자 목소리>

 

김선화의 짧은수필 <위층 남자 목소리>는 원고지 6.7매 분량의 짧은 수필이다. 아래, 위층으로 사는 아파트의 정경이 삶의 희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층 남자의 목소리는 건강한 삶의 증좌이다.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창밖으로 이불을 터는 집. 고뇌를 감내하고 다시금 삶의 현장으로 돌아오기까지에는 서사적 과정이 필요하다. “선운사 답사길에 맨 정신으로 노래를 꺼억 꺽 부르고는 얼굴이 상기되어 가슴을 쥐어 잡았다.” 그런 그녀의 집에서 더 이상은 이불이 펄럭이지 않았고, 그녀의 부고는 내 의식을 한동안 에워싸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랬다. “자로 재서 만든 똑같은 공간의 크기와 배열, 내가 눕는 방 천장 건너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와의 이별은 자아인식의 계기가 된다. 그 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불도 힘차게 춤을 춘다. 아파트라는 공통의 공간에서 살고 있는 이웃의 표정에서 잃어내는 존재의미의 해석이 강한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서사적 수필의 구조적 진행이 완벽하다. 작가가 부려쓰는 어휘는 문자학적 사유와 차연의 의미에 천착하게 한다. 기왕에 짧은 수필이라면 5매 정도로 더 축약해도 무방할 작품이다. 이보다 수필의 분량이 더욱 짧아진 것은 이른바 아포리즘수필이다. 아포리즘apohorism이란 삶의 교훈 등을 간결하게 표현한 글로, 대개 문장이 단정적이며 내용이 체험적이며, 표현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다. 속담이나 격언 등과 유사하지만, 그것들이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작자가 분명하지 않은 데 비해 아포리즘은 작자의 고유한 창작이라는 점에서 속담 등과 구별된다. 이 용어가 처음 쓰인 것은 히포크라테스의 아포리즘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질병의 증세 · 진단, 치료법과 약품에 대한 서술이 길게 나열되어 있다. 한편 광고에서도 아포리즘적인 표현이 응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회의 가치나 규범 혹은 인간의 덕목 등을 개성있게 제시하면서 상품을 우회적으로 선전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가슴이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하다.”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 최근에 이르러 수필가 윤재천에 의해 현대수필쪽에서 실험되고 있다. 이들 경향은 그동안 아포리즘 수필을 내놓으면서(윤재천 엮음, 소소리, 2012) 주목을 받고 있다.

아포리즘수필은 일종의 에스프리esprit와 같은 형태이다. 짧은 수필을 지칭할 때 항용 에스프리로 볼 수 있으나, 여기서 에스프리라 함은 기지機智또는 재치才致를 뜻하는 프랑스어를 차용한 근대적인 새로운 정신활동으로 프랑스인의 재치있고 발랄한 지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는 영국인의 유모humor와 좋은 대조관계에 있다. 그런데 최근 발표되는 아포리즘수필의 경우, 구조적으로 완결한 작품이라 보기에 무리가 있는 작품들이 상당수 보여 문학성을 의심하게 한다. 적어도 문학작품이라면 완결된 구조를 이루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승전결, 아니면 서두, 본문, 결미의 3단계의 구조를 이루면서 통일된 주제를 지녀야 문학적 형상화가 가능할 일이겠다. 최근 3의 수필이라 하여 에스프리 형태의 글을 묶어 수필집이라 내놓기도 한다.

 

4. 나가는 말

 

문제는 이들 작품을 완결된 문학작품이라 보기는 아직 요원하다는 데에 있다. 아포리즘수필이라 하여 짧은 글에만 초점을 모아 의미해체의 무의미한 언어나열로 이루어진 글들이 횡행하기도 한다. 이를 아포리즘수필이라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문장의 길이가 중요하기 보다는 그 글이 갖는 의미에 더욱 창작적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수필의 길이 문제보다는 수필이라는 용기用器에 무엇을 담을까가 더 중요할 일이겠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수필이 인간학에 초점이 모아져함에도 감성위주의 감각만으로 된 작품을 문학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나 가치의 문제는 에 관한 문제였다. 여기서 문제는 살되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옳고 가장 보람 있게 살고자 하는 것이었다. *

 

    

한상렬.jpg

 

현대문학(1987-8)에 수필 <정겨운 선물>로 데뷔,시대문학(통권2, 1989)에 수필로문예한국(1993-봄호)에 문학평론 <수필문학의 허구와 상상>으로 추천 등단.제물포수필경인문학을 창간하였으며, 한국문인협회와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학산문학주간, 월간문학편집위원, 수필시대주간을 역임. 지금은 한국문인협회와 국제펜클럽한국본보의 자문위원으로 계간수필전문지에세이포레의 발행인 겸 편집인, 강남문화원, 인천-에세이포레, 검암수필강좌에서 수필을 강의. 도서출판 에세이포레의 대표. 저서로는 수필선집신화를 꿈꾸다14, 문학평론집문자학적 사유와 철학적 함의22, 수필창작서앞서가는 수필짓기9, 인천문학사한국수필문학사등 모두 80권이 있다. 인천문학상, 인천문화상, 신곡문학상, 한국문학비평가협회 문학상, 구름카페문학상, 인천펜문학상, 산귀래문학상, 수헌문학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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