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굿빛 자아의식과 여백(餘白)의 불꽃
-홍용희의 수필세계-
강 정 실
1. 들어가기
수필은 작가적 삶의 인격과 진실이 요구되는 자기투영의 문학이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비추는 평면적 거울이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굴절해 여러 색을 입힌 프리즘과 같아야 한다. 해서 어떤 색을 입힐까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수필은 작가의 체험을 소재로 시작하지만, 그 체험을 승화시키고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을 이끌어 내는 것은 관조(觀照)를 통한 예술적 창조과정이라 한다. 파불로프(Pavlov, Ivan Petrovich)는 예술가형의 사람은 일반사람과 비교하면 조건반사의 능력이 발달해 있다고 한다. 예술가적인 것은 자신의 생활체험을 현실 인식능력과 이를 적절히 표현하는 예술적이며, 장인적 숙련성을 지닌 것으로 분석한다. 이는 사물의 외적 모습뿐만 아니라 내적 속성과 상상력 그리고 문학적인 것에서 철학적인 것까지 아우르는 통섭의 산물을 살펴 내어야 한다는 뜻이다.
좋은 수필은 서두와 결미에서 조화롭게 서두의 기점이 잘 조응(照應)하고 있다. 전개된 사건을 본문에 밀도 있게 정리하고 아름다움과 논리적 결미를 위해 여백이 잘 남겨져 있다. 그렇다면 좋은 수필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아침 햇살과 함께 풀밭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꽃향기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가슴에서 느껴진다.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과 가슴으로 느껴지는 향내가 그곳에 있기에 그렇다. 좋은 수필은 사르르 향기를 뿜어내는 느낌과 감동이 시나브로 스며드는 글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논의는 구체적으로 그의 정신이 어떤 언어미학과 존재의미를 나타내었는지 짚어가고자 한다.
2. 인간적 체온의 깊이
성심여대에서 국어국문과와 같은 전공을 대학원에서까지 공부했고 국어과 교사로, 미국에서는 RT(Respiratory Therapist)로 근무하며 애들을 키웠다. 그랬으니 그에게 미국에서의 문학이란 천형과 같은 등짐을 머리에 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를 알게 된 것은 한 수필클래스와 2016년 미주중앙일보 넌픽션부문이 계기가 되었다. 당선된 작품을 보면서 그가 본연의 문학이라는 자리, 뒤늦게라도 제자리에 온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연암 박지원도 글 짓는 법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아프고 속상한 마음의 형상화이다.”라고 했다. 이른바 발분저서(發憤著書)! 분한 일을 당하고 그 일을 삭힌 후 글로써 풀어내는 것이다’고 했으니, 그의 글도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만난 아픔이나 느낌을 형상화한 것이다.
홍용희의 수필은 ‘존재의 문제를 다루는’ 다분히 사색적이고 철학적이다. 소재의 착상을 낯설게 하며 상상의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발상의 전환이다. 또한, 수필 속에는 일반적인 잡사(雜事)가 아닌 그의 진솔한 삶과 사물화(trompe-l'oeil)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①대학 졸업한 지 30년, 대학원 졸업한 지 15년 만에 다시 교실에 앉았다. 과연 학교수업은 턱없이 힘들기만 했다. 영어라고는 중·고등학교 영어 시간, 커뮤티니 칼리지와 어덜트스쿨(Adult School)에서 몇 과목 들은 것이 전부였다. 한순간도 마음 놓고 느긋할 수가 없어 학교에 제일 먼저 갔다. 그리고는 후미진곳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공부했고, 교실 문이 열리면 교실에서 공부했다. 빨리 이해가 안 가고 귀가 안들리는 문제는 시간을 집중적으로 할애했다. 그래도 항상 불안했고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나토미엔피지올로지(Anatomy & Physiology), 크리티컬 딩킹(Critical Thinking) 등은 겨우 쫓겨나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었는데, 하루는 담당선생이 나를 불렀다.
“영어가 어렵지 않아요?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나는 할 수 있어요. 졸업하고 취업해 애들하고 먹고살아야 해요.”라고 말했다. 사실 속으로 엄청나게 놀랬다. 나의 얼굴을 한참 훑어 본 담당선생은 나만을 위한 영어 선생을 별도로 배정해 주었다.
②번민이 컸던 내 직업학교,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인 듯싶다. 시작할 때의 나이가 53세였기에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것 때문에 무척 고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라도 시작한 것이 나를 수렁에서 건진 것이다. 지금 와서 53세의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젊어 보인다. 그때 나는 공부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과정을 다 끝내고 그 후로도 십 년 넘게 일하다 은퇴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③헌팅턴비치에 바람이 불어온다. 해가 서녘 수평선으로 깊이 빠져들고 있다. 그때다. 한강다리를 건너면서 본 해넘이 장면이 뇌리에 살아 숨 쉬며 아름다운 장관을 보는 듯 갑자기 다가왔다. 그게 언제 적 일인가, 내가 어릴 때 친구 석태를 만나기 위해 공항동으로 가면서 한강다리를 건너며 바라본 해넘이 장면이 아닌가.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해넘이가 지금 이 순간 뇌리에 살아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래, 그때 보았던 아름다운 해넘이다. 뒷모습. 그 멋진 뒷모습이다.”
이걸 보여주기 위해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풋풋했던 내 어린 기억을 남편이 꺼내어 보내주었으리라 싶다.
「하얀 파도꽃」부문
위의 작품은 2016년 미주중앙일보 넌픽션부문 당선작 「하얀 파도꽃」이다.
전반부 ①에서 화자의 남편은 미국에 들어온 지 4년 만에 위암으로 사망한다. 남편이 사망하자 남편의 친구는 맡긴 돈을 되돌려 주지 않는다. 화자는 공부하고 있는 세 자녀와 생활을 위해 53세라는 나이에 RT이라는 직업을 얻기 위해 직업학교에 등록한다. 매 순간 영어로 시작되고 끝나는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피나게 노력한다. 귀에 안 들어오는 영어강의를 녹음해 집에서 들어가며 공부해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하루는 담당선생에게 불려 가 직접 경고를 받는다. 화자는 “졸업하고 취업해 애들과 먹고살아야 해요.”라고 말했지만, 해부학과 생리학 등 모든 치료 과정을 영어로 공부하기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②화자는 10년 넘게 직장에서 일하다가 은퇴하고 지금의 시선으로 그때를 회상한다. 마치 뫼비우스(Möbius)의 띠처럼 동시에 당면한 현실과 능력의 한계는 서로 맞물려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것은 삶의 본질이었다. ③헌팅턴비치에서 수평선으로 붉게 빠져드는 해넘이를 보게 된다. 순간 소녀적 시절 한강다리를 건너며 바라본 해넘이가 되살아난다. 자신도 붉게 핀 저녁놀처럼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살다 가고 싶다는 욕망과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발동한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든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라고 했다. 우리 인간은 나이가 들어가며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우주의 미세한 것에도 보편적 진리와 질서가 가슴에서부터 혼회융일(混回蕯一)하고 발효가 일어난다. 요동치는 가슴은 율동하며 자연현상에 상상을 더하여 대상의 본질이었던 남편을 찾는 일이다.
세네카(Seneca)도 인간의 삶을 하나의 연회(宴會)라고 표현했다.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일찍 자리를 떠나 주인을 섭섭하게 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연회장을 청소할 때까지 있어도 안 된다고 했다. 화자는 남편을 통해, 자연의 이법(理法)인 죽음을 보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신적 영원성에 합일’하는 일이다.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저녁해와 온통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존재론적 승화라는 믿음을 배면에 깐다. 그리고 마음의 속도를 낮추고 속도의 스펙트럼을 보여 주는 남편을 승화시키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첫해 12월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기숙사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주말, 대다수 학생들은 외출하고 남은 몇몇은 느긋하게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 친구가 “저기 저 초승달 좀 봐, 어쩌면 꼭 나 같아.” 하고 외쳤다. 전부 고개를 돌려 달을 쳐다보았다. 그 달은 시울도 또렷한 가녀린 초승달이었다. 달은 봉의산 나무 위로 살포시 떠오르고 있었다. 대화는 끊겼고 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순간 친구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전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나도 눈썹 같은 초승달을 쳐다보며 서울에 있는 어머니 생각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났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초승달은 어머니의 눈썹 같아 미당의 동천(冬天)이 생각났다.
「초승달」부문
화자에게 밤하늘에 떠있는 달은 어머니 모습이다. 세사에 시달리거나 힘들면 하늘을 자주 쳐다본다. 달을 보며 뭔가를 생각하게 되고 위로받기에 달은 영원한 안식처요, 아름다운 영상이며 영롱한 보석이다. 옛날 어머니들은 정화수를 떠놓고 달에게 소원을 빌기도 했다. 달은 밤하늘에 두둥실 떠올라 이 세상을 비출 뿐만 아니라 어떤 신령한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위로를 주기도 하기에 그랬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한상렬은 홍용희의 작품 「초승달」을 감성적이면서도 지적이미지와 신비적 이미지까지를 통섭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작품평을 들어 보자. “그의 수필을 음미하노라면 나도향의 그믐달」을 떠올리게 한다. 홍용희의 수필은 그와 격을 달리한다. 소재의 자기화에 성공한 이 수필은 “거실 창문 버티칼 커튼 사이에” 걸려있는 초승달에서 착안하여 대학 시절을 회감하는 장면으로 공간 이동되고 있다. “시울도 또렷한 가녀린 초승달”이었다. 달은 봉의산 나무 위로 살포시 떠오르고 있었다. 화자는 눈썹 같은 초승달을 쳐다보며 친구들의 울음소리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났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초승달은 어머니의 눈썹 같아 미당의 「동천(冬天)」이 생각났다.” 착상의 동기를 보이는 이 구절에서 화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언어기의(言語記意)의 메시지를 감지하게 한다.”고 했다.
화자는 초승달에서 어머니를 유추하고 이들의 상관관계를 통찰하고 있다. 미려한 문체와 정서와 사상의 융합이 읽는 이를 감동케 하는 마력과도 같은 요소로 작용한다. 정서의 지성화, 지성의 정서화를 통해 분석과 통합 그리고 의미화를 통해 문학적 상상의 사물화(事物化)가 철학적 형상화로 이어진다.
①평소 집에서 지갑을 아무 곳에 놓고, 둔 곳을 몰라 자주 찾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잘 사용하지 않는 내용물은 별도로 보관하리라 하면서도 습관처럼 들고 다닌 것이 후회되었다. 친구는 주운 사람이 우편함에 넣어 줄 것이라며 위로했다. 나 또한 그렇게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도 안 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불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항상 같이 있고 싶은 내 남편의 사진, 이제 더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사진이 들어 있는데 말이다. 지갑 속에 있는 남편의 얼굴에는 5월과 같은 살굿빛 사랑이 담겨 있다. 잃어버린 사진과 5월과 같은 서른 살 때의 나. 그동안 가끔 지갑 속의 사진을 보며 지금의 내 나이를 잊고 5월의 푸르름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다.
②뉘엿뉘엿 지는 해는 서쪽 빌딩으로 넘어가고 지금은 8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지갑을 주었다는 전화가 없다. 해가 지자 낮에 들렸던 그랜드팍의 분수대에 남편의 그림자와 둘이서 밤 산책을 나섰다. 여러 분수대에서 쏟고 있는 크고 작은 오색 물결이 번득인다. 물에 비치는 어둠은 나비의 두 날개처럼 하늘거리다 하나가 된다. 분수는 강렬한 빛에서 어두운 빛으로 변하다 다시 화려하게 치솟고 있다. 물결과 함께 일렁이는 검은 환영 속에는 아픈 사연들이 애잔하게 일렁이고 있다.
나는 한 점의 정물(靜物)이 되어 빈 의자에 앉아 애련한 5월을 보내고 있다.
「오월과 지갑」부문
전반부 ①에서는 친구와 함께 실내 짐(gym)에서 운동한 후 점심까지 먹고 부근에 있는 그랜드팍에 들린다. 화자는 작은 분수 사이에서 발레 하듯 사진 촬영하고 있는 소녀를 보며 화가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의 그림을 떠올린다. 이 순간 피천득의 작품 ‘오월’을 생각한다. 금아(琴兒)가 21살 때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을 기억하고, 자신도 가까운 산타모니카 바닷가에서 5월의 백사장을 함께 거닐어 보자고 친구에게 제안한다. 그야말로 불현듯 가려 한다. 그러나 메트로(Metro) 정거장에서 지갑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지갑은 큰아들이 첫 월급을 탔을 때 화자에게 선물로 준 밤색 가죽지갑이다. 이 속에는 여러 종류의 카드 등이 들어 있지만, 남편과 함께 찍은 살굿빛 사랑이 담긴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은 5월과 같은 서른 살 때의 화자, 그동안 가끔 지갑 속의 사진을 보며 지금의 나이를 잊고 5월의 푸르름에 남편과의 여백이 들어 있는 사진이었다.
후반부 ②에서 잃어버린 남편의 사진을 하롱하롱 날아가는 나비로 묘사한다. 얼마나 애틋했으면 밤길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를 남편으로 만들었을까 싶다. 물에 비친 어둠은 나비의 두 날개처럼 하늘거리다 하나가 된다. 저승에 거주하는 남편과 이승에 있는 자신이 하나가 되는 착시현상. 화려하게 빛나다가 아픈 사연들로 다시 아파져 오는 현상이다. 그랜드팍에서 밤 분수대에 쏟고 있는 크고 작은 오색 물결에 두 개의 날갯짓, 남편과 자신과의 기억을 하나로 승화시키면서 화자의 감정이 분수대의 불빛에 따라 그리움으로 변해간다.
①어느 시름과 긴 한숨이, 누구의 눈물이 비가 되어 내렸을까. 어느 곳의 비가 홍수가 되어 얼음이 되고 어느 빙하가 깨어진 바위틈에 흘러들어 자갈돌을 만들었으며 어느 자갈돌이 흙이 되어 비를 안았을까. 어느 흙에서 어떤 생명이 탄생했을까. 바다가 상전이 되고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별이 탄생하고 사라졌을까. 내가 흘린 땀방울, 엄마가 흘린 눈물, 우리가 흘렸던 한숨들은 어디 가서 무엇이 되어있을까.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뜨고 억겁의 세월이 흘렀고 또 시간이 멈추는 태고의 모습이 있는 산, 그곳에 별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흐르는 시간은 흘렀다 해도, 시간이 멈춘 그곳에 산은 산으로 남아있고, 강물은 짙은 초록빛으로 흐르고 있다. (중략)
커다란 산바위틈에서 뜨거운 온천물이 흐르고 있다. 신기하다. 무심하고 연한 갈색을 띤 산바위 옆구리를 뚫고 온천물이 흘러내린다. 가장 연약할 것 같은 물이 가장 단단할 것 같은 바위를 뚫은 것이다. 바위가 깨어지는 순간 바위는 울었다. 그 아픈 옆구리의 상처를 유황이 섞인 뜨거운 물로 밤낮없이 치료하고 있다. 이곳 주인에게는 화수분(貨水盆)의 물이 되었지만, 나는 눈을 감고 물소리를 조용히 듣는다. 이 물소리는 조선의 송도삼절(松都三絶)인 황진이의 박연폭포 소리를 부른다.
「산바위의 눈물」부문
②유황냄새가 짜르르 콧속으로 들어온다. 이 유황냄새를 달걀 썩은 냄새, 푸세식 화장실 냄새라고 어떤 사람들은 싫어하는데, 나는 이 매끄러운 온천물에 몸을 담그기를 좋아한다. 아무런 화학약품 없는 순전한 자연의 선물, 산바위의 눈물이다. 날은 어두워지고 가을비는 계속 오고 있다. 이곳 로스앤젤레스에서 맛볼 수 없는 풍광과 느낌은 사뭇 다르다.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산속, 만추 속의 온천, 이 분위기에 온전하게 취해 본다. 슬며시 옷을 다 벗고 탕 안에서 첨벙거리며 두 팔을 저어 본다. 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오늘의 이런 추억은 아마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순간 어렸을 적 개울에서 벗고 첨벙거렸던 일이 떠오른다. 동네 가시나 여럿이 개울에서 발가벗고 놀다 수성못 너른 들에서 메뚜기를 잡아 벼 이삭에 줄줄이 꿰어 오곤 했다.
텐트 안에서 누웠다. 텐트 지붕에 떨어지는 빗줄기 소리가 요란하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빗소리인가. 고국을 떠나온 후 처음 들어보는 제대로 된 빗소리이다. 그동안 빗소리가 듣고 싶을 때는, 유튜브에서 오랫동안 빗소리를 듣곤 했다. 날 저무는 가을날, 유난히 우울해지고 마음이 저리던 날의 그 빗소리가 아닌가.
「비 오는 날의 소묘」부문
①의 「산바위의 눈물」은 깊은 산 속에 쏟아져 내리는 온천물을 무의식과 물질적 세계를 열어 주는 화수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큰 돌덩이 사이로 쏟아지는 것을 비극적인 숙명을 부르는 파괴적인 물로, 온천물을 소품에 불과한 것으로 도열시키고 있다. 개성적 접근을 통해 언어가 지닌 감각적이고 사실적인 표현 능력을 최대화하고 있다. 언어의 연금술사인 이태준 선생의 글처럼, 화자의 글도 문어를 의식한 인위적인 글이 아닌 언문일치가 바탕으로 되어 있다. 전체의 소재가 산, 바다, 밤, 바위, 태양, 물 등 자연 친화적인 양상을 보인다.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의미의 함축이 돋보이는 이러한 어휘는 다양한 의미망 속에서 물체를 일람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해 준다.
②의 「비오는 날의 소묘」에서 시설은 빈약한 자연 그대로의 사설 온천, 누가 보아도 있는 그대로이다. 온천물이 쏟아지는 바위 옆에 큰 텐트 몇 채가 전부다. 주변을 훑어보면 큰 돌덩이 옆으로 길고 가는 강이 흐르고 있고 제법 큰 낙엽관목이 있을 뿐이다. 굵은 가을비가 내리는 만추의 온천에서 화자는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된다. 주변에 사람은 없겠지만, 알몸으로 온천탕 안에서 첨벙댄다. 어릴 때의 순수했던 정신과 육체로 환원하려는 욕망, 동네 애들과 여럿이 개울에서 발가벗고 놀다 너른 들에서 메뚜기를 잡아먹던 생각 등 온천물에서 거칠었던 오랜 기억을 잠시나마 잊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알몸을 내어 놓았을까? 평자는 이러한 생각을 유추해 본다. 어쩌면 아프리카 여느 부족처럼 종교적 귀의와 세속적 단절을 위해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갔을 것이 아니었을까.
사랑으로 대신하는 그리스도교적 정신이나, 공(空)에서부터 출발하는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하는 불교의 정신으로 하나의 연(緣)으로 이어지고 싶은 정신세계이다.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될 7월 초순이었다. 가문 여름, 해가 지고 나면 주홍빛으로 노을이 번졌다. 다시 나뭇잎 사이에 있는 거미줄을 보러 갔다. 노을도 스러지면서 저녁 어스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여전히 허공에 찍힌 점 하나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었다. 간밤에 비가 내린 것을 알게 되었다. ‘거미줄은 어찌 되었을까? 거미줄은 비바람에 날려가고 거미는 다른 곳으로 피했을까’ 급히 나뭇잎 거미줄을 찾아갔다. 아~. 그런데 거미줄에는 작은 진주알 같은 방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진주 알갱이 속으로 아침 햇살이 영롱하게 수를 놓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꼼짝도 않는 거미가 존재하고 있었다. 거미에게는 이곳이 이승이고 천국일 것이라 믿고 살아가는 것 같았다. 천국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의 집합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희망이 이곳에 있으니 거미는 고단한 삶을 잘 견디리라 싶었다.
가을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뭇잎은 그대로인데, 거미줄이 흩어지고 찢겨 있었고 거미는 안 보였다.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영영 거미는 보이지 않았다. 거미줄을 쳐다보면 까닭도 없이 슬퍼지고 허공에 찍혀 있던 그 점 하나가 마치 나 같기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 같기도 해서 더러 핑그르르 눈물이 괴어 왔다.
「거미줄」부문
저녁노을이 물든 외지의 낯선 거리에서, 화자의 눈에 보이는 거미줄에 곤충이 붙어있지 않았다. 순간 화자의 시선은 대학 시절, 기숙사 뒤 나뭇잎 사이 미동 없이 바람에 한들거리며 거미줄에 붙어 있는 것으로 전환한다. 대학 기숙사 부근 나뭇잎 사이 거미줄이 있었다. 며칠을 지켜봐도 거미줄에는 한 마리의 곤충이 붙어있지 않고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저러다 굶어 죽는 게 아닌가 싶어 초조해진다. 화자는 기숙사 내에 살아 있는 파리를 잡아 거미줄에 붙여 놓는다. 놀랍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른 걸음으로 파리에 달려들어 배에서 실을 뽑아 능숙하게 단단히 싸잡아 매는 모습을 탄복스러운 눈으로 구경한다.
문장 어느 부문을 들춰 봐도, 정서의 지·성·화를 통한 주제로 이끄는 언어미학적 세계에 윤슬이 있다.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 작가는 예리한 통찰력이 필요하고 데포르마시용(déformation)화가 되어야 한다. 스쳐 가는 대상일지라도 그 속에 내재한 사물의 현상, 감춰진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물의 시원(始原)과 종말을 응관(應觀)해 보고 그 사물이 현재의 시공에 어떻게 있는가의 연기(緣起)도 아울러 살펴보는 인식이 중요하다. 자잘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그냥 스치고 지나갈 일과 어떤 인습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하는 실험정신이 발휘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본향은 따로 있고, 사람은 비치는 본향의 그림자 세계에 산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도 인간의 본향은 하늘나라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윤회한다고 설파한다. 이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다 이별이라는 다리를 건너 이 땅에 왔다.
근대사회가 산업사회에서 출발한 이래 현대 인류는 과거 농경사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동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남을 시작으로 종국에는 영원한 이별의 강을 건너야 하기에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은 본능처럼 우리의 가슴에 녹아있다. 그래서 드보르작은 그리움을 신세계 교향곡에 담았을 것이다.
「슈퍼문과 그리피스공원」부문
대보름날, 엘에이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간다. 도심에는 거리마다 번쩍이는 불빛들이 저마다의 빛을 발하고 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도심의 불빛은 영롱해진다. 화자는 숲 속에서 달빛을 바라보며 세상의 이치와 우주의 법칙을 생각한다.
화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달빛이 은은하게 흐르는 도심의 밤은 그리움을 가슴에 담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발하는 불빛, 그 오색 불빛이 모이면 신세계 교향곡처럼 아름다운 화음이 된다. 외로움, 괴로움, 무서움, 아픔, 슬픔 등도 잘 정제하면 어둠 속의 보석상자일 것이다. 지금은 플라톤의 그림자 세계가 아닌, 실제의 달빛 그림자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 산에 모여있다. 그들은 사라진 고향의 동무들과 모여 ‘옥 같은 시냇물 개천을 넘어 반딧불이를 쫓아서’ 즐기고 있다. 드보르작이 차용해서 쓴 흑인영가에서도 ‘고향’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솔트크릭의 팝휘시, 이곳에서 4,000여 년을 살아왔다고 한다. 2인치 될까 말까 한 이 작은 물고기가, 바닷물보다 너덧 배나 더 짠 얕은 물에서 아주 경쾌하게 몸을 흔들어댔다. 어렵게 찾아온 만큼 반갑기 그지없다. 물살 따라 혹은 물살을 거스르며 햇살이 일렁여 반짝이는 금모래 위에서 따로 또 같이 춤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검고 동그란 두 눈을 활짝 뜨고서 봄의 왈츠를 추고 있었다. 봄이 짝짓기 계절이라니 더욱 그 몸놀림이 경쾌한 것이리라. 이놈들은 물속에 있는 작은 녹조류를 먹고 사는데 그 짠 소금기를 신장이나 아가미를 통해 배출하는 방법을 온몸으로 터득했다.
「데스벨리」부문
화자는 팝휘시가 살아가는 물맛을 본다. 말로만 듣던 섬뜩하게 느껴진다는 짠맛이 아니다. 작년 2016년, 겨울에 비가 많이 온 탓일 게다. 미국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 데스벨리에서 작은 몸으로 활개치는 팝휘시의 감동은 단테스뷰나 자브리스키 포인트가 보여주는 감동만큼이나 크고 깊기도 하다. 오랜 세월 동안 가장 뜨겁고 가장 짠물에서 살아남은 이 작은 물고기의 생존력이 놀랍기만 하다. 이 물고기의 생존권은 자연법칙이나 재해이기도 하고, 어쩌면 인간일 수도 있고 그 지역에 사는 동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모두의 동물들은 자신을 에워쌌던 재해를 피해낸 존재들이다. 사막, 그 척박한 환경에도 살아남은 생물의 생존력이 감탄스럽다.
불모의 땅에 송사리 정도의 유선형 팝휘시는 겨울과 봄 동안 눈 녹은 물에 새끼를 낳고 무리지어 다닌다. 그러나 섭씨 60도 가까이 되는 이곳 한여름에는 물이 마른다. 이때 이놈들은 거의 다 죽어간다. 강한 놈만 습기가 있는 곳에서 다음 해를 기다리며 버틴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불꽃놀이를 “예술의 가장 완전한 형태다. 그 영상은 최고의 완성 순간에 보는 이의 눈앞에서 다시 사라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제주도 면적의 7배가 넘는 이곳에 생존하는 유일한 어류인 이놈들은 불꽃이 펑 터지고, 발광체가 빛을 내는 8개월간의 율동은 물이 마르는 순간까지 우리의 가슴을 환희에 젖게 한다. 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극적인 장면인가.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까마귀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데, 구급차 소리가 요란했다. 다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응급차 소리는 연이어 왱왱, 빨간 경광등은 쉴새 없이 돌며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어둠 속의 경사진 언덕배기 아스팔트 주차장에서 응급 심폐소생술이 시행되고 있었다. 환자가 누워 있고 응급구조원 한 사람이 심장박동술을 시행하고, 다른 응급구조원은 엠뷰백으로 호흡을 불어넣고 있었다. 한동안 시행되더니, 응급 심폐소생술을 하던 그 자리, 그 환자의 몸 위에는 하얀 보자기가 길게 덮였다. 응급구조 대원들은 돌고 도는 핏빛 등을 남기고 돌아갔다. 또 하나의 별이 새의 깃털을 타고 피안으로 날아갔다. 밤하늘의 별은 빈센트 반 고흐를 떠올리게 한다. <별이 빛나는 밤><자화상><해바라기> 등으로 고명한 고흐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시기 그림인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그린 뒤, 자신에게 총 쏜 후 까마귀의 깃털을 타고 날아갔다. (중략) 그렇다면 까마귀와 고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까마귀는 태양의 상징일 뿐 아니라 신의 사자의 역할을 하며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동물로 이해된다. 왜 고흐는 까마귀의 검은색에 의미를 두었으며, 까마귀의 역할에 어떤 기대를 했을까. 빨강·노랑·파랑 삼원색을 다 섞으면 검은색이 되듯이, 평생 그림을 한 점밖에 못 팔은 한 많은 인생, 통한의 의식을 보여주는 검은색으로 자신의 그림을 끝냈다. 거기에 자신의 고독과 절망을 다 섞으면 검은색이 되기에 까마귀를 그린 뒤에 그 깃털을 타고 피안으로 날아갔을까.
「까마귀」부문
해 질 무렵 까마귀가 길 건너 전봇대에서 울어대고, 한 응급환자가 아스팔트 주차장에서 심폐소생술을 받다 죽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다. 누구나 다 인생은 산보자(散步者)이기에 얼마를 걷다가 반드시 멈추게 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도 삶에 걸맞은 공통된 ‘합당한 죽음’은 산보를 마치고 귀가하는 장소라 했다. 이를 목격한 화자도 상황에 따라 종속되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뒤집어 보는 역주사고(力走思考)의 변주곡으로 전환시킨다. 화자는 이러한 ‘존재와 소멸’을 아스팔트 위에서 응급처리되고 있는 환자와 까마귀 그리고 반 고흐를 보며 수필로 승화시킨 것이다.
반 고흐가 느꼈던 극한 상황의 절규, 누가 말 안 해도 19세기 현대 사회를 일러 ‘위기의 시대’ ‘단절의 시대’라는 말을 사회학자들은 즐겨 사용했다. 반 고흐도 무언가 잃어가는 시대, 그런 상실감 속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 고뇌하면서도 자아를 찾고자 헤맨다. 생의 마지막 무렵 반 고흐가 <까마귀 나는 밀밭>을 화폭에 담는다. 잘 익은 밀밭 위를 나는 검은빛 까마귀를 보며 까마귀와 함께 하늘 높이 날고 싶어 했다. 결국, 넓은 들판에 나가 운명의 여신 아트로포스(Atropos)에게 기도하며 37세의 젊은 나이의 가슴에 총구를 대었을 것이라 싶다.
평자는 지난 5월, 독일여행 중 함부르크에서 꼭 찾고 싶었던 곳, 암스테르담 도시 한복판에 있는 빈센트 반 고흐 뮤지움에 들렀다. 본관 입구에서 표를 구매하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다 3층으로 된 전시관의 꽉 찬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멀티미디어 가이드를 귀에 꽂고 작품 번호를 눌러가며 작품에 대해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 앞에는 많은 관람자들이 작품 앞에서 움직이질 않았다. 아마 관람자들은 허허롭게 밀밭 위를 나는 까마귀를 보며 반 고흐가 느꼈던 삶과 외로움 그리고 죽음을 찾는 듯했다.
3. 나가면서
하루에도 많은 새로운 수필이 탄생한다. 여러 유형의 수필 시대에 홍용희 수필은 적지 아니한 기쁨을 준다. 우선 그의 수필에는 인간적인 따스한 체온이 있다. 수필 속에서의 일상은 보통사람의 삶과 하등 다들 바 없다. 하지만 그 속에는 정서와 상상 그리고 철학의 조화를 이루는, 언어적 형상화를 생명으로 하는 감동이 있다. 그렇지만 세상 인심이란 언제나 박수와 격려보다는 부정적 시각으로 흠집 내는 일이 왕왕 있다. 분명 작품의 질과 내용보다는 잘못 아닌 것을 트집 잡으려 애쓰는 이들을 말함이다. 그래도 이런 일은 하나의 개연성 있는 일로 이해하고 넘어가야만 한다.
일부의 수필문학은 독자들의 요구인 감동의 언어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사소한 신변의 일을 ‘나열하는 일’에 전념하고, 판에 못 박은 듯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인, 하나도 신기하거나 충격적이지 못한, 두루뭉술 짜맞춘 이야기의 나열에 그치고 있어 독자를 식상하게 만든다. 그런 수필문학이 이어진다면, 신변잡기니, 신변잡사니 하는 오명을 벗어나기란 요원할 것이다.
작가 횽용희는 이렇게 말한다. “젊었을 때는 자식 키우고 아옹다옹 다투면서 생활하다 보니 문학과는 멀어지기만 했다. 그런 속에서도 문학에 대한 꿈은 꾸었지만, 현실은 늘 그렇지 못했다. 숨 가쁜 일상 속에서 한가(閑暇)는 그저 바라는 희망이다. 나이가 들어 부부가 여생을 즐기며 호사하리라 것도 꿈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젊었을 때 한가로움이라야 한가로움(未老得方是閑)이다. 나이가 들어 애써 과거를 찾아내려는 한가로움이라야 그 맛이 달고 고운 것이다. 우리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일을 회상하고 그 일을 찾아 떠나려는 잠재적 본능이 있다.
어떻게 하면 나이가 들어 생활 속에서 기쁨을 빚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자신이 조우한 과거와 현실을 예술로 승화하는 일이다. 예술은 곧 생활인의 삶을 열락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실을 뭉치는 게 바로 예술이 되고, 예술은 곧 생활인의 기쁨이 아닌가.
21세기, 제4차 산업시대에 진입한 우리 시대의 전체적 양상이 빠르게 지나가고 카오스적인 얼굴로 번득이고 있다. 사물에 인터넷이 가미된 인공지능의 시대, 통섭의 이 시대에 수필문학이 살아남을 방법은, 인간정신을 기조로 한 언어미학의 집에 존재의미를 줄 수 있는 작품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1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넌픽션 최우수상
한국문협 미주지회 수필신인상
에세이포레 수필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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