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영상, 멀티 언어예술의 美學
-강정실 사진시집 『개썰매』의 세계
기 청
(시인 문예비평가)
詩가 사진을 찍고 사진이 詩를 쓰다
사진시는 멀티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화두(話頭)로 떠올랐다. 문학과 영상의 절묘한 만남, 이는 분명 새로운 문화 향유방식이다. 문학 측면에서 보면 영역의 확장이다. 문학과 영상예술의 상호보완적 결합으로 감성과 의미전달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영상과 언어예술인 시를 하나의 텍스트로 융합(融合)한 멀티 언어예술인 것이다.
사진시는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에 의해서 본격 시도되었다. 20세기 중반 그의 사진시집 '전쟁교본'(1955년 초판)에서 그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신문 잡지에서 오려 모은 사진에 4행시를 덧붙인 것으로 총 93편의 사진시가 실렸다. 전쟁의 비극과 참상을 생생하게 전해준 진실의 증언이 되어 출판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상과 언어가 서로 시너지효과를 낸 덕분이다. 그 후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하면서 사진시는 점차 독자영역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 문학평론가이자 사진작가인 강정실(한국문인협회미주지회 회장)가 사진시집 『개썰매』(문학공간. 사진 107장 & 시 107편. 246쪽)를 컬러로 발간해 관심을 끌고 있다. 강 작가는 한국사진작가협회 산타모니카 지부장과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사진 강좌를 열기도 했다. 또한 강 작가는 이미 사진 기행수필집『렌즈를 통해 본 디지털 노마드』를 출간하기도 한 멀티 예술의 중견이다. 사진작가에 의해 문학인의 손으로 본격적인 시를 입히는 작업은 미주지역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번에 발간되는 사진시집이 보태지면 보다 확장된, 언어예술의 진수(眞髓)를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사진시는 비교적 간략한 아포리즘(aphorism) 형식과 시의 독자성을 살린 완성시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사진에다 감상과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결합한 것이다. 이에 비해 후자의 경우, 사진은 시의 상상력을 북돋우는 원천이 되고 기폭제가 된다. 전문 사진작가이면서 시적 안목을 가진 경우 그야말로 금상첨화, 사진과 시의 결합은 보다 상승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경우 시가 먼저냐 사진이 먼저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치 않다. 평소에 맴돌던 시적 이미지를 어느 순간 마주친 현상에서 찍을 수도 있고 무심히 찍어둔 사진에서 새로운 시적 발상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시가 사진을 찍고’ ‘사진이 시를 쓰는’ 절묘한 작업을 통해 하나의 멀티예술을 완성시킬 것이다.
이런 기본 전제를 상기하면서 강 작가의 카메라 앵글을 따라 가보기로 한다.
현상에서 찍은 詩의 정서
만나야 하는데
만날 수 없는
한 사람 내게 있으니
가슴 아린 그리움
머리에 이고
솔방울 함께 줍던
산사(山寺)를 걷는다
-<그리움1> 전문
구정물 속에서도
순결한 자태
푸른 자락 연대 사이
피어난 봉오리 둘
곱게 정좌한
한 폭의 풍경화
마음까지 겸손해지는
자비로운 미소
온화한 침묵
곧 개화할 설법상에
오욕이 옮겨질까
얼른 발길 돌린다
-<연꽃> 전문
시 <그리움1>은 현상을 찍었지만, 회상 속 추상(정서)을 내포하고 있다. 반쯤 열린 대웅전 창문에 기대어 상념에 젖은 출가한 스님의 사진, 열린 창문은 속세를 회상하는 통로를 상징한다. 시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만남과 이별, 숙명의 모티브가 시를 쓰는 것이다. 비교적 짧은 형식의 운문이지만 아포리즘을 넘어선 완성시의 형식이다.
과거의 회상을 통해 잃어버린 순수를 반추하는 것이다. 그리움의 대상은 하나의 인물일 수도, 추구하던 가치일 수도 있다. 삶에서 추구하는 것은 다양하지만, 그것의 총체는 욕망이란 허상일지 모른다.
지나온 모든 것은 그리움일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무상일 수도 있다. 현실의 갖가지 고뇌 속에서 지난날의 ‘순수’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뒤의 시 <연꽃>은 보다 정화된 세계의 동경이 드러난다. 때 묻은 현실을 상징하는 ‘구정물’ ‘오욕’의 대비로 ‘순결’ ‘자비’가 있다.
뒤의 시 ‘연꽃’은 불교적 정화와 깨달음의 상징이다. 비록 오염된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본성은 누구나 완성된 순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현상을 찍었지만 ‘순수와 정화’라는 내면의 본질에 대한 추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곳에 오면
산타모니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엄마 품에 안겨
바다를 바라보는 다른 모녀의 모습도
사랑보다 진한 나의 추억들이
내 심장에 머물러 앉아
파도는
채워지지 않는 부모님의 빈자리에
흔적이 되어 흐르는 세월에도
마법같이 녹지 않고
기억의 파편들이 흔들어 댄다
-<이곳에 오면> 마지막 연에서
해맑은 햇살 가득 드리운 날
성묫길 입구에 서 있는 당신을 보며 무척 놀랍니다 포악스레 겨울을 견뎌낸 가지에 잎이 피기 전 제 몸에 핀 꽃을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버려서요 그래도 당신은 따뜻한 새봄맞이 길 위를 가득 덮어주고 있네요 4월의 애잔한 바람에도 여기저길 부딪히고 파르르 온몸을 흔들고 있네요 이별이 싫다며 서러움을 노래하는 당신의 모습이 아름다워요 흙발로 저벅저벅 걸어온 전생에서부터 못 다 푼 그리움입니다
살아오고
살아가다
사라지고,
또 누군가 아련한 연분홍 이 길을 걷겠지요 인생은 꽃피듯 만나 꽃 지듯이 헤어집니다
-<벚꽃 잎> 전문
앞의 시 <이곳에 오면>은 오브 랩 기법으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사모곡,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장면에 ‘과거회상’의 장면을 겹친 것이다. 현재는 ‘산타모니카’ 해변이지만 회상은 ‘광안리’ 해변을 떠올린다. 작가는 먼 이국에 새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고향과 노모에 대한 사무침은 ‘채워지지 않는 부모님의 빈자리’처럼 역력하다.
뒤의 시 <벚꽃 잎>은 ‘벚꽃의 낙화’라는 자연현상을 통해 사라짐의 무상(無常), 윤회의 섭리에 대한 각성(覺性)이 드러난다. 여성적 어조에 경어체가 따뜻하고 자비로운 자연의 본성을 느끼게 한다.
‘흙발로 저벅저벅 걸어온 전생’에서부터 ‘못 다 푼 그리움’에서 만남과 이별이란 숙명의 인연법을 깨우친다. ‘인생은 꽃피듯 만나 꽃 지듯이’ 헤어지는 덧없는 존재임을 자각한다. 두 시편 모두 이별의 무상과 그리움의 정서가 묻어난다.
삶 또는 생생한 현장성
액션, //
실내 전등이 켜지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이 흐릅니다//
거울 앞에 선 나는/ 얼굴을 보며/
내 나이 71세가 되는/ 첫날을 시작합니다//
나는 늘 하는 버릇대로/
유튜브 국내 정치뉴스의 자막을 보다가 “뚱딴지같은 정치”라고 내뱉고는 꺼버립니다/ 매일 먹는 한주먹의 약을 입에 틀어넣고/
벽에 붙여놓은 임종정념(臨終正念)이라는 사자성어를 힐끗 쳐다보며 물을 마십니다//
(중략)
그때마다 나는, 자신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棺)을 불 속에 태우려 들어가는 간접경험을 합니다 나의 손바닥에서 빠져나가는 운명은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 모든 안팎의 변증(變症)을 숨죽이고 있을 뿐, 네 안의 모든 기능은 바짝 오므라들어 40여 분 동안 포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희망은 집착과 허구를 바라보는 무지개일 뿐,
불현듯 내 어릴 때 절 부근 빗물이 인근 마을로 빠져나가는 좁은 개구멍 같은 통로에 기어들어가 다른 통로로 빠져나왔던 기억이 클로즈업 됩니다> (하략)
-<71세가 시작되는 첫날>에서
극적인 기법이 극시를 읽는 듯 생생한 현장감에 긴장을 고조시킨다. 시적 화자는 삶의 위기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생전 처음 MRI 촬영을 하면서 느끼는 충격과 절망을 어린 시절의 ‘개구멍’ 체험으로 환치(還置)하면서 극복하려는 것이다. 빠른 전개와 효과음, 줌업 그리고 회상과 현실의 오브랩 등 다양한 극적기법으로 긴장과 이완의 리듬이 적절히 조절되고 있다.
이 작품의 중심을 관통하는 것은 ‘임종정념(臨終正念)’이다. 어떤 위기에서도 마지막까지 ‘바른 생각’을 유지하려는 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와 상통한다. 지금 붙들고 있는 ‘희망’(무상한 것)이야말로 ‘집착과 허구’에 지나지 않는 ‘무지개’(허상)라는 깨달음을 통해 다시 안정과 일상을 회복한다.
푸르던 시절을 보는 듯 처음 디지털카메라를 만질 때다 분홍색 산타모니카 3가 밤거리를 출사했던 어느 봄날, 사진 촬영하기에 이른 시간이라 식당 테라스에 앉아 오가는 손님을 구경하며 식사 대신 맥주 몇 잔을 마신다 서서히 밤은 익어가고 가로등에 달린 두 개의 꽃 화분을 보는데, 뒤편 벽에 걸린 시계가 또렷이 나타난다 카메라 뷰바인드를 통해 시계에다 조리개를 조여도 꽃잎이 흐려, 뒷걸음질해 쇼윈도에 붙어서 꽃잎에 초점을 맞추는데도 보케가 나타난다
어라, 좀 전 마신 맥주에 취했나
카메라 바디에는 85mm 대구경 단초점 렌즈가 꽂혀 있다 구김살 없이 밤거리를 즐기는 표정들을 촬영하기로 했고, 폭과 화각을 넓혀주는 초광각 렌즈가 내겐 없다 그렇다고 포토샵에서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Focus Stacking은 싫고 그날 그 순간의 기억과 감정을 그대로 남겨 두는 인포커스를 선택한다 대신 밤거리 왕관 쓴 가로등에 살짝 시든 꽃잎 위로 밤 8시 25분의 성령(性靈)이 깃들게 한다.
-<밤 8시 25분> 전문
산문시 형식의 이 작품은 피사체와의 거리조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가의 의도를 부각하려는 치열한 작가정신이 드러난 작품, 생생한 현장감과 함께 작가 내면의 심리변화를 섬세하게 그린다. 원경의 시계와 근경의 꽃바구니를 대비시키면서 동시에 시계의 시각에 초점을 맞춘다. 변하는 현실의 시간은 크로노스((kronos) 개념의 무상이지만 변하지 않는 시간은 카이로스(kairos)의 영원의 시간이다. 생멸하는 현상의 시간에서 불멸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은 구도자의 구도정신이다.
예술을 추구하는 작가정신도 이와 유사한 것이다. 이 작품의 ‘왕관 쓴 가로등’을 배경으로 ‘시든 꽃’ 위의 희미한 시계를 ‘8시 25분의 성령이 깃들게 했다’는 절묘한 표현은 이 시의 백미(白眉)다. 현상의 시간을 불멸의 시간으로 포착한 것이다.
뉴프런티어 혹은 유토피아
카필라카스투의 노란 벽을 강제로 열고 끄집어낸다
42년 전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날, 서울의 구유 같은 작은 병원 수술실에서 배꼽줄을 끊어버린 후 몽고반점을 톡 건드리자 앙~하고 울며 오줌을 싸 갈긴다
이날부터
가,나,다,라,마,사…아,야,어,여,오,요…… 해독할 수 있도록
불가해한 언어의 암호를 하나씩, 해바라기 햇빛과 청자 항아리 달빛에 대한
수만 가지 해독법을 체득하게 반복시키며 화려한 인생의 수채화를 그리는 날을 위해
그 언어마저 이 세상에서 꽃 필 수 있는 그런 갖가지 오묘한 빛깔을 가슴 속에 침잠시켜 주려 했다
(중략)
생(生)은 마차가 출발하는 곳, 둥근 밭 옥수수 열매가 풍성한 장소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고
고향도 바로 여기가 되는 거야
-<아들과 손자> 중에서
별이 쏟아지는 밤에도
시를 쓸 수 있는 이곳에
우리의 삶터로 정해
건강한 몸과
튼튼한 두 날개가 있어
도란도란 새끼 놓고
한세상 좋은 추억을 만들어
행복을 만들어 봅시다
-<삶터> 결미 부분
바람 불고 비 오는 날과
별이 쏟아지는 밤에는위 두 작품에서 강 작가의 위 두 작품에서 강 작가의 뉴프런티어(New Frontier) 정신, 혹은 유토피아(utopia) 지향을 읽을 수 있다. <아들과 손자>에서는 한 생명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산문시 형식으로 풀어간다. 무의식에서 떠오르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심리적 실험적 방식이다. 마지막 부분에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고/ 고향도 바로 여기가 되는 거야”
개척정신,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강 작가가 이민을 결심한 것도, 이민생활의 온갖 역경을 극복한 것도 바로 이런 강인한 정신의 결단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자식과 후대에 전하는 체험적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다.
아침이 온통 눈부시다,
며칠간 내린 눈발은
온 누리에 펼쳐져
세상은 제 모습 숨기고
초승달 그 빛마저 헤치지 못하게
알래스카 북반부의 겨울은
낮의 길이가 짧고 밤은 길기도 하다
그래도 술 먹고 길거리에서
동태가 되지 말라고
뾰쪽한 집 꼭대기가 드문드문 보인다,
아침 공기가 냉동실 온도인데도 목구멍은 포도청이라 눈곱 닦으며 잠자는 개들을 깨워 몇 군데에 배달을 한다마는, 마누라가 운영하는 햄버거가게 골방에서 가끔 사주팔자 지랄 같은 서너 명이 모여 죽치고 앉아 창살 없는 감옥 같은 긴긴 밤의 동토(凍土)에서 일곱 패 화투짝이 내 손아귀에 신명 나게 놀아날 생각을 한다 실눈으로 상대방을 꼬나보며 수를 가늠하지만, 국방색 담요 위로 던져지는 화투짝에 달러 지폐가 일장지간(一場支干) 복병이다,
순간,
돌아오던 길에 길잡이가 갑자기 낑낑대며
거친 숨소리 내며 절뚝인다
유리조각을 밟았다 싶어
잠시 멈추고 길잡이의 다친 발에
가죽양발을 신기고
눈 위에 회초리를 치며
힘찬 소리를 지른다
“빨리 집에 가자. 앞~으~로, 앞~으~로,”
-<개썰매> 전문
이 시는 눈이 많이 오는 겨울날, 알래스카 북방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생활상을 담은 작품이다. 이들의 단조로운 생활상을 사실적이면서도 정겹게 표현하고 있다. 원료배달은 거의 스노머신이지만 개들의 건강상태를 위해 개썰매로 운반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한국인 대부분은 알래스카 원주민을 상대로 중국요리점이나 햄버거 가게, 간혹 택시를 운영하고 있다. 술판매가 금지된 알래스카에서 한국인들은 손님 없는 한가한 날, 가끔 가게 골방에 모여 긴긴 밤을 유일한 낙인 화투짝을 갖고 국방색 담요 위에서 꿍쳐놓은 술, 한두 잔을 마시며 놀이한다. 이렇게 미국 본토에서 실직해 돈 없고 나락으로 떨어져 오갈 때 없는 한국인들이 최후로 선택하는 곳이 알래스카의 식당종업원이다. 이곳 식당에서 매일 12시간 식당보조로 일하며 먹고 자고 월급을 꼬박 모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에 모인다.
그렇다. 평균 섭씨 -50도의 강추위의 북극과 남극을 우리 인간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끊임없이 도전해 왔다. 19세기 말까지 세계지도의 빈곤은 이곳 남극과 북극뿐이었다.
알래스카 '위로'에서 '놈'까지 9일간 장장 1,600km의 멀 길을 달리는 ‘아이디라 로드’ 개설매를 볼 수 있다. 보통 18마리의 개를 사용하며 사람은 카리브라라는 사슴 가죽을 덮어쓰고 얼굴에 닥치는 바람을 막기 위해, 고글이나 두꺼운 일반 마스크를 사용하여 설원을 질주한다. 험난한 곳을 달리다 보니 많은 개와 사람이 다치게 되고, 완주라인을 보게 되면 사망한 개들의 빈자리가 쉽게 눈에 띈다. 한밤중에 개들과 빙하를 달리다 보면 간혹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행운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사진시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독자성을 가지는 것이다. 마치 부부처럼 둘이면서 하나가 되는 융합(融合)의 미학이다. 서로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협동의 묘수(妙手)를 찾는 것이 관건이다.
이 사진시집에서도 그러한 노력과 정신이 역력히 드러난다. ‘시가 사진을 찍고’ ‘사진이 시를 쓰는’ 그런 조화와 균형의 매력은 이 시집을 읽는 독자에게 큰 감명을 주리라 믿는다. 더욱이 COVID 팬데믹으로 지친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치유의 묘약(妙藥)이 되어주길 바란다.
강정실 작가는 사진시집 『개썰매』 출간으로 평론, 수필, 시를 포괄하는 언어예술에다 사진영상을 결합시킨 멀티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그의 시도 날개를 달아 더욱 원숙의 경지로 나아가길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이글을 맺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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