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희 시인

조회 수 1098 추천 수 1 2020.03.01 10:38:00

 

                                              자연과 교감하는 영성의 시학
                                                      -김영숙의 시


                                                                                 송 명 희 시인

 


1. 자연과 교감하는 영성의 순수체험

미국 시카고에서 목회자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는 시인 김영숙이 첫 시집을 발간한다. 그녀는 1985년에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고, 제33-34대 미국 시카고문인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시인이다.
시집의 내용을 일별해 볼 때에 자연에의 교감을 표현한 시,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디아스포라로서 고향에 대한 향수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시, 기독교적 신앙을 표현한 시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시들이 전체적으로 문학적 상상력과 결합된 기독교적 영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라고 시편 95편에 적혀 있다. 김영숙의 시는 그야말로 감사한 마음으로 신을 찬양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자연과 교감하며 마침내 기독교적 영성으로 그 모든 것이 고양된다. 
어떤 시가 개인적 신앙 고백, 신의 영광에 대한 찬양, 참회 등에 머물러 있다면 그 시는 전형적인 신앙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시가 독자에게 보편적인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교조적인 기독교 신앙의 전형성을 반드시 벗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신앙시는 독자를 축소시키고, 시적 의미를 협소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시적 감동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앙시가 문학으로서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교리나 세계관에 대한 직접적 진술을 넘어서서 종교적 상상력과 시적 상상력이 고도로 결합된 영성(spirituality)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고다드(M. C. Goddard)에 의하면 영성은 몸과 마음과 영의 내적 조화를 만들어내는 통합적 에너지이다. 즉 영성은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모든 영역에 관여하는 동시에 이들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통합된다. 그것은 인간 삶의 가장 높고 본질적인 부분으로서 진정한 자기초월을 향하는 인간의 역동성을 통합하려는 고귀하고 높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삶의 실제이다. 영성은 인간의 내적 자원의 총체로서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과 타인 그리고 상위의 초월적 존재와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시키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통합하는 에너지이다. 또한 영성은 존재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주관하게 하고, 당면한 현실을 초월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지닌다.
김영숙 시인의 시에서 「은총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소 되게 하소서」, 「기도」와 같은 시들은 전형적인 신앙시이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은총’, ‘성소’, ‘기도’와 같은 시어나 “삶의 여정을 섬세히 빗질하시는 주님”, “주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십자가 아래 엎드려/가슴 저리도록/기도하리”와 같은 시구는 명시적으로 이 시들을 전형적인 신앙시로 읽히게 한다. 하지만 김영숙 시인의 시에서 이러한 신앙시는 아주 드물게 발견될 뿐이다. 보다 많은 시들은 자연과 교감하는 시적 상상력의 토대 위에서 발현되는 기독교적 영성을 표현함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한다.    
「당신에게선」과 같은 시는 신앙시의 전형성을 벗어남으로써 시적 의미와 감동을 보다 풍부하게 만든다.

 

당신에게선
아름다운 향기가 있습니다

돌아가는 솜사탕 속
아련한 단내 풍겨 나오듯

당신을 생각하는 강가에
부딪히는 물살로 서로 만날 때

당신에게선
들꽃 같은 향기가 흐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면
당신을 향한 내일이 언덕을 넘고

앉은뱅이 상념의 시간들보다
바람으로 먼저 일어서는 풀잎 향기여

눈부시도록 지울 수 없는 당신의 향기에
순전한 일상으로 통로를 열겠습니다
                       -「당신에게선」전문

 

이 시에서 ‘당신’이라는 존재는 여러 의미로 해석된다. 마치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이라는 존재성이 사랑하는 여성과 같은 에로스적 의미로 해석되는가 하면, 민족, 조선, 조국의 독립과 같은 민족 공동체적 의미로, 부처, 불교적 진리, 중생과 같은 불교적 의미로 해석되는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듯이…. 김영숙 시의 ‘당신’도 꽃이나 풀, 나무와 같은 자연, 절대자인 하나님과 같은 종교적 의미, 몸과 마음과 영의 내적 조화를 만들어내는 통합적 에너지로서의 영성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을 통합한 총화라는 해석이 타당할 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은 ‘당신’이란 시어가 가진 다의성이자 애매성으로부터 나온다.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윌리엄 엠프슨(William Empson)은 애매성(ambiguity)이 현대시의 결정적인 특질이라고 했다. 압축된 언어를 사용하는 시에서 언어의 애매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내용과 의미가 풍부해진다. 시에서 어떤 단어들은 핵심적인 의미와 더불어 풍부한 암시성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둘 이상의 의미를 다 수용하는 융통성 있는 문맥을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에서 애매성은 시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므로 시인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애매성은 산문보다는 시에서 고도화되며 의미가 깊어진다.
「당신에게선」에서의 ‘당신’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면서 동시에 그 총화이다. 즉 자연, 종교, 영성 등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면서 궁극적으로 그 모두를 통합하는 대상인 것이다. 더욱이 ‘당신’에게서는 ‘향기’, 즉 향기로운 좋은 냄새가 난다. 그런데 그 향기를 단순히 후각적인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의 몸이 감각할 있는 후각적인 향기를 넘어서서 영혼이 발산하는 정신적 향기, 즉 영성의 향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당신’이라는 대상을 통해서 영성의 황홀한 향기를 느끼고, 그 황홀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녹여내 일상화하며 살아가고자 다짐한다. 
시인은 여러 대상들을 통해서 영성을 감지한다.    

 

어둠이 내린다
마음에 문을 열지어다
어디 빛나는 곳에서
안개 서서히 거닐고
켜켜이 쌓인 심해에서
숱하게 꽃이 필 때
안식을 위하여 잠에서 깨어날지니
강물에 별이 뜨고
산으로 강이 흘러
젖은 꽃잎 달려와
만나면 입 맞추고
비비대는 나무들 바람에 탄다
맨발로 어둠을 마셔대며
-「흐름」 전문
 
「흐름」이라는 시에서는 어둠이 내리는 저물녘의 황홀한 일체화의 신비한 순간이 표현되고 있다. 어둠과 빛의 거리가 사라지고, 빛이 닿을 수 없는 심해에서도 꽃이 피며, 강물에 별이 뜨고, 산으로 흘러든 강물에는 젖은 꽃잎이 달려와 입을 맞추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은 비비댄다. 입맞춤이나 비비대는 동작은 일체화와 합일, 그리고 사랑을 의미하는 시어이다. 즉 영성과 만나는 충만한 한순간, 초월적 사랑이 흘러넘치는 황홀한 한순간의 순수체험을 저물어가는 시간 속에서 시인은 발견하고 있다.  

 

새벽이 눈을 뜬다
동쪽에서 붉은 빛으로
어둠에 눈꺼풀 들어 올리면
생명처럼
하루가 빛으로 호흡을 준비한다
부지런한 산과 강도 서두르고
바다 속 잠자던 파도가
조심스레 물 이불 들어올리며
시작은 참으로 귀한 것
절망도 넘어지게 하는
조용한 힘이 있다
계집아이 초경 같은
새벽 빛깔이
붉으스레 판타지아
아침을 연다
-「새벽이 눈을 뜬다」 전문

 

「새벽이 눈을 뜬다」에서는 새벽이라는 시간의 생명, 경건함, 순수함, 신성성을 노래한다. 새벽은 “부지런한 산과 강도 서두르고/바다 속 잠자던 파도가/조심스레 물 이불 들어올리며”에서 보듯이 모든 자연을 일깨우는 시간이다. 그리고 “절망도 넘어지게 하는/조용한 힘이 있”는 경건하면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 창조적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 시인은 충만한 영성을 느낀다. 그리고 영성을 구현하고 있는 듯한 아침놀의 붉은 빛깔에서 환상적인 전율을 느낀다. 자아와 세계, 나와 초월적 절대자가 합일된 한순간의 충만한 영성을 시인은 새벽이라는 시간에서 포착하고 있다.   
         
소리 없이 오는 것이 어디 눈뿐이랴
눈 맞으며 흐르는 겨울 강이 그렇고
서쪽 하늘 지는 해가 그러하거늘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것이 어디 눈뿐이랴
피어나는 꽃들 터지는 몸짓 있어도
꽃잎 지는 소리 스치는 바람만이 알 뿐인 걸

오늘도 노을은 하늘을 붉게 그리건만
소리 없이 젖어오는 인연은
가슴으로 조용한 숲이 되어 서있다
-「숲.3」 전문

 

「숲.3」은 눈, 겨울 강, 지는 해, 피어나는 꽃, 지는 꽃잎, 노을 등을 통해서 영성을 느끼는 자아를 표현하고 있다. 주체의 영성 체험은 눈, 강, 해 등 자연이란 대상을 통해 소리 없이 다가오는 신비로운 체험이다. 그러나 “꽃잎 지는 소리 스치는 바람만이 알 뿐인 걸”에서 보듯이 자연과 접촉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속에 내재된 영성의 깊은 신비를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결한 영혼과 깊은 신앙심을 지닌 자만이 그것을 포착하고 알고 느낄 수 있다.

 

이른 아침
하늘에 떠있는 구름만이
이완하는 것이 아니지
유월 아침 궁창에
눈처럼 더 가벼이 날리는 것
한여름 밤 반딧불에 마음 걸고
어디든 몸 닿는 곳 썩어질 수 있다면
생명일 테니
존재의 흔적 들풀 아래 바람으로 심고 가리
     -「유월의 홀씨」

 

「유월의 홀씨」라는 작품은 그러한 영성을 “유월 아침 궁창에/눈처럼 더 가벼이 날리는” 들풀의 홀씨를 통해서 포착하고 있다. ‘창공’이나 ‘푸른 하늘’ 같은 시어가 아니라 굳이 ‘궁창(穹蒼)이란 시어를 선택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궁창’이 땅 위에 세워진 기둥, 즉 높은 산 위에 걸쳐진 단단하고 평평하며 넓게 펼쳐진 공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궁창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과 그분의 영원성과 초월성, 그리고 절대 주권을 나타내는 가시적 공간이다. 시인은 “어디든 몸 닿는 곳 썩어질 수 있다면/생명일 테니”처럼 하늘을 나는 들풀의 홀씨에서마저 영성을 느낀다. 즉 유월 하늘을 눈처럼 가볍게 날고 있는 들풀의 홀씨를 통해서 생명의 흔적을 남기라는 절대자의 섭리를 깨닫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에게 어디 곳에라도 떨어져 썩어짐으로써 생명 또는 신앙을 심으라는 신의 섭리를 교시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남편과 자신이 멀리 미국의 시카고의 낯선 땅까지 들풀의 홀씨처럼 날아와서 목회활동을 하는 것도 신의 섭리를 구현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그처럼 모든 존재에는 초월자의 보이지 않는 절대적 섭리가 말없는 가운데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잘려나간 상처마다
생각의 창이 열린다

고통 없는 고뇌 없고
내어줌 없이 거둠이 없음을

배려가 있을 때 소통이 오고
너그러움이 평안을 주듯

베임으로 숲을 키우는데

나무는
하얀 분 바르고
무슨 생각에
밤낮을 뜬눈으로 보내는 걸까
-「자작나무의 하루」전문  

                       

「자작나무의 하루」에서 시인은 “잘려나간 상처”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상처, 고통, 고뇌, 내어줌, 배려, 너그러움, 베임을 통해서 거둠, 소통, 평안, 숲을 키우는 우주적 질서를 깨닫는다. 자작나무의 가지가 잘려나간 상처야말로 거대한 자작나무 숲을 이루는 고통이요, 내어줌이요, 배려요, 너그러움이다. 시인은 상처를 통해서 아픔, 고통이 아니라 소통과 평안을 통찰하고 있다. 시인은 굳이 자작나무의 상처에서만 그런 것을 통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상처도 그와 마찬가지일 터이다. 상처는 단순한 아픔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에게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헌신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이며, 자기희생이다. 헌신, 배려, 희생과 같은 덕목이 실천될 때 거둠, 소통, 평안의 세상이 구현될 수 있다. 대학생 때부터, 특히 목회자의 아내로서 기독교적 신앙 속에서 수십 년을 살아오는 가운데 체득한 헌신과 배려와 자기희생의 인생관(세계관)이 자작나무의 상처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쏟아지는 장대비 아래
숨죽이며 흐르는
강을 보았습니다.

낙엽을 이고 가는 물
바람에 밀려 옆길로 가다
넘어지기도 하는 물

분명 시끄러울 법도 한데
부서지며 따라오는 강

철 늦은 장대비 틈으로
낮달 냄새가 흐르고
겨울을 기다리듯
강을 보았습니다

내 안의 여백을 불러내어
숲으로
강을 만나듯
가을 강물로
내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가을날」 전문

 

사티어(Satir)는 영성을 자기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과 자기 밖에서 내 안으로 유입된 것들이 과거-현재에서 관계를 맺는다고 하였다. 즉 안과 밖이 관계를 맺고, 나와 초월자가 관계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삶의 경험이 열린다는 것이다.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이성과 감정, 성과 속, 긍정과 부정, 내세와 현세의 이분법적인 구별에서 벗어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총체적인 경험이 바로 영성이다.
「어느 가을날」에서 화자는 철 늦은 장대비 사이로 숨죽이며 흐르는 가을 강을 바라보고 있다. 화자가 바라보는 강물은 단순히 자연으로서의 강물만은 아닌 듯하다. 강물은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숨죽이며 조용히 흐르고, “바람에 밀려 옆길로 가다/넘어지기도 하는”, “분명 시끄러울 법도 한데/부서지며 따라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강물이 흘러가는 그 길은 세상을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풍파를 의미하기도 하고 결코 쉽지 않은 신앙의 길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처럼 해석된다. 그러다가 화자는 “내 안의 여백을 불러내어” 강을 만나고 “가을 강물로/내가 흐르고 있었습니다”처럼 마침내 강물과 하나가 되는 일체화를 이룬다. 제1연에서 제4연에 이르는 동안에는 강물을 바라보는 주체인 ‘나’와 대상인 ‘강물’ 사이에 거리(distance)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마지막 제5연에 이르면 주체인 나와 대상인 강물 사이의 거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주체와 객체는 하나를 이룬다. 이때의 일체화는 주체인 내가 흘러가는 강물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신앙을 얻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화자가 강물을 통해서 얻은 영성은 겸손이며, 순응이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이다. 그것은 시인이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하는지를 깨달은 지혜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기독교적 인생관을 ‘강물’이란 메타포를 통해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행복과 그리움의 원천으로서의 고향과 어머니

그럴 줄 알았다
언제든 찾아가면 그 시절로 돌아가 푸근히 품어줄 곳

이방인으로 살다 반백 되어 찾아가니
사람들이 바뀌었다

집이 사라졌고 대문 밖 커다란 대추나무도
바람과 함께 흔적 없다

철없는 외투처럼
깊게 뿌리내린 기억 밑으로 강이 흐른다

내가 세상을 처음 만나
엄마와 숨을 나누던 그곳

한겨울 굴뚝새가 찍어놓은 눈꽃부터
사시사철 꽃이 피고 지던 집

뒤뜰 화단 빼곡히 차지한 백합 향에 행복했던
진천군 지암리 입장골

집을 떠나온 후 실타래 길 걸으며
자갈 돌멩이 가슴으로 수없이 굴러 들어와
이끼 얹히는 작업이 시작되었던 나
 
청춘이 훨씬 지난 이방인의 생애는
세월의 흔적으로

닳아진 뼈의 느슨한 현실과 출렁이는 슬픈 근육
반 박자 늦어지며 비워지는
-「그리운 흔적」부분

 

고향을 떠나 타국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을지라도 이주민에게 있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거의 필연적이다. 화자는 지금 시카고의 집 옆으로 흐르는 시카고강을 바라보며 유년의 고향에 대한 추억에 잠겨 있다. 창밖에는 “바람 한 점 없는 비가 나뭇잎 두드리는 소리로/요란한 밖의 표정을 알린다.” 화자는 “닳아진 뼈의 느슨한 현실과 출렁이는 슬픈 근육”에서 드러나듯이 “청춘이 훨씬 지난” 반백의 머리를 하고 있다. 즉 미래를 꿈꾸는 나이가 아니라 과거를 회상하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화자에게 행복을 주었고, 처음 생명을 받았던 “내가 세상을 처음 만나/엄마와 숨을 나누던 그곳”은 이미 현실 속에는 부재하는 공간이다. “진천군 지암리 입장골”이란 지도상의 지명은 존재하지만 그의 기억 속의 행복했던 고향집과 다정했던 고향 사람들은 이미 떠나고 없기 때문이다. “대문 밖 커다란 대추나무”가 있던 집, “한겨울 굴뚝새가 찍어놓은 눈꽃부터/사시사철 꽃이 피고 지던 집”, “뒤뜰 화단 빼곡히 차지한 백합 향에 행복했던” 집, 즉 진정한 장소감으로 충만했던 고향집은 단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응달밭 파랗게 올라온 청무 뽑아/손톱으로 돌돌 벗겨 먹던 그곳”, ”파 꽃 부추 꽃이 심겨진 대로/어우러져 핀 내 살던 그곳”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본들 더 이상 이 지상에는 실재하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 이국땅으로 이주한 삶은 “집을 떠나온 후 실타래 길 걸으며/자갈 돌멩이 가슴으로 수없이 굴러 들어와/이끼 얹히는 작업이 시작되었던 나”에서 보듯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이제 나이도 들었다. 창밖에 빗소리가 요란한 비 오는 날 오후에 시카고강을 바라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 있는 동안 추억은 “잘 익은 으름 향기의 까만 씨앗처럼”처럼 선명하고 또렷하게 화자의 마음속에 떠오른다. 기억 속의 집과 고향은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또렷하게 마음속에 빛을 발하며, 행복했던 유년의 소중한 추억들을 환기시킨다.
       
늦가을 낙엽 쓸리는 소리가
당신의 마른 목소리에서 지나갑니다

한두 달 사이 볏짚 단같이 가벼워진
당신의 육신

주춤거리는 기억의 언덕을
풀어진 말초신경처럼 힘없이 넘으며

지구 반대쪽에서 보내온
푸석한 아! 당신의 목소리

그리움에 닿을 수 없는 눈물은
집 옆으로 흐르는 강이 되어

굽이굽이 사무치는 물결로
말없이 떠나가고

절절히 녹아들어 미어지는 가슴
이목 분간할 틈도 없이

당신을 향한 그리움
밤빛 소나기로 퍼붓습니다

아! 그리운 어머니
-「사모곡」 전문

 

고향과 더불어 시인에게 원초적인 그리움을 환기하는 존재는 어머니이다. 더구나 현재 어머니는 지구 반대편에 계셔서 전화 통화로나 겨우 접촉할 수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멀리 떨어져 만나 볼 수 없기에 더욱 절절한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더욱이 어머니는 “늦가을 낙엽 쓸리는 소리” 같은 메마른 목소리에, “한두 달 사이 볏짚 단같이 가벼워진/당신의 육신”을 하고 있고, 이제 기억마저 “주춤거리는” 늙고 힘없는 상태가 되었기에 더욱 그립고 가슴이 아프다. 그 어머니에게 가 닿을 수 없어 솟구치는 그리움과 연민의 눈물은 집 옆으로 흐르는 강이 되어 “굽이굽이 사무치는 물결”로 말없이 떠나간다. 화자의 무의식은 강물이 되어 어느새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절절히 녹아들어 미어지는 가슴”의 멈출 수 없는 그리움은 “밤빛 소나기”처럼 주체할 수 없이 퍼붓는다.

 

강이 흐릅니다
뒤도 없이 앞으로만
숙명처럼 강이 흐릅니다

긴 밤 뒤척이시던
어머니의 잔 기침소리

그리움에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와
내 집 문 앞에 서성이다
어머니 나이 같은 달빛과 함께
강이 되어 흐릅니다

세월은 그림자로 강을 품고
어릴 적 어머니 등에서 들었던
자장가를 부르며
쉬지 않고 흐르는 강

오늘 밤
유년의 오선지를 따라
나도 강물이 되어 흘러갑니다
-「강물이 되어」전문
  
 무의식(unconsciousness)을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억압되거나 금지된 충동과 욕구를 포함하는 정신의 영역으로 파악했던 프로이트(Sigmund Freud)와는 달리 칼 융(Carl Gustav Jung)은 무의식을 내 안에 있지만 나의 의식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미지의 정신세계로 파악했다. 시인은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강을 떠올린다. 강은 바로 어머니의 양수에 대한 그녀의 무의식이 떠올려낸 물질적 이미지이다. 「강물이 되어」는 태아시절 양수로 우리를 감싸던 절대적 평화와 편안함에 대한 무의식적 회귀본능을 나타낸다. 그것은 일종의 요나콤플렉스(Jonah complex)이다. 프랑스의 현상학적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가 『공간의 시학』이라는 저서에서 말한 요나 콤플렉스는 어머니의 태반 속에 있을 때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형성된 이미지로서, 우리들이 어떤 공간에 감싸이듯이 들어 있을 때에 안온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모태회귀본능을 의미한다. 「사모곡」과 「강물이 되어」에 나타난 ‘강물’은 어머니란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무의식적 회귀본능과 요나콤플렉스, 평안과 평화, 그리고 보호를 갈구하는 시인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강물이다.

 

갈 수 없는 섬 안에
어머니의 언어가 살고 있습니다.

발을 내딛는 옆이라면 문을 열고
들여다 볼 수 있으련만

표정으로 짐작만으로
말을 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많은 질문들 켜켜이 쌓아
생각의 한계를 잘라놓고

언어들은 당신이 갈 수 없는 심해
어딘가에 떠돌아다니다
길을 잃었나 봅니다.

탯줄로 시작하여 팔십을 이어온
공간의 흔적을 수없이 가지치기 하며
다듬어온 당신의 젊은 날들

빳빳이 풀 먹인 하얀 모시옷도
마디마디 바람이 들락거리는 세월 앞에
일 분도 못 기다리는 기억이 되어버린 당신

가슴 저린 당신의 슬픈 언어는
빈껍데기 우렁처럼
메아리로 부딪혀 돌아옵니다
     -「어머니의 언어」전문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토록 그리운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의사소통마저 부자유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시인은 “갈 수 없는 섬 안에/어머니의 언어가 살고 있습니다”라고 진술하는가 하면, “언어들은 당신이 갈 수 없는 심해/어딘가에 떠돌아다니다/길을 잃었나 봅니다”처럼 육지와 단절된 ‘섬’과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심해’의 이미지를 통해서 소통 단절의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소통 단절의 안타까움은 “발을 내딛는 옆이라면 문을 열고/들여다볼 수 있으련만”이라는 표현에서도 절절하게 드러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연결하고 매개하는 것은 결국 말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는 언어로 소통하고 언어로 감정과 생각을 교환한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에 의하면 언어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서 분리할 수 없는 행위라고 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의 언어적 소통의 장애는 불편을 넘어서서 화자로 하여금 깊은 단절감과 슬픔을 갖게 한다. “표정으로 짐작만으로/말을 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지만 그것은 “빈껍데기 우렁처럼”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올 뿐이다. 즉 어머니와의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에는 한계가 있고, 그로 인한 소통 단절의 상황에 시인은 안타까움과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다. 늙고 병든 어머니를 연민하는 딸의 안타까운 심정이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생각과 마음, 감정이 통하는 대상과의 원활한 소통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이다. 

 

가슴 한쪽에 
느닷없이 분신이 밀고 들어와
어수선한 마음
겨울 칼바람보다 더 시리다

찰떡같은 세월로 서른 해를 함께한 사람
이해 없이 숭숭 구멍 뚫린 치즈 같은
마음 보내올 때
미어지는 가슴 중심 세우기에 서럽다

심해 바닥까지 슬픈 마음 가라앉는 것

눈물도 소금이 된다는 비밀과
동일한 이유라는 것을

육십에
통증으로 몸을 일으키며 읽는다
-「긴 하루」 전문

 

「긴 하루」는 분신 같은 자식이나 삼십 년을 함께한 남편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외로움을 표현한 지극히 인간 냄새가 나는 시이다. 이처럼 솔직한 자기 고백의 시가 없었다면 앞에서 언급한 시들이 다 가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분신처럼 여기며 사랑하고, 찰떡같은 친밀감으로 삼십 년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때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관계이다. 그것은 아무리 친밀한 부모자식간이나 부부간이라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살다보면 아무리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절대적 동일성에 때로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마음이 칼바람보다 더 시리고, 슬픔으로 가슴의 중심이 미어지며, 심해바닥까지 슬픈 마음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온몸이 통증으로 아프다. 왜냐하면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더 외롭고 더 아픈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 존 그레이(John Gray)는 오죽하면 남녀 간의 언어와 사고방식의 차이와 소통 불능을 ‘화성에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표현했을까? 그런데 이러한 차이가 남녀 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다 존재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상대가 만일 우리를 사랑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이러이러하게-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행동하리라는 그릇된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믿음을 벗어나 서로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존중할 때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실망과 상처는 줄어들 수 있다. 시에서 사용한 ‘분신’이란 시어를 볼 때에 잠시 화자는 상대방과 나의 차이를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친밀한 가족관계일지라도 분신이 아니라 나와 다른 개체인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는 경계가 중요하다. 각자 자신의 영역이 타인의 영역과 구분되는 개체의 경계가 매우 중요하고, 그것이 있어야 건강하게 관계가 오래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개체 사이에는 차이가, 특히 언어의 표현과 사고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눈물도 소금이 된다는 비밀과/동일한 이유라는 것을//육십에/통증으로 몸을 일으키며 읽는다”에서 보면 화자는 이미 존 그레이가 지적했던 삶의 지혜를 깨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물과 통증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런 아픈 경험마저도 삶에 있어서 소금과 같은 소중한 경험이라는 것을 육십의 연령은 이미 깨닫고 있다. 여기서 “읽는다”는 것은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이 시에서 ‘소금’은 기독교적 상징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눈물도 소금이 된다는 비밀”을 통찰하는 시인의 흔들리지 않는 기독교적 신앙심, 그곳에서 우러나오는 겸허한 자기성찰, 순수하고 견고한 영성이 고백을 넘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변주되고 있다. 
김영숙 시인의 시가 표현하고 있는 자연과의 교감, 행복했던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궁극적으로 기독교적 영성의 세계로 수렴된다. 그녀의 시는 기독교의 교조적이고 전형적인 신앙시의 스타일을 벗어나 문학적 상상력과 결합된 영성을 표현함으로써 보편적 공감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가는 확장성과 울림이 있다. 훌륭한 장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주관적인 기독교적 신앙을 보편적인 영성으로 고양시킨 기독교적 영성시의 한 전범을 그녀의 시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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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52718(69)

학력: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경력:부경대학교 국문과 교수 역임

데뷔:1979'세계의 문학' 등단

수상:2002 6회 부경학술상

경력:2006 26대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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