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것에 대하여
- 전혜린과 가을
김 붕 래 수필가
“귀가 멍해지는 소음 속에서도 완전히 정지된 내면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나는 뼛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느낀다. 정말로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달인 것 같다. 옷에 달린 레이스 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속에서 불필요한 것을 떼어 버려야 하겠다.”
전혜린의 수필 중 한 토막입니다. 굳이 명동백작 이봉구 씨의 증언을 듣지 않더라도 그녀는 ‘은성주점’ 같은 곳에서 실로 많은 사람들과 인생과 예술을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외로움이 광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뼛속까지 내가 혼자’라고 적을 수밖에 없을 만큼 가을은 그녀에게 더 큰 외로움의 그늘을 지워주었나 봅니다.
몇 장 남지 않은 캘린더, 잠들 틈을 주지 않고 지성으로 울어대는 귀뚜라미, 청명한 하늘이 유혹하는데도 서울을 벗어날 수 없는 자질구레한 일상을 느끼는 순간, 가을은 운명처럼 우리를 고독하게 합니다. 그러한 고독 속에서 범인들은 술이나 마셔댈 때 시인은 고독을 배경으로 한 최후의 고백과도 같은 가을의 주옥편을 완성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마음 놓고 외로워하게 하라.
깊은 우물에 달빛을 주고
버려진 새 둥지에 바람이 담기게 하라.
가을은 연인을 버리고 연인이 가버린 계절
떠나는 사람을 잘 가게 하라.
잘 익은 사과들의 과수원같이
잘 익은 고독의
나는 그 섬이게 하라.
- 김남조 <가을 샹송>
외로울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폭소 대작전’ 같은 코미디 프로를 보지는 않습니다. 한적한 들길을 걷든가, 젤소미나의 가련한 사랑이 폐허처럼 가슴에 와 닿는 <길> 같은 아주 슬픈 영화를 보고 싶어 합니다.
기쁨으로 외로움을 달랠 수는 없습니다.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것은 만남이 아니라 떠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승리의 순간 우리는 교만해집니다. 만남의 순간 우리는 서로 탐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떠나보내면서 우리는 더 뜨겁게 사랑해 주지 못했음을 아파하며 또 다른 사랑의 법칙을 배우게 됩니다.
가을은 떠나는 계절이기에 아름답습니다. 김남조 시인이 사는 ‘섬’의 주민들은 모두 정갈한 의상을 하고 마음은 그의 옷보다도 더욱 조용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마을 주민들은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들국화의 사연에 대해서 모두 익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창 밖에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끝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고
등불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쌓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 갔다.
나도 이제 한 잎의 낙엽으로 내리고 싶다.
- 황동규 <10월>
밤 기차를 타 보고 싶어지는 것은 차창으로 멀리 보이는 인가의 등불을 통해 묘한 향수 같은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고향 마을의 누렁이는 밤의 정적을 도와 몇 번 소리를 낼 뿐, 도회지의 셰퍼드와 같이 영악하게 짖지는 않습니다. 이제 화로 대신 안방은 텔레비전이 점령해 버렸고, 누런 황소는 입속 가득히 배합 사료를 씹을 뿐 아이들이 베어오던 ‘꼴’ 맛을 알 턱이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고향이 있다는 것은 마지막 축복입니다.
우리는 100년 전 무엇이었는지 100년이 지난 후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잎 진 그 자리에 새순이 돋아난다는 것은 압니다. 지는 잎을 허락하고 새 생명을 약속하는 대지의 넓은 품처럼 고향은 가을이면 한번 가보고 싶은 마지막 약속의 땅입니다.
황동규 시인이 그리워한 불빛은 고향 대청마루에서 서울로 유학 간 아들을 기다리며 매달아 놓은 어머니의 등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사랑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라.
꽃 내음 보다 마른 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며
눈 감은 채 고즈넉이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소 등불 하나 켜 놓고 싶어라.
서 있는 이들은 앉아야 할 때
앉아서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
두 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리거라.
- 유안진 <가을>
이 세상 사람 중의 반은 희망을 양식으로 하여 살고, 나머지 절반은 포근한 추억에 안겨 살아갑니다. 때로는 추억에 의하여 더러는 희망을 양식으로 하여 살아가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외로움이 위안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꼭 함께 있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은 겨울의 한복판이듯 한 걸음 물러서서 보아야 더 큰 산을 볼 수 있습니다. 사원의 기둥들이 서로 떨어져 있듯 사랑에도 간격이 필요합니다. 외부가 차단되면 내부의 문이 열리는 법입니다.
가을에는 자기 내부의 등불을 통해, 미처 마련하지 못했던 자신의 요술 안경을 찾아 쓰게 됩니다. 사랑 자체가 우리에게 보상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사불을 부를 때 사랑은 큰 소리로 소리치며 우리에게 답하는 것입니다. 마을의 정자목은 우리를 부르는 법이 없지만, 사람들은 그 그늘을 찾아 모여듭니다. 열매가 실하면 길이 없어도 사람들은 몰려옵니다. 가을에는 마른 풀만이 향기로워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향기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 날 죽어 버리자.
그때 당신이 돌아온다 해도
나는 살아 있지 않으리라.
촛불은 거세게
희망처럼 타오르고 있으리라.
당신을 보기 위해 나의 두 눈은
멍하니 떠있을지도 모른다.
전혜린의 마지막 유서 같은 시입니다. 고통까지 자기 것으로 사랑한 시인의 절망입니다. 늦잠을 자도 좋은 행복한 시간이 일요일입니다. 그래서 더 일찍 깨어 새벽을 사랑해도 좋을 그 시간에 그녀는 죽음을 생각
합니다.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느낄 수는 있어도 그것이 말로 쉽게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머릿속에선 금강석 같던 상념들이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 그것은 누더기가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떠남을 언어가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죽어서도 눈 감을 수 없는 그리움을 안은 채 그녀는 떠납니다. 돌아올 기약을 할 수가 없는 그 텅 빈 죽음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그녀가 있었기에 그 자리가 빛났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입니다. 내가 없는 고통을 네가 느낀들 그것은 고통이지 위안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떠나는 자의 몫을 감당해야 하는 건지, 그를 떠나보내고 홀로 황량한 벌판을 지켜야 하는 건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가을은 충분히 외로울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전혜린과 같이 완벽하지 못할 뿐.
축 제
아범아, 제삿날이라 너무 침통해하지 말거라. 애비에게는 오늘이 축복의 날이니 사방에 환히 촛불도 밝혀 놓거라. 속세만큼 저승길도 험한 법, 제사 먹으러 찾아가려면 한 가닥 불빛에라도 의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가고 백(魄)은 땅으로 간다고 하였느니라. 육체는 흙이 되어, 몸 따로 마음 따로 살아야 하는 적막강산, 그곳 저승에서 이승을 찾는 날이니 애비에게는 축제날이니라.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柿)……21세기 대명천지에 그런 케케묵은 원칙이 뭐 중요할까만, 애비는 아버님 하시던 대로, 아버님은 할아버님을 따라 하셨으니 그것이 가풍이란 거다. 망자(亡者)에게는 서쪽이 상석(上席)이니 밥 한 그릇 놓을 때도 방위에 어긋남 없이 정성을 다하거라. 포(脯)없는 제사는 없다, 식혜, 간장도 빠졌는지 거듭 살피거라.
진설(陳設)이 끝났거든 향을 피워 애비 혼령을 불러다오. 이승과 저승이 판연히 달라 속세의 언어로는 망자의 영혼을 부를 수는 없느니라. 혼이 좋아 하는 것이 향이니 네가 피운 향 내음에 취해 너울너울 춤추며 향연(香煙)을 타고 네 집을 찾으마. 촛불을 밝혔으면 댓돌 위 신발도 가지런히 놓고, 마당의 빨랫줄은 걷었는지 살펴서 애비가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다오.
향을 피워 혼령을 불렀으면 이제는 모사(茅沙)에 제주(祭酒)를 부어 흙이 된 애비의 육신을 부를 차례니라. 향긋한 술 냄새를 쫓아 대청을 찾아 나서면, 향불 위에 머물던 혼령과 반갑게 만나서 사대육신을 갖춘 한 몸을 이루어 병풍 앞에 정좌할 수 있겠구나. 이승의 몸을 입고 지방(紙榜) 단자 위에 좌정하면, 학생부군신위(學生父君神位) -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그저 배우면서 살았다는 <學生>이란 말도 애비에게는 과분하지만 내 집인 듯 편안하겠구나.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끝나면 올망졸망 손주 녀석 첨잔(添盞)이 있겠구나. 주발 뚜껑에 서툴게 따라 올리는 어린 손자의 앙증맞은 첨잔은 애비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되겠구나.
어멈아, 나물 무치고 전 부치느라 네 몸이 파김치가 됐겠구나. 그러나 네 한 몸 힘들어 식구들이 푸짐한 저녁을 먹게 되니, 그 또한 복 받을 일 아닐까? 쓸데없이 바쁘기만 한 일상(日常)을 잠시 접고, 애비 기일이라 형제 동서 나란히 앉았으니 그것이 바로 실천하는 효도이겠구나. 어린 손주 녀석들 오랜만에 만나 언니 아우 즐기는 날이 바로 제삿날이니 이것만 봐도, 기제사(忌祭祀)라는 것이 공연한 허례(虛禮) 허명(虛名)만은 아니로구나. 조상의 음덕(陰德)이 별거겠느냐. 너희들 화목하고 어린 것들 실하게 크면 그것이 바로 조상의 보살핌이니라.
자시(子時)에 하늘이 열리고 축시(丑時)에 땅이 열린다고 했느니라. 한 해를 기다려 너희들을 보러 가는 날이니 저녁 11시, 자시가 소풍 가는 날처럼 기다려지는구나. 내 서둘러 차비해 하늘의 문이 열리는 대로 너희를 찾아 내려가마.
약력:
성균관대학 및 동대학원 한국문학 전공
서문여고 교감. 중국 옌타이대 교수 역임
현재: 한민족학세계화본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