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분순 시조시인

조회 수 2165 추천 수 3 2018.07.31 10:50:13

 

                                                          새벽 2, 누구나 시인이 된다

                                           -포스트디지털 세대의 현대시조

 

 

                                                                                               한분순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새벽 2시 감성시대’, 이 표현은 새벽 2시가 되면 문득 감정이 폭발해서 걷잡을 수 없는 애틋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고독의 오락과 같아 혼자서 누리는 문학적 사치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을 들고 글을 써서 사람들 앞에 내놓으면 타인과 어울리지는 않으면서 나를 드러낼 수 있는 21세기적 유흥이다. 시조가 음풍농월을 다뤘다면 현대시조는 이 새로워진 흥취에 호응해야 한다.

   요즘은 다들 개인의 모바일 매체 또는 인터넷 매체를 갖고 있으므로 곧잘 그런 심정을 글로 써서 남들 앞에 선보인다. 문학소녀처럼 예쁜 글도 있고 문학청년처럼 멋들어진 글도 있다. 누구나 글을 쓰고 은근한 자신감도 넘친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느 시대보다도 사람들은 남의 글에 대해 엄격해졌다. 시조를 일군 모던 걸 모던 보이가 있었고 그렇듯 현대시조의 개화기가 있었으나 아직도 사람들은 시조라고 하면 현대가 아닌 과거의 문화로 여긴다. 이러기에 시조는 다른 장르보다 치열한 변화가 필요하다.

   고전시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젊은 정서를 부여하는 것이 장르의 소명이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시인이다. 웬만한 필력에는 쉽게 감탄하지 않는 독자들의 기호를 반영해, 문학이 에 더하여, 다른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조 장르는 현대시조라는 지칭이 있음에도 여전히 고전적 느낌으로만 생각되어진다.

   현대시의 숱한 명작들이 시조의 운율과 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도 그 덕목보다는 고시조의 이미지에 가두어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를 얘기하며 이 장르만을 얘기할 것이 아니다. 시조는 고유의 정형시이면서 현대시와 자유시의 속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시조의 진화는 현대문학이 나아갈 바를 탐구하며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시조가 황진이나 윤선도의 것이 아닌, 지극히 현대적이며 청춘의 상징이라 할 랩과도 이어져 있음은 이 장르가 지닌 잠재력을 나타낸다. 힙합 랩에 나란 놈 답은 너다또는 젊은이들의 발라드에서 내 것인 연인 아닌같은 구절은 그 앞뒤 흐름에서도 시조의 운율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시조의 가장 큰 고답스러움이라고 생각되는 정형의 규칙이 오히려 첨단의 장르에서 훌륭히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형시로서의 시조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장르이다. 이러한 자각이 시조의 진화를 위한 시작점이다.

   현대는 비주얼시대, 즉 보는 것에 익숙한 시대이다. 이를테면 라디오도 듣는 라디오에서 보이는 라디오라는 이름 붙인 형식으로 제작한다.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감상하며 텔레비전 보듯 라디오 디제이의 모습을 본다. 본질적으로 듣는형식이라 해도 보는형식으로 변화되어야 장르로써 지속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시조를 비롯한 현대문학은 포스트디지털 세대라고 지칭되는 젊은 독자들과 만나야 한다. 과거 아날로그 세대와 다른, 이들은 핸드폰을 위시한 디지털 기계들을 가까이하며 그런 장치들이 지닌 특징을 닮아, 문자를 받아들이며 이미지가 있어야 의사소통을 원활히 한다.

   글 내용의 시각화는 문학의 지속적 경향인데 형식의 시각화 또한 늘어나고 있다. 이는 운율과 음보에 맞춰 형식을 지켜야 하는 시조 장르에서 유심히 감안할 현상이다. 인쇄된 활자를 세심하게 배치하는 것은 기본이다. 초장 중장 종장의 음보들을 배행하는 신선한 리듬감을 인쇄된 종이 위에서 보여 줘야 하는 것이다. 시조가 인쇄되어 있는 모습이 늘 직사각형의 틀로 되어 있는 것은 시각화의 시대에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다만 유의할 것은 형식을 위한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조에는 파격의 형식으로 엇시조나 사설시조도 존재한다, 그런데 어떠한 시도를 하든 시조의 묘미는 초 중 종장 단수의 압축적 기승전결로부터 태동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시조 본연의 응축된 아름다움을 도외시하고 실험적 형식 파괴를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시조의 형식은 읽는 사람들에게 가장 와닿는 리듬으로 완성된 것이며 이러한 틀을 억지로 깨려는 것은 무모한 치기이다.

   인간은 시각으로 가장 많은 정보를 감지한다. 글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는 형식도 시각적 아름다움을 지녀야 한다. 시조가 세 줄로 쌓은 직사각형처럼 보여지는 것은 짚어봐야 한다. 배행의 묘미에 더하여 요즘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문장의 최소 단위인 단어 자체를 해체하여 내용과 형태의 시각화를 동시에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청춘이란 단어를 이렇게 한 획씩 해체해 보았다.


   청춘,

   정준,

   저주.


   위와 같은 방식으로 획의 변화로써 단어를 쪼개는 과정을 청춘의 상실감을 다룬 시로 써본 것이다. 앞으로는 시어 자체에 대한 강박관념도 버려야 한다. 시조는 단어들을 간추려 생략으로 시인의 격정을 표출해야 하는 장르이다. 50자가 되지 않는 단수 안에서 시어는 엄선되어야 하며 낯익으면서도 낯선 표현을 시도하여 공감의 폭과 대담함의 깊이를 겸비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엔 어떻게 보면 감성 자체가 일상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홍대감성이라는 것도 그러한 변화를 입증한다. 홍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젊은 음악가들이 노래 가사를 쓰면서 발휘하는 일상적이면서도 잔잔한 공감을 일으키는 어휘구사력은 출판사들이 탐내는 필력으로 주목된다. 그들은 커피라든가 고양이 같은 익숙한 풍경에서 시어를 찾아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저것은 바로 나의 이야기구나,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공감을 주어 힐링을 해낸다.

   문장에 입체적 활력을 주는 것이 수사법이다. 글자는 이차원이지만 그것으로 만든 문장은 삼차원 감각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다고 하여 현란한 수사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전처럼 은유나 기교가 들어간 묘사로 글을 시각화하던 습성은 적극적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멋진 시는 멋진 낱말이 아닌 멋진 착안에서 나온다. 글로 쓰려는 대상이 그림처럼 떠오르지 않으면, 손에 잡히지 않는 이미지의 여백을 그럴싸한 어휘를 잔뜩 동원해 채우려 하기 쉽다. 시에 문외한이라 해도, 글의 허튼 기교와 글의 진정성, 이 둘을 분간하는 촉은 누구나 지니고 있다. 글을 쓰려는데 시인 스스로 뚜렷한 전체 그림이 펼쳐지지 않는다면 아직 생각이 덜 여문 것이므로, 현란한 단어를 늘어놓아도 읽는 분들은 작품의 공허함을 고스란히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따라서 현대문학에서는 작문의 시작을 보다 이미지로 삼는 것은 유용하다. 어떻게 쓸까에 골똘하면, 어렴풋이 맴도는 글자들에 에워싸여 멍하니 앉아 있게 되고, 그러다가 작품에 대한 흥미는 시들해진다. 이러지 않고 어떻게 그릴까에 골똘하면, 어떻게 쓸까보다 상대적으로 생각의 전개가 빨라지며 표현도 풍성해진다. 그림이 먼저 나오면, 글자는 따라나오기 마련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은 내가 곧바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소재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공감각적 작법은 시조의 콘텐츠 파워를 위하여 절실한 요청이다. 시조 장르는 여전히 시각적 묘사에만 몰두해 있다. 오감을 자극하는 표현으로 비주얼세대이면서 초현실까지 흡수할 수 있는 감성의 저력을 지닌 새로운 독자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시각을 촉각으로, 촉각을 청각으로, 청각을 미각으로 표현하며, 이렇듯 서로 다른 감각을 교차시키면서 공감각을 지향하는 작법을 연마해야 할 것이다. 소재에서도 시조는 옛것을 다루어야 한다는 편견을 벗어나야 한다. 시조는 엄연한 현대문학이다. 고전에 대한 애착은 지니되 현대의 독자들과 호흡할 소재를 탐색해야 한다. 간단히 말한다면, 시조를 자유시보다 자유롭게 써야 한다는 뜻이다.

   많은 세미나에서 해외의 유수한 학자들이 시조는 모든 문인들이 접해 볼 만한 뛰어난 특질이 있다고 주창해 왔다. 시조를 써보면 본인의 장르 문학에서도 발상의 전환이나 강약의 조절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일본의 하이쿠는 좋아하면서 우리 시조는 지나친 까닭은 시조 스스로가 현대화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데 소극적이었던 자세에서 연유한다. 이미 얘기했듯 시조는 신세기에 어울릴 운율과 글로벌 시대에 통용될 형식을 확보해 놓고 있다. 앞으로 내용에서 현대의 독자들과 감응할 수 있다면 시조의 장르적 진화가 실현될 것이다.

   곧 가을이 온다, 온몸의 피가 눈물이 된 듯 서정이 가득하다. 술에 글 탄 듯 문장이 익어가기를, 누군가의 책갈피에 오래 간직될 꽃잎 같은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한분순 사진.jpg

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실내악을 위한 주제’. ‘서울 한낮’. ‘ 소녀’. ‘손톱에 달이 뜬다’, 한국대표명시선 100 ‘서정의 취사’, ‘저물 듯 오시는 이“. 시화집 언젠가의 연애편지. 대한민국문학상. 한국문학상.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문학상. 국제펜클럽한국본부송운시조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등. 서울신문, 세계일보. 스포츠투데이신문 편집국 문화부장, 부국장. 국장 역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시인협회 이사.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이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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