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콜 하기, 그 지성과 담론의 앙가주망
-이정아의 <자카란다 꽃잎이 날리는 날>거듭 읽기
박양근
수필가·문학평론가
자카란다 옆에 서서
이정아 씨가 글다발을 가슴에 안고 독자를 찾아 나섰다. 미국 LA에서 27년 동안 디아스포라의 길을 밟던 걸음을 멈추고 자카란다 꽃잎 날리는 날 을 상재한 것이다. 그곳에는 삶이란 진지하려 할수록 고달프고 강하려 하였지만 늘 아쉬운 것, 오직 그때의 육신을 감싸준 것이 수필이라고 적혀 있다. LA의 대표적 가로수인 자카란다 꽃잎이 날리는 거리에서 이정아는 그렇게 말문을 연다. 이야기를 듣는 독자도 옷깃을 여미며 나뭇가지 위에 얹힌 바람 같은 세월을 전해 듣는다.
수필이 보랏빛 꽃이라면 그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 생철 지붕 위에 퍼붓는 장대비와 따가운 햇볕조차 애틋하게 회상하는 언어의 펜일 것이다. 만물의 삶이 온존하려면 피고 지는 순간이 합쳐야 한다. 하지만 어떤 생명도 어떤 꽃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시도 소설도 아니다. 오직 수필만이 세월의 불편을 일깨워준다. 이정아 수필이 한국에서 보낸 생의 반과 미국에서 맞이하는 나머지 반이 합류하는 두물목이 되어 깊고 느리게 흐르는 이유도 모두가 잊었던 기억을 비춰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월에 만개하는 자카란다 같은 수필을 만나려면 그가 세운 표지판 앞에 잠시 멈추면 한다.
수필로 회상하는 뿌리 찾기
재미수필가 이정아는 경기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는 이민자의 삶을 이지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모국어로 표현한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그 수필을 본인은 “나의 일기장”이라고 부른다. 만일 “일기장”으로 불리어지는 글의 분신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삶의 진정성이 가장 소중히 여겨질 것이다.
그 글이 “숨”을 쉰다. 숨 쉬는 수필은 생을 반추하는 풀무질을 멈추지 않는다. 첫 수필집 『낯선 숲을 지나며』 “서툴고 쓸쓸한” 타지에서의 시련을 전하고 두 번째 수필집 『선물』 “한 그루의 나무를 옮기려는” 이민자의 꿈을 다독여 준다면 세 번째 수필집 『자카란다 꽃잎이 날리는 날』 근원에 대한 그리움과 통증을 건져 삭혀내고 있다. 그에게 회상은 얕은 추억이나 가벼운 향수가 아니므로 아무리 작은 것도 정갈한 언어로 결정화한다. 뿌리 찾기에 대한 집중력이 진솔하면서도 내밀한 영혼의 순례록을 엮어낸다고 할까.
이정아는 천성적인 수필가로 태어났다. 가계 핏줄과 초기의 직장 이력과 미국생활을 이어보면 작가의식을 형성한 과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첫 부류에 속하는 3부작 「유목민」, 「외상 장부」, 「씩씩한 내 어머니」에는 진솔한 가족사가 담겨 있다. 외조부는 게릭호를 타고 미국 땅을 최초로 밟은 조선이민자 중의 한 분이고, 친정아버지 임진수 씨는 가난한 신문기자이며 시인이고, “연희동 암산왕”으로 불렸던 어머니는 강한 생활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 덕분에 이정아는 한국을 벗어날 디아스포라의 꿈과 사회적 안목을 지닌 문필력과 강인한 여성성을 함께 물려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 부류인「신발 3제」와 「매화의 영광」은 한국에서의 후반기 생활을 엮어낸다. 전자가 대학을 졸업한 후 “빨간 구두 선생님”으로 근무한 교직생활을 추억하는 삽화라면, 후자는 모교 100주년 기념식에서 받은 ‘영매상’으로 “가문의 영광”을 이룬 일화라고 하겠다. 그러나 독자는 지나간 행적이 아니라 열정과 성실성으로 뭉쳐진 현재의 이정아를 주목하여야 한다. 한 편의 13mm 흑백영화 같은「이민 이야기 1, 2」와 「alteration」은 “자급자족했던 마지막 유학 세대”를 해학적으로 반추하는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 남편이 청소를 하고 아내가 바느질을 했다는 “남청여박”의 영상미는 오늘의 유학생들에게 감격과 감동을 던져주는 타산지석에 비교할 만하다.
작품에 설정된 모든 과거도 현재라는 시간에 맞닿는다. 회상이 미래지향성을 지니면서 감동의 층위가 한층 높아지고 있다. 그의 현 모습을 나타내는 구상체는 평소에 싣는 “가장 낮은 신발”이다. 낮은 신발은 겸허한 성품의 표상일 뿐 아니라 “who are you?”라는 질문을 던질 때의 진지한 성품을 받쳐준다. “당신”이라는 호격은 외부와 관계를 맺기 위한 첫 언어로서 그의 수필이 칼럼에 못지않게 애정과 비판의 균형을 갖도록 해준다.
미국에 와 살면서 많이 누리기도 하였지만 놓치기도 한 것이 있다. 부모, 형제, 친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다. 그 생각을 하면 늘 명치 아래가 저릿하다. 그 아련한 아쉬움을 글로 풀어내는 삶을 살고 있으니 아마도 이런 것이 팔자인지 모르겠다. 고난이 많을수록 쓸 거리가 다채로운 즐거움이 있으니 참으로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이민이야기1」 중에서
이정아의 그리움을 음미하다 보면 파꽃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근원에 대한 회상, 다문화사회로의 이주, 작가적 입문, 원초적 생명의식 등이 버릴 것 없는 언어망으로 엮어져 사유의 줄기를 사방으로 뻗쳐낸다. 마침내 “낯선 숲에 뿌리를 내린” 씀바귀 같은 시련의 글쓰기가 꼿꼿한 파꽃으로 솟아난다. 시선 너머의 가치를 좇는 허물벗기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는 심미적 결실을 거두는 것이다.
디아스포라로 그리는 인간애
이정아의 스토리텔링은 이민담론과 화학적으로 결합한다.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상상의 단지에서 발효되면서 문학성을 생성해낸다.
사르트르는 “언어의 세계에 끼어들면 작가는 주변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주변 세계에 대한 작가의 책임을 앙가주망(‘engagement’)이라고 부르려면 현실을 비판하고 개선하는 글쓰기가 요청된다. 개인과 사회의 상황을 가장 투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르라면 칼럼과 에세이와 수필 같은 산문을 들 수 있다. 이정아의 수필은 이와 같은 산문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시적 감수성으로 이민자의 아픔을 위로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다양하게 구사되는 언술이 문화 사회를 조명하는데 적잖은 역할을 맡고 있다.
앙가주망이라는 작가의 참여의식은 야구연습장에서 이루어진다. 야구연습장은 그들 부부가 피땀으로 일군 삶터와 소수 이민자의 일터이다. 브로큰잉글리시와 브로큰스페니쉬와 서투른 한국어를 사용하는 직원들의 인간애가 깃던 그곳을 작가는 이민사회의 축소판으로 응시하며 묘사해나간다. 야구장을 무대로 한 「lost and found」는 신문기자인 아버지가 물려준 공익정신과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평범하지만 질긴 생명력을 재현한다. 무숙자와 빈자에 대한 편견을 반성하는「홈리스에게 받은 선물」은 변두리 삶의 진실성을, 자동차를 훔쳐간 라틴계 가족에 대한 연민을 담아낸 「도둑이 남긴 것」은 ‘우리(us)’라는 의식을 고양시킨다. 인종의 벽을 넘나드는 그의 작품들을 묶으면 제3세계 문학이 추구하는 정신이 떠오른다. 그 점에서 이정아는 디아스포라와 범애주의를 융합하려는 에세이스트의 면모를 지닌다.
교포사회를 지켜보는 작가의 시선은 한결 깊고 따뜻하다. 예를 들면 한인도서관을 후원했던 보람을 사실적으로 적은「기금 모금 파티」는 책이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신념을 깔고 있다.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내 다른 모습이라고 말하는 「감 따는 날에」서는 토속적인 자연관이 풍겨난다. “뭐든 남에게 줄 수 있다”는 복음정신이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는 한국적 인정에 잇대어져 마치 한국농촌 속으로 들어온 듯 한 감동을 준다랄까.
실제로 다빈치 코드처럼 곳곳에 숨겨진 그의 자화상을 나란히 펼치면 복고적인 가족상이 나타난다. “교복 같은 다크 그린의 망사 옷”을 십 년 이상 입고 다니는 아내와 적잖은 기부금을 내면서도 집에서 홀로 카레를 데워먹는 남편과 얼굴이 검어지도록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들이 20여 년 전의 “남청여박”을 재연한다. 그들은 흑백사진 속의 인물처럼 보일지라도 인간애라는 조명을 받으면서 삶의 진경 안으로 들어와 선다. 당연히 타자애를 다룬 글이 적지 않다. 「브라보 파이팅」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은 유기농 농부처럼 행복의 나눔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독자를 일깨우는 그들의 목소리를 소통, 통화, 콜… 무엇이라고 부르든 휴머니즘을 나누려는 화자와 서술자는 결코 퇴장하지 않는다. 그 모습은 아날로그적 유머와 디지털적 재치에 의하여 더욱 유의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행수필에서도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일탈의 여행을 꿈꾸는 이정아는 여행을 과거와 현재를 접목시키는 기회로 간주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화두가 중심축을 이루는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 3부작」을 읽어 내려가면 “물 위에서 세월과 내가 만나는” 생의 리듬을 만난다. “사람과 삶 사이를 새롭게” 보고 “비우면 홀가분해지는” 여행을 무심(無心)에 가까운 여정으로 그리는 취지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삶을 여정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나타난다. 그 질문은 작가에게 가장 진실한 여행은 무엇인가이다. 정답은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 이로써 “매일 매순간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이정아의 모든 수필에서 빠질 수 없는 DNA로서 생명을 유지한다. 미국에 거주하는 재미교포와 재미작가에게 바치는 아포리즘으로서 이것만큼 진실한 것도 없다.
문학에 깃든 영육의 세계
이정아 문학의 발원지는 어디에 있으며 흐름은 어디로 향하는가. 그 시원은 초등학교 때 지은 시에서 비롯한다. 작가로의 길을 열어준 「詩詩한 나의 글쓰기」는 “옳고 옳은(是是)” 창작의 엄숙함을 밝혀주는 수필로서 ‘직접“이란 말을 직설법으로 표현한다. 작가는 “네가 직접 써라”는 아버지의 말을 작가는 모름지기 작품의 진정한 주인이어야 한다는 수필론을 지켜내는 유언으로 삼는다.
밥 때도 모르고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미친 듯(狂)이 매달리는 날, “미치는(及) 것”이 문학의 시원이며 끝일 것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쳐야 미친다는 것은 세상의 일반론이다. 하물며 문학에랴.
-「 詩詩한 나의 글쓰기 」 중에서
“미쳐야 다다르는” 곳이 만상의 극점이다. 극점은 자연물뿐만 아니라 사물과 삶에도 존재한다. 문학에도 극점이 있지만 다수의 작가는 “여기, 이곳”에 머물러 쉽게 나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수필을 자신의 영육 안에 껴안고 걸어간다. 로두스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걸음은 “수필을 아직 공부하고 있”다는 겸손함과 “의식을 거행하듯 수행”하는 경건함으로 이루어진다. 당연히 그의 작가성을 반영한 「제 자랑」, 「시답잖은 일」, 「돌아온다 부메랑처럼」, 「시인의 선물」 등은 수필로 쓴 수필론으로 분류된다. 작품 속의 화자가 “존재인 척…”하는 문인의 자세에 날 선 각을 세우는 까닭도 문학제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그의 희망에서 비롯한다고 하겠다.
이정아는 무슨 이름이든 그냥 얻지 않았다. 자카란다처럼 뿌리를 탄탄하게 내려 재미교포라는 신분을 얻었다면 “분주파부(焚舟破釜)”와 “등고거재(登高去梯)”를 통해서 얻은 호칭이 수필가이다. 수필은 가장 정선된 삶 자체이므로 작품을 쓸 때마다 “그 분이 나에게 오기를” 청하는 기원을 잊을 수 것이다.
인생은 무엇일까. 동서고금을 통하여 증명된 사실은 인생은 엄청난 비밀을 숨긴 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늘 마찬가지’다. 이정아는 삶의 아이러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연히 자카란다를 비애감으로 채색하기도 한다. 숨겨진 것이 아닌 당당히 드러낸 것,자카란다 꽃잎이 날리는 날을 "첫 번째 독자인 남편과 다른 모든 분에게” 바치고 싶은 연유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불량품」을 거듭 읽도록 하자. 신장 이식의 필요성을 통보받았던 날의 심경을 정물화처럼 그려낸 이 작품은 모든 수필가가 추구하려는 미학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내용과 기법의 일체성이다. 절망적인 순간조차 입 맞추고 싶도록 절제된 플로베르적 기법이 좌절, 수용, 화해, 재생이라는 화소를 빈틈없이 조응시킨다. 친구들이 함께 기도하는 모습에 뒤이어 “고칠 수 없는 병”을 수용하는 독백을 읽으면 독자는 “새 삶을 찾을 주체가 자신”임을 공감할 수밖에 없다. 수필적 삶이 종교적 삶으로 이입하는 것이다.
마침 기회가 좋았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리라 결심했다. 지나온 날을 감사하기도 하고 지금의 처지를 울며 하소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였다. 유전적으로 약한 신장을 갖고 태어난 것을 원망하곤 했는데,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것이면 하나님이 불량품을 내보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 불량품 」 중에서
인간의 배꼽에 창조주가 “검수낙관”을 찍는다? 생명의 기원과 종말을 너무나 인간적인 어투로 고백하고 있다. 불량품이 생기면 하나님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원망이 “하나님이 반드시 병을 고쳐”주신다는 믿음에 맞닿아있다. 인간의 변명을 신의 명분으로 반전시킨 위트에 무릎을 친다. 그래서 여타 작품에 앞서 「불량품」을 먼저 읽으면 이정아의 삶과 꿈에 더욱 접근할 수 있다. 남편에게 “웬수”라는 애칭을 붙인 「남편의 어록」과 “산다는 건 매일 죽음으로 다가가는 일”임을 일깨워주는 「회색 수첩」은 풍자와 역설의 묘미를 알려주는 간이역 역할을 한다. 가을 단풍이 꽃 피는 날에는 “아직 살아있어요”라는 욕구와 “아직 깨어있어요”라는 욕망을 노래하는 목소리를 되살려준다. 다시 눈부신 5월을 맞이하면 흠집투성이 사람마저 용서하고 용서받는 자세를 전달받는다. 무엇보다 나, 가족, 인간이 신과 한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을 때면 『자카란다 꽃잎이 날리는 날』에 눈길이 저절로 간다. 이것이 이정아가 거듭 피워내는 자카란드같은 메시지라고 하겠다.
다시 자카란다를 기다리며
수필은 성찰을 통하여 완성도를 높여간다. 그것을 의미화하고 형상화하는 미적 변용은 오직 깊은 감수성과 치열한 언어적 훈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래서 디아스포라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수필가는 주변인들에 대한 안쓰러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따뜻한 관계성을 이루려는 욕망을 품는다.
이정아의 문학적 진화를 보여주는 자카란다 꽃잎이 날리는 날에 담긴 57편은 주렴과 같다. 그 “낯선 곳에서의 낯선 삶”을 진지한 어조로 꿰어낸 한 편 한 편은 현실로부터 정서적 해방을 지향하는 작가적 삶과 문학과 종교를 융합하려는 담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백인중심 사회에서 이룬 디아스포라 문학애조차 갖추어 그 일체성의 의미는 더욱 깊다.
“수필로 그림 삶”에 세 번째 방점을 찍은 작가는 어디 있을까. 자카란다가 지면 잠시 멈추었던 생의 여행자들은 자리를 떠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필이라는 “나의 일기장”을 들고 있는 이정아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 부동의 자세만으로 재미수필의 격은 높아지고 열정과 냉정으로 엮어진 『자카란다 꽃잎이 날리는 날』더욱 문향을 풍겨준다. 무엇보다 세상을 향하여 콜 하는 이정아의 수필 담론은 재미문단에서 달리 찾을 수 없는 자리를 부여받을 것이다.
약력:
1991 교민백일장 장원-미주크리스찬문협 회원
1997년 한국수필 등단(꽃시장 가는 길, 여자나이)
재미수필문학가협회회장, 이사장 역임
한국 수필 작가회, 국제펜클럽이사
수필집 ‘낯선 숲을 지나며’ ‘선물’ ‘자카란다 꽃잎이 날리는 날’
5인 동인집 '참 좋다'
2004년 제2회 해외한국수필 문학상. 2007년 미주펜 문학상,
2012년 조경희 문학상(해외작가상),
2014년 국제펜문학상(해외작가상) 수상
한국일보 (미주) 문예공모전 심사위원
한국일보 칼럼 집필(1998년-2012년),
현재 중앙일보 미주판 칼럼(이 아침에) 집필
벌써 2018년 3월의 작가가 소개되었군요
이정아 선생님! 반갑습니다.
이 시대는 광속이라 해방후 6.26 동란 때 태어난
미국 이민1세대가 1950~60년대 1년 생활을
지금은 하루 생활로 따라 가는지 끌려 가는지 지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것 중
책이 널려 있고 글이 넘쳐 나며 고급 먹거리가 진수성찬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리 굶주려도 먹고 싶은 음식이나 읽고 싶은 책이나 글이 따로 있다. 종이책. 종이 신문에서 디지털 화면으로 지구촌 구석 구석 실시간 정보로 병들어 가는 환자가 다 되었다.
이렇게 환자처럼 지쳐 있을 때
영양가 있고 치료제 같은 글을 만나면
가뭄에 단비처럼 싱싱해진다.
바로 이정아 선생님의 글이다.
이정아 선생님은 작년 8월 페이스 북으로 알게 되어 미주중앙일보에 발표된 작품을 공유하면서 다음 글을 기다리는 애독자가 되었다.
이정아 선생님 작품은 신변잡기 과거보다는 날카로운 송곳 같이 미래지향적인 진솔한 깨달음으로 단백한 맛과 영양가 있는 음식과 같았다.
선생님의 작품은 이민 1세대 디아스포라 문학에 빛나는 필력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천직 작가답다
이 시대에 보기드문 양심이 살아 있는 작가다.
이 시대가 부른 정의의 작가로서
미주 문단에 특급 청정제 작가다.
미주 문단에 99명의 무늬작가 보다
이정아 선생님 단 1명의 위대한 작가를 찾았다는게 영광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불량품'이라고
저승 문턱에서 울부짓던 포효가
지상 천국에서 기쁜 소식이 되었던
대단한 작가의 필력에 뜨거운 기립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부디 만수무강 건필을 축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알라스카에서
설천. 서용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