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원천으로서 장소애(場所愛)
-김동리의 「무녀도」와 「화개장터」를 중심으로-
안미영
1. 서두 : 장소
‘한글문학’은 다른 문자로 발표하는 문학과 구분해서 한글로 발표하는 문학을 일컫는다. 한글을 사용한다고 해서, ‘한글문학의 세계화’를 ‘한글의 세계화’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한글문학’은 ‘한글’로 되어 있는 데서 더 나아가, ‘한국문학’이라는 정체성을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글문학은 한글로 발표되면서 한국적 특수성을 반영한 문학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한국적인 것일까. 한글구사능력이 뛰어난 작가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한국을 잘 담아낸 작품에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를 쓸 수 있다.
다수의 작가들은 한국적 작가로 ‘김동리’를 지목한다. 김동리가 다루는 소설의 소재와 주제들이 한국 전통을 담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들은 토속적 샤머니즘, 한국적 운명관 등 다양한 추상어를 동원하여, 김동리가 구현해 낸 한국 문화를 설명한다. 이 글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관점에서, 김동리 소설에 나타난 한국적 특수성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특히 토포필리아,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에 대한 이해라는 관점에서 김동리 소설을 소개하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동리는 자신이 살아가는 터전에 대한 정서적 관계가 여느 작가보다 긴밀하며, 그 돈독한 장소애가 독창적인 창작의 근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소는 공간과 다른 개념이다. ‘공간(空間)’은 한자어에서도 드러나듯 아무것도 없는 빈 곳으로서 인식적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반면 ‘장소(場所)’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을 의미하는데,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관여하는 곳을 의미한다. 소설에 구현된 공간은 작가의 인식적 요소가 가미됨으로서 장소가 된다. 작가는 특정 공간을 설정하여, 그 곳에 사건을 배치하고 일어나게 하여 일정한 의미를 자아내도록 한다. 작가는 지리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을 소설 속에서 특정한 역사와 창조적 상상력이라는 인식적 요소를 가미하여 ‘장소’로 거듭나게 만든다.
삶의 터전에 애정을 가진 작가는 비단 김동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김유정의 강원도 산골, 이문구의 관촌, 오정희의 중국인의 거리 등 한국소설의 대표 작가들은 그들이 몸 담아온 터전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애정이 소설 창작의 배경이자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이들을 단순히 장소애를 가진 작가들이라고만 일축할 수 없다. 장소애의 근원에는 삶의 터전을 이루는 공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와 관찰이 전제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눈에 보이는 공간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건과 현상을 탐색하여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는 장소를 창조해 낸다. 이때 역사에 대한 통찰력 못지않게 인류에 대한 박애가 전제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김동리의 「무녀도」(『중앙』, 1935.6)와 「역마」(『백민』,1948.1)를 대상으로, 작가의 각별한 장소애를 살펴보고 창작의 원동력으로서 장소애의 의의를 확인하려한다. 주지하다시피 두 작품은 각각 경주와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무녀도」외에도 경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많으며, 화개장터 외에도 다양한 공간들이 김동리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일련의 작품 중에서 작가의 장소애가 작품 형상화에 성공을 이루었다고 판단되는 두 작품을 통해, 물리적인 공간이 작가 김동리를 통해 창조적인 장소로 거듭나는 과정에 주목해 보려는 것이다.
2. 경주 혹은 비(非)경주 : 김동리의 「무녀도」(『중앙』, 1935.6)
김동리의 「무녀도」는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소설의 서두에는 ‘무녀도’라는 그림을 얻게 된 경위가 소개되어 있는데, 본격적인 서사는 외부액자에서 빠져나온 다음,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김동리는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건을 설명하기에 앞서, 인물들이 살고 있는 공간을 묘사한다. 작가는 작중 주인공 모화와 낭이 그리고 욱이에 대한 성격창조보다, 작중 배경으로서 이들이 터를 이루어 살고 있는 공간 묘사에 심혈을 기울인다.
① 경주읍에서 성 밖으로 십여 리 나가서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여민촌 혹은 잡성촌이라 불리는 마을이었다.
② 이 마을 한 구석에 모화(毛火)라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모화서 들어온 사람이라 하여 모화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머리 찌그러져 가는 묵은 기와집으로 지붕 위에는 기와버섯이 퍼렇게 뻗어 올라 역한 흙냄새를 풍기고, 집 주위는 앙상한 돌담이 군데군데 헐린 채 옛성처럼 꼬불꼬불 에워싸고 있었다. 이 돌담이 에워싼 안의 공지같이 넓은 마당에는, 수채가 막힌 채 빗물이 고이는 대로 일년 내 시퍼런 물이끼가 뒤덮여, 늘쟁이, 명아주, 강아지풀 그리고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 잡풀들이 사람의 키도 묻힐 만큼 거멓게 엉키어 있었다. 그 아래로 뱀같이 길게 늘어진 지렁이와 두꺼비같이 늙은 개구리들이 구물거리고 움칠거리며 항상 밤이 들기만 기다릴 뿐으로, 이미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전에 벌써 사람의 자취와는 인연이 끊어진 도깨비굴 같기만 했다.
③ 이 도깨비굴같이 낡고 헐린 집 속에 무녀 모화와 그 딸 낭이는 살고 있었다. 낭이의 아버지되는 사람은 경주읍에서 칠십 리 가량 떨어져 있는 동해변 어느 길목에서 해물 가게를 보고 있는데, 풍문에 의하면 그는 낭이를 세상에 없이 끔찍이 생각하는 터이므로, 봄 가을철이면 분 잘 핀 다시마와, 조촐한 꼭지 미역 같은 것을 가지고 다녀가곤 한다는 것이었다. 나중 욱이(昱伊)가 돌연히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도깨비굴 속에 그녀들을 찾는 사람이라야, 모화에게 굿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과 봄 가을 한 번씩 낭이를 찾아주는 그녀의 아버지 정도로, 세상 사람들과는 별로 교섭도 없이 살아야 할 쓸쓸한 어미 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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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동리, <무녀도> 김동리 전집1. 1995, 79~80면, 강조는 인용자.
인용문은 원문의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왔으며, 번호는 설명을 위해 임의로 표시한 것이다. ①은 마을, ②는 집, ③은 작중 등장인물인 모화와 낭이를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원근법적 구성을 취하면서 점차적으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나간다. 특히 마을보다도 작중 인물이 살고 있는 집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묵은 기와집, 헐린 돌담, 물이끼가 덮여 있고 이름 모를 잡풀들로 우거져 있다. 뱀 같은 지렁이, 두꺼비 같은 개구리들이 그 집을 도깨비굴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 집에는 무녀 모화와 그녀의 딸 낭이가 살고 있으나, 외부 사람들과의 교섭이 없다.
인용문에 묘사된 장소는 얼핏 보면 시간이 무화된 공간인 듯하지만, 특정 공간과 대비를 이룸으로써 독자성을 띠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인용문 ①에 제시된 바와 같이, “경주읍에서 성 밖으로 십여 리 나가서 조그만 마을”, “여민촌 혹은 잡성촌”이라는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 경주라는 공간은 화랑의 후예들이 사는 곳이다. 비록 근대 문명의 유입에 따라 과거의 전통이 영락해 있을망정, 여전히 유구한 전통의 그늘과 정형화된 삶의 형식이 존속하는 공간이다. 김동리는 「무녀도」에서 경주의 전통과 형식에서 벗어난 공간을 그리고자 했다.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잡성촌이라는 마을의 성격에서 드러나듯, 그 곳은 혼종의 공간이다.
외부액자에는 “재산과 세도” 있는 “옛날의 소위 유서 있는 가문”에서 그림을 입수하는 과정이 제시되어 있다. 요컨대 그림 밖의 공간은 경주이나, 그림 속의 공간은 경주가 아닌 다양한 삶의 에너지들이 혼재하는 비정형의 공간이다. 김동리는 그림 속의 공간에 애정을 가지고, 창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비(非)경주로서 모화가 정주해 있는 공간은 경주로 대변되는 전통에 가려져 있었을 뿐, 이미 경주보다 앞서 존재해 있었던 곳이다. 그 공간의 정점에 ‘모화’가 놓여있다. 잡성촌, 이끼와 잡풀이 무성한 집, 외부와 관계가 없는 모녀, 이러한 설정은 섞여있되 이질성이 공존하며 고유의 독자성을 유지한다.
김동리는 전통보다 앞서 있었던 전통을 천착해 놓았다. 위 인용문에 나타난 공간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그로테스크한 도깨비굴을 연상시키는 그 공간이야 말로, 김동리가 생각하는 태초의 인간 원형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모화의 집은 김동리가 새롭게 창조하고 재현해 놓은 장소이다. 그는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부터 있어왔던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존재방식을 재현하기 위해, 비(非)경주로서 여민촌 혹은 잡성촌을 배경으로 근대적 기획과 정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제3의 또 다른 장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모화는 유교와 불교의 자장을 벗어나 그 이전부터 살아왔던 온갖 다양한 생명체의 에너지들과 교감한다. 모든 에너지가 혼재되어 있는 그 곳에서, 모화는 무녀로서 생명의 에너지를 전달해주는가 하면 그 에너지들이 섞이고 흐르게 하는 일을 담당한다. 기독교의 신 또한 그녀가 일상에서 만나는 다양한 생명 에너지와 다를 바 없다. 차이가 있다면, 기독교의 신은 이미 그녀에게 익숙해 있던 ‘님’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입된 낯선 귀신이라는 점이다. 낯섦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동반한다. 모화는 자신과 아들에 대한 보호 본능으로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대응한다. 성서를 태우는 등 욱이가 전하는 기독교에 대한 공격은 아들을 지키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다.
모화는 거스를 수 없는 힘에 대항하지만 종국에는 자멸하고 만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이래 자연의 섭리이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처음에는 강한 힘에 대항하지만, 그 강함을 이기지 못해 멸하고 만다. 낭이가 그린 그림 ‘무녀도’는 모화라는 생명체가 강함에 대항하여 자멸해 가는 풍경을 아름답게 그려 놓은 것이다. 김동리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에 창조적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그가 작품 초반에 구현해 놓은 장소는 작품 전체의 밑그림이기도 하거니와, 이 작품이 실현하는 처연한 아름다움의 실체이기도 하다. 김동리는 독자적으로 특정 장소를 구현함으로써, 이미 작품전체의 맥락과 주제를 확고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화개장터 : 김동리의 「역마」(『백민』,1948.1)
김동리의 「역마」는 ‘화개장터’라는 장소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다소 장황하지만, 작가의 서술은 지리적 공간의 소개를 넘어서서, 그 공간에 대한 인식적 요소까지 내포하고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는 접경이라는 점에서, 더 나아가 이 곳을 오고가는 사람들의 생활모습과 인정을 소개하고 있다. 김동리에게 ‘화개장터’는 공간이 아니라 건강한 삶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유구하게 지속되는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작품의 서두에 이미 이 작품의 방향성과 주제가 시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①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땅 구례 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협(花開峽)에서 흘러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춘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본류였다.
② 하동, 구례, 쌍계사(雙磎寺)의 세 갈래 길목이나 오고 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智異山)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洗耳岩)의 화개협 시오 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다. 경상 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두릅, 고사리 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 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 들이 또한 구롓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이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 조기, 자반 고등어 들이 올라오곤 하여, 산협치고는 꽤는 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③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 많고 멋들어진 「춘향가」 판소리 육자배기 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창극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으레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가 <화개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④ 가운데도 옥화(玉花)네 주막은 술맛이 유달리 좋고, 값이 싸고 안주인 - 즉 옥화 - 의 인심이 후하다 하여 화개장터에서는 가장 이름이 들난 주막이었다. 얼마 전에 그 어머니가 죽고 총각 아들 하나와 단 두 식구만으로 안주인 옥화가 돌아올 길 망연한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라 하여 그들은 더욱 호의와 동정을 기울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혹 노자가 달린다거나 행장이 불비할 때 그들은 으레 옥화네 주막을 찾았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인용문은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며 설명을 위해 문단 서두에 번호를 붙였다. 「무녀도」와 마찬가지로 거시적 맥락에서 인근의 지형과 지리, 장터의 풍경, 장터에 모이는 사람들, 그리고 장터에 사는 주인공의 순으로 원근법적 초점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용문 ①②③을 유심히 보면, 화개장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모여 혼종을 이루며 새로움을 발산한다. 첫째로 냇물이 모이고 섞인다. 둘째로 각 지역의 특산물이 모이고 섞인다. 셋째로 각 지역의 사람들이 모이고 섞인다. 특히 각 지역의 먹을거리들이 모이고, 각 지역의 놀 거리들이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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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동리, <역마. 김동리전집2 1995, 102~103면. 강조는 인용자.
세 가지 요소들의 공통점은 ‘모이고 섞임’이다. 다시 말해 만남과 이별 그리고 소멸과 생성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화개장터는 항시 성시를 이루는 잔치와 카니발이 지속된다. ④에서 작가는 그 흥성거림과 축제의 현장을 미시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특정 인물 옥화와 성기를 선택하여 축제의 속살을 탐구하여 풀어 보인다.
작가는 화개장터 중에서도 ‘주막’에 초점을 맞추었다. 주막은 2대째 여주인이 운영한다. 어머니는 주막을 찾아 온 남자(남사당패)와 관계하여 딸 옥화를 낳았다. 옥화 역시 주막을 찾아 온 남자(중)과 관계하여 아들 성기를 낳았다. 두 여자는 화개장터에 정주해 있지만, 이들을 거쳐 간 남자들은 정주하지 않고 방랑한다. 어머니의 남자가 그랬으며, 옥화의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옥화의 아들도 결국 정주하지 않는 방랑의 길을 떠난다. 남자는 사랑하는 그 순간만 정주한다. 정주하는 짧은 시간에 생성과 창조가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떠남이 종결과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새로운 정주를 향한 첫 걸음이 된다.
화개장터는 고유의 공간이면서 작가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공간이다. 김동리에게 삶이란 정주가 아니다. 섞이고 혼종을 이루어 창조와 생성에 이바지 하되, 끊임없이 방랑과 탐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화개장터’에 부가된 작가의 인식이다. 이것은 원형적 인간이 지닌 숙명의 과제이기도 하다. 김동리의 「역마」에 구현된 ‘화개장터’는 한국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공간이면서, 나아가 작가의 새로운 인식을 담아내는 창조적 공간이다. 작가는 객관적 공간에 주체적인 인식적 요소를 결부하여, 자기만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낸 것이다.
4. 마무리 : 혼종과 생성
이 짧은 글에서는 ‘한글문학 세계화’에 대한 거창한 담론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글문학은 한국문학이라는 것을 제안하려 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문학 창작에 있어서 작가가 지녀야 할 장소애에 대해 제시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비어 있는 ‘공간’을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로 변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텅 빈 공간은 작가의 인식적 요소와 결합됨으로써, 장소로 창조된다. 작가는 공간에 대한 객관적 지리적 인식을 가져야 하며, 나아가 공간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김동리의 장소애는 역사를 초월하고 제도를 초월한다. 김동리가 구현해 낸 장소에는 살아 있는 생명들이 꿈틀거리며, 그리고 뒤섞이면서 동시에 생성을 거듭하고 있다. 「무녀도」의 서두에서, 김동리는 ‘무녀도’라는 그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뒤에 물러 누운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폭이 널따랗게 흐르는 검은 강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아져 내릴 듯한 파아란 별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다. 강가 모랫벌엔 큰 차일을 치고, 차일 속엔 마을 여인들이 자욱히 앉아 무당의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다. 그녀들의 얼굴 얼굴들은 분명히 슬픈 흥분과 새벽이 가까워온 듯한 피곤에 젖어 있다. 무당은 바야흐로 청승에 자지러져 뼈도 살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이 쾌자 자락을 날리며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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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동리, <무녀도> 김동리전집 1. 1995. 77면
그림 속의 여자들과 무당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산과 강물, 들판과 별들, 그리고 밤과 어우러져 한 여인이 춤사위에 취해 있다. 이것은 특정 종교의 의식이 아니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일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모화의 춤사위를 통해 자연과 교감하면서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자연성을 발산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김동리가 구현해 낸 장소는 지극히 한국적이다. 김동리는 근대 이전에 존재했던 조선과 고려라는 공간을 작품에 소환해 내지 않았다. 그는 균질화 된 역사 이전의 인간을 구현하기 위해, 특정 공간을 창조적인 장소로 거듭나게 했다.
역사 이전에 존재했던 공간으로서, 김동리가 창조한 장소의 특징은 ‘혼종’과 ‘생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무녀도」에서 모화가 굿을 한 뒤 생을 마감하는 예기소는 경주의 서천, 북천, 남천이 합류하면서 생겨난 깊고 푸른 소(沼)이다. 예기소는 여러 곳의 물들이 섞여서 하나로 모아지는 곳이다. 그것은 도래할 바다의 모습을 예감하게 한다. 「역마」에서 화개장터 역시 전라도와 경상도, 산과 들, 성과 속이 뒤섞인 공간이다. 외양으로는 카니발을 연상케 하지만, 혼종 속에 생성과 이별 그리고 만남이 도사리고 있다. 김동리는 한국의 지리적 공간을 역사적 창의적 장소로 재구성하는데, 그 장소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던 인간의 원형적 모습이 존재한다.
약력:
안미영(安美永, Ahn, Mi-Young)
한국 현대문학 비평을 전공했으며, 현재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교양대학 조교수이다.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이 당선되었다. 평론집으로는 『낮은 목소리로 굽어보기』(시에, 2007)와 『소설, 의혹과 통찰의 수사학』(케포이북스, 2013)이 있으며, 연구서로 『이상과 그의 시대』(소명출판, 2003), 『전전세대의 전후인식』(역락, 2008), 『이태준, 근대문학을 향한 열망』(소명출판, 2009), 『해방, 비국민의 미완의 서사』(소명출판, 2016)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