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의 관동별곡에 대하여
서포 김만중
송강(松江)의 ‘관동별곡(關東別曲)’, ‘전후 미인가(前後美人歌)’가는 우리 동방의 이소(離騷)이다. 그러나 그것을 한문으로 쓸 수 없었으므로, 오직 노래하는 무리들만이 입에서 입으로 주고받거나 혹은 국문으로 적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 ‘관동별곡’을 칠언시로 번역한 일이 있지만,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혹은 택당(澤堂)이 젊었을 때 지은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구마라습(鳩摩羅습)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글을 대단히 숭상한다. 부처님을 찬미하는 노래는 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이제 이를 한문으로 번역해 보니 다만 그 뜻만 얻게 되었을 뿐, 그 표현의 묘미는 옮길 수가 없었다.” 이치로 보아 진실로 그럴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발하면 말이 되고, 말에 절주(節奏)가 있으면 노래와 시와 문장과 부(賦)가 된다. 사방(四方)의 말이 비록 같지 않으나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자라면, 각각 그 말에 따라 절주(節奏)를 붙이면 다 족히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홀로 중국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나라의 시문(詩文)은 그 말을 버리고 타국의 말을 배워서 쓰니, 가령 십분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만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일 뿐이다. 여항(閭巷)의 초동급부(樵童汲婦)가 웅얼거리며 서로 화답(和答)하는 것이 비록 비리(鄙俚)하다고 하더라도, 그 참과 거짓을 따진다면 이는 진실로 학사대부(學士大夫)들의 이른바 시부(詩賦) 따위와는 함께 논할 바가 아니다.
하물며, 이 세 가지 별곡은 천기(天機)가 저절로 있고 이속(夷俗)의 천박함이 없으니, 자고로 우리나라의 진문장(眞文章)이라면 단지 이 세 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세 편에 대하여 다시 말한다면 그중에서도 ‘후미인곡(後美人曲)’이 더욱 높다. ‘관동별곡’과 ‘전미인곡’은 여전히 중국의 한자어를 빌려서 수식한 것일 뿐이다.
<해설>
서포는 우리의 시가를 존재하게 하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하고, 학사 대부들이 시부의 형식주의를 높이 치는 것을 비판했다. 서포는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말을 모방하려는 것은 앵무새가 되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서포는 시가 문학에서 ‘절주’와 ‘사辭’를 중시했다. 절주는 운율미나 외형미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사는 단순한 수사修辭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오랜 역사와 언어 속에 배어 있는 민중의 호흡이요 맥박이므로, 다른 나라말로 옮긴다면 표현해낼 수 없다.
서포는 같은 국문 노래라도 상투적인 한자 표현은 문학이 추구하는 정의 진정성을 해친다고 보아 정철의 세 별곡 중에서도 [속미인곡]을 높이 평가했다. 실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여성 화자를 내세우되 각기 다른 여성상을 등장시켰다. 즉 [사미인곡]에서는 사대부가 여성의 목소리를, [속미인곡]에서는 서민 여성의 목소리를 빌려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미인곡]은 내면의식을 한문투로 드러냈지만, [속미인곡]은 그리움과 애탄의 정서를 순수 국어로 드러냈다. 그렇기에 서포는 [속미인곡]을 상대적으로 더 높이 평가한 듯하다.
또한, 서포는 문학의 범주를 넓혔다. ‘절주가 있는 말’이 문학이라고 한다면, 문자로 기록된 것뿐만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주고받은 것’도 문학이라고 본 것이다. 서포는 결코 사대부의 문학을 배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 평가의 기준을 계층성에서 찾지 않고, 우리말로 된 문학인가 아니면 남의 나라말을 배워서 흉내 낸 문학인가 하는 차이에 두었다.
서포는 국문 시가를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포가 한문학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은 큰 의미를 지닌다.
[서포만필]은 역사, 문학, 유가, 불교, 음양학 등 다양한 분야에 사색하고 현실의 연관시켜 논술한 에세이집이다. 김만중은 삶과 관계된 걸쳐 스스로의 맥을 짚듯이 사유하고자 했기에, 그의 일생 경륜과 지적 여기에 집대성되어 있다.
'서포만필'은 만필의 형식으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과 시선으로 속 인물과 사건들을 바라보았다는 점, 당시로써는 드물게 힘 있는 문체로 논술했다는 점 때문에 한국 독보적인 차지한다. 이 책이 다루는 범위는 경학·역사·문학 등 삼교, 천문·지리·음양·산수·율려, 근대적 과학·천주교 등에까지 있어서 우리는 김만중이라는 조선시대의 걸출한 진면목을 보게 된다.
단 심경호 현대의 위해 김만중이 내용을 보충하거나 재해석하면서 그가 쓴 독특한 시각을 유추해 김만중이 거대 담론이나 동어반복 하지 않고 세세한 내용을 해부하면서 심화시켰다는 평가를 내린다.
만필의 미학
논리적인 치밀한 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관심을 표명하는 데는 안성맞춤이다. 만필의 능수능란하게 김만중은 선천 유배지에서 자신의 정리해 '서포만필' 상권에 104편, 하권에 165편을 썼다. 그 문체는 고백적이지만 회의하는 상대주의적 관점이 여기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서포만필'에 나타난 산문정신
'서포만필'은 17세기 찾아보기 어려운 정신과 탐구의 정신을 담았으며, 인간을 진정으로 관용의 지녔다. 김만중은 산문정신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자신의 짚듯 사유했다. 스스로 맥을 짚어보는 태도는 권위에 눌려, 혹은 시류에 모방하거나 타인에 뇌동하는 것과 이룬다. 주자학설에 맹신이나 불교에 논박은 설득력이 없다고 보고 속류 유학자의 편벽함을 비판했다. 또 그는 시각을 견지했다.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문학뿐만 아니라 사회 현실의 여러 문제에 대해 냉엄한 분석을 시도했다.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읽고 길이라고 보았다.
국민문학론
'서포만필'의 주된 우리나라 시에 대한 시화詩話이며, 소설이나 관한 것도 있다. 그밖에 불가佛家·유가儒家·도가道家·산수算數·율려律呂·천문天文·지리地理 실려 있어 사상적 편력과 박학다식함이 잘 있다. 문학적인 볼 때, 이 문체 비교, 통속소설관, 번역문학관, 시가관, 국어관의 '국민문학론'추구를 만필이라는 이용해 관념의 중국문학에 매몰 당한 한글문학을 옹호했다.
김만중(金萬重/1637~1692)
조선시대의 문신·소설가. 본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가 문효(文孝).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나 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79년(숙종 5) 예조참의, 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85년 홍문관대제학, 이듬해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非違)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여기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한 뒤 병사하였다. 《구운몽》은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98년(숙종 24) 관직이 복구되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저서에 《구운몽》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고시선(古詩選)》 등이 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서포만필(西浦漫筆)
조선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92)의 수필집으로 2권 2책. 사본. 중국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학설 중에서 의문스러운 대목을 번역·해명하고 신라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는 명시(名詩)들을 비평하였다. 특히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을 평한 문장에서, 한국 사람이 국어를 버리고 남의 말을 배우고 있음을 개탄하고, 한문 문장보다 한국 문학의 우수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정세로 비추어볼 때 놀랄 만큼 진보적이며 주체적인 탁견(卓見)이었다 하겠으며, 조선조 문학 비평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만중의 문학관
김만중은, 문학은 도(道)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서포만필'의 다음 글에서 이러한 점을 알 수 있다.
백사 이공(李恒福)이 북청으로 귀양을 갈 때 철령을 지나면서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실어다가 /님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 볼까 하노라.'라는 시조를 지었다. 하루는 광해군이 뒤뜰에서 잔치하며 노는데, 이 시조를 노래하는 궁녀가 있었다. 광해군은 "처음 듣는 노래로구나. 누가 지었다더냐?"하고 물었다. 궁녀가 "장안에 널리 불리는데 이모의 작이라고 하더이다"라고 대답하니, 광해군은 이 시조를 다시 부르게 하고 처연히 눈물을 흘렸다 한다. 시가 사람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이와 같다.
광해군에게 도(道)를 역설한 이항복은 배척되었지만, 광해군을 생각하는 심정을 노래한 이 시조는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김만중은, 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지만, 노래는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김만중(金萬重/1637~1692)
조선시대의 문신·소설가. 본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가 문효(文孝).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나 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79년(숙종 5) 예조참의, 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