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용희 수필가

조회 수 5971 추천 수 13 2016.08.31 13:17:32

<作品論>     
                                                             살굿빛 자아의식과 여백(餘白)에의 불꽃
                                                                                   -홍용희의 ‘5월과 지갑’을 읽고



                                                                                                                                                     강정실
                                                                                                                        문학평론가.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장
                                                                                                                                                    


    우리가 사는 동안 몇 차례 매우 절실하고 선명한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이를 일러 ‘운명’이라고도 하고, ‘인연’이라는 불가피하고 저항하기 힘든 이름으로 부른다.
  그 운명의 순간, 자신은 삶의 비의(秘意)나 숨겨진 뜻을 직관하게 되고 어떤 정신적인 것을 체험하기도 한다. 때로 그것은 존재 갱신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의 사제인 작가 특히 시인이나 수필가에게는 그러한 암담함과 추락을 통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자신의 삶과 형식을 완성하려 한다.
  이런 형식의 수필, 홍용희의 ‘5월과 지갑’을 읽으면서 수필의 정수를 보는 듯 눈이 번뜩 뜨였다. 가뭄에 단비가 만나는 것처럼 눈에 들어왔다. 필자가 10년 가까이 수필을 강의하면서 수필가로서 꼭짓점이 보이는 몇 안 되는 작품을 만난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갈증을 해소해 주는 수필다운 작품을 읽으면서 눈앞에 화자의 행로와 지향점이 보였다.


  1. 들어가기
   전체적인 줄거리다. 화자는 5월을 재스민 향기가 코끝에 감도는 5월의 아침, 느렁느렁 도심 사이를 걷다가 붉은 부겐빌레아 꽃을 들여다보는데, 부근 아파트 친구의 전화를 받게 된다. 친구가 사용하는 실내(gym)에서 무료 임시출입증을 받아 운동하게 된다.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 시간이 점심때라, 화자는 친구와 함께 맥도날드에서 맥픽과 커피를 먹기로 한다. 세 줄로 길게 늘어선 곳에서 8불을 지갑에서 꺼내주고 친구랑 점심을 먹고, 손님이 꽉 밀려 있는 가게를 빠져나온다. 친구와 함께 아파트로 돌아오면서 부근에 있는 그랜드팍에 들린다. 화자는 작은 분수 사이에 발레 하듯 사진을 찍고 있는 소녀를 보고 화가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의 그림이 떠오른다. 
   이 순간 화자는 피천득의 작품 ‘오월’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금아(琴兒)가 21살 때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을, 자신도 가까운 산타모니카 바닷가에서 5월의 백사장을 함께 거닐어 보자고 제안한다. 친구와 그야말로 불현듯 가려 한다. 그러나 메트로(Metro) 정거장에서 지갑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맥도날드 계산대에 놓고 온 지갑을 그때야 생각해 낸다. 급히 가게를 찾아가지만 이미 지갑을 분실한 뒤 상실감만 느낀다.
  지갑은 큰아들이 첫 월급을 탔을 때 화자에게 선물로 준 밤색 반 가죽 지갑이다. 이 속에는 여러 종류의 카드 등이 들어 있지만, 그 중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는 남편의 사진이 들어 있다.
  저녁 7시가 훨씬 넘어도 지갑을 주었다는 전화가 없다. 화자는 낮에 친구랑 들렸던 그랜드팍의 분수대를 저세상에 먼저 간 남편(그림자)과 함께 찾아간다. 밤 분수대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의자에 앉아있는 것으로 끝내고 있다.


2. 분수대 불빛과 여백에 대한 분석
㉠ 5월의 아침과 산책.
㉡ 부근 아파트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 옴.
㉢ 친구와 짐(gym)에서 운동.
㉣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먹음.
㉤ 그랜드팍에서 사진을 찍는 소녀를 봄.
㉥ 친구에게 산타모니카에서 5월의 백사장을 걷자고 제안.
㉦ 메트로(Metro)에서 지갑을 분실한 것을 알게 됨.
㉧ 맥도날드를 찾아가서 지갑을 확인 및 분실신고.
㉨ 집으로 돌아오면서 지갑에 얽힌 사연과 자책.
㉩ 지갑 속에 들어있는 남편의 사진.
㉪ 그랜드팍에 혼자 밤 산책과 5월의 의미화.


  도입부문에는 특별한 전환이 변화를 주지 않고 시간적 서사로 ㉠에서 ㉣까지 일상적인 방법으로 수열적 전개를 해 나간다. ㉣에서부터 지갑을 분실하게 된 동기를 암시하며 본격적인 수필적 미로를 찾기 시작한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꽉 찼고 세 줄로 길게 서 있었다. 계산이 빨리 움직여 보이는 듯한 계산대 뒤에 섰다. 차례가 오자 커피 두 잔을 별도로 주문하고 화자는 지갑에서 8불을 꺼내어 주었다. 그리고는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 계산대 주변에서 영수증에 붙어있는 주문번호를 열심히 보며 음식을 기다렸다. 보통 같으면 다른 식당으로 옮길 수 있겠으나, 짐(gym)에 입장할 때도 무료입장권을 받아 사용했다. 그런 와중 한 개 값에 두 개라니 식당 내의 번잡함은 참을만했다. ‘맥픽이 2개에 5달러’, ‘땅을 아무리 파보라. 동전 한 닢 나오느냐’고 한다. 이게 여자의 마음이고 엄마의 가슴 폭이다. 그러면서 계산이 빠른 듯 보이는 듯한 줄에 서고 혼잡한 손님 사이에서 자신의 음식신청 번호를 들고 기다린다. 여기서 자신의 지갑을 계산대에 놓고 나오는 실수를 한다.
  ㉤에서 복잡한 곳에서 점심을 먹고 그랜드팍 분수에서 사진 촬영하는 소녀를 보며 화자는,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의 그림을 생각한다. 주변에 있는 란타나의 꽃잎과 억새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금아의 ‘오월’이라는 수필을 생각해 낸다.
  화자 자신이 성심여자대학에서 국문과에 입학하고 금아가 이 학교에서 강의한 수업내용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대학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했고, 서울 휘경여중에서 국어선생으로 7년이나 근무했다. 그랬으니 상큼한 재스민 향기가 코끝을 감도는 5월이라, 금아가 표현한 ‘불현듯’ 인 것처럼 화자도 낭만을 위해 잠시 도심을 벗어나려고, 스스로 일탈을 원했을 것이리라.

  지갑을 잃어버리고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 멀게 느껴지는지, 다리에 힘이 빠지고 뼛속까지 아려왔다. 자책하기 시작한다. 그 지갑이 어떤 지갑인가. 3년 전 큰아들이 첫 월급을 탔을 때 선물로 준 밤색 반 가죽 지갑이다. 모서리가 닳을까 봐 헝겊 주머니에 넣어 다닐 만큼 아끼던 지갑이다. 이렇게 사단을 만든 자신에 대해 불쑥 화가 났다. 지갑 속에는 저세상으로 먼저 간 남편의 사진과 여러 종류의 카드 등이 들어 있는데, 왜 이런 실수를 했단 말인가.

  ㉦에서 ㉨까지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 내용과 다시 맥도날드에 찾아가서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돌아오면서 이 수필의 주제인 지갑에 대한 사연을 설명한다. 분실한 카드내용은 신고하면 피해는 막을 수가 있다. 그러나 지갑 안에 있는 한 장밖에 없는 소중한 남편의 사진이 들어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평소 화자가 지갑을 아무 곳에 놓고, 둔 곳을 몰라 자주 찾곤 했던 내용과 만약 지갑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의 불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지갑 속에 있는 남편의 얼굴에는 5월과 같은 연두색 사랑이 담겨 있다. 지갑이 안 돌아오면 어떡해야 하나. 진짜 잃어버리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련한 사진 속의 영상을 머릿속에 남겨두고 허허로운 가슴으로 진짜 이별을 남편에게 통보해야 하나. 잃어버린 사진과 5월과 같은 서른 살 때의 나. 그동안 가끔 지갑 속의 사진을 보며 지금의 내 나이를 잊고 5월의 푸르름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었다. 
  ㉩에서 화자는 남편에 대한 수필적 냄새, 수필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으로서의 냄새가 진동한다. 이곳에 독자에게 주는 아련함 그리움과 아픔 그리고 기쁨이 있다. 잃어버린 사진 속에는 5월과 같은 서른 살 때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지금의 나이를 잊으며 5월의 푸르름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는 표현, 자기의식의 발현이 주는 진정성, 홍용희 수필의 진수가 이곳에 모여있다. 우리 인생의 복합적인 요소를 유기적으로 결합, 여운과 기지, 여백을 통한 언어의 미학적 처리다.

  뉘엿뉘엿 지는 해는 서쪽 빌딩으로 넘어가고 지금은 7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지갑을 주웠다는 전화가 없다. 해가 지자 낮에 들렸던 그랜드팍의 분수대에 남편의 그림자와 둘이서 밤 산책을 나섰다. 여러 분수대에서 쏟아지는 크고 작은 오색 물결이 번득인다. 물에 비치는 어둠은 나비의 두 날개처럼 하늘거리다 하나가 된다. 분수는 강렬한 빛에서 어두운 빛으로 변하다 다시 화려하게 치솟고 있다. 물결과 함께 일렁이는 검은 환영 속에는 아픈 사연들이 애잔하게 일렁인다. 
  화자는 한 점의 정물(靜物)이 되어 빈 의자에 앉아 애련한 5월을 보내고 있다.

  ㉪에는 이 수필의 말미를 여백의 불꽃처럼 정리한다. 하롱하롱 날아가는 애틋한 남편의 사진을, 밤 속의 그림자를 남편과 함께하는 추상적인 상상력을 동원한다. 얼마나 애틋했으면 자신의 그림자를 남편으로 만들었을까. 물에 비치는 어둠은 나비의 두 날개처럼 하늘거리다 하나가 된다. 저승에 거주하는 남편과 이승에 있는 자신이 하나가 되는 착시현상.  화려하게 빛나다 아픈 사연들로 아파지는 현상, 독일의 철학자 T.W. 아도르노는 불꽃을 ‘예술의 가장 완전한 형태다. 그 양상을 최고의 완성 순간에 보는 것을 여백’이라 했다.  이 수필 전체 중 백미(白眉)다. 
  그랬다. 그랜드팍에서 밤 분수대에 쏟고 있는 크고 작은 오색 물결에 두 개의 날갯짓, 남편과 자신과의 기억을 하나로 승화시키면서 화자는 감정적 변화를 분수의 불빛에 따라 옛날을 기억해 내는 여백이다. 그러다가 현실에의 자신을 빈 의자에서 석고가 되어 있는 한 점의 정물, 애련한 5월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5월과 지갑’은 연둣빛의 느낌과 읽어버린 남편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반환점을 만들어 낸다. 단순한 서정빛 재스민 향기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아가는 스토리텔링(story telling)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힘이 돋보인다. 그리고 밤색 가죽 반 지갑을 찾고 못 찾는 궁금증은 순전히 독자에게 떠넘기는 여백을 당당하게 처리한다. 이러한 여백에 철학이 있고 감동과 아픔 그리고 문학과 정(情)이 있는, 독자에게 읽히는 수필이 된다.


3. 나가면서
   젊었을 때는 자식 키우고 아옹다옹 다투면서 생활한다. 그런 속에서도 우리 인간은 여유를 늘 꿈꾼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숨 가쁜 일상 속에서 한가(閑暇)는 그저 바라는 희망이다. 나이가 들어 부부가 여생을 즐기며 호사하리라 것도 꿈일 뿐이다.
  젊었을 때 한가로움이라야 한가로움(未老得方是閑)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 애써 과거를 찾아내려는 한가로움이라야 그 맛이 달고 고운 것이다. 우리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고 그 일을 찾아 떠나려는 잠재적 본능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나이가 들어 생활 속에서 기쁨을 빚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과거와 현실을 뭉치는 게 예술이 되고, 예술은 곧 생활인의 삶이 기쁨일 것이리라. 연암 박지원도 ‘‘글 짓는 법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아프고 속상한 마음을 형상화다라고 했다. 이른바 발분저서(發憤著書)! 분한 일을 당하고서 그것을 글로써 풀어내는 것이다’고 했다.
  수필가적인 홍용희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해진다.
  화자의 이면에 흐르는 저류, 심층적 공분모(公分母)를 평자가 한두 편의 수필로 다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전체적 양상이 빠르게 지나가고  카오스적인 얼굴로 다들 번득이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홍용희의 수필에서 구현되고 있는 자아의식의 발현과 여백의 미학을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불꽃 축제를 하듯 그녀 수필은 그녀만의 시선과 색깔로 수필마당을 펼쳐나갈 터이니까.
  작가 홍용희의 창에 비친 자기의식과 자신의 여백에 불꽃이 활활 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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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성심여대 국어국문과 및 동 대학원

 국어국문과 졸업

-<에세이포레> 수필신인상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 회원

-2016년 '밝은미래 중앙신인문학상' 넌픽션

 최우수 당선 '하얀 파도꽃'

-서울 휘경여자중학교 국어과 교사 7년 역임

-할리우드 장로병원 RT 10년 근무




서용덕

2016.09.10 19:09:11
*.67.18.170

2016년 '밝은미래중앙신인문학상'

미주 중앙일보가 주최한 논픽션 부문 <하얀 파도꽃> 최우수작 수상을 축하합니다.


이어서 또 다른 작품  <5월과 지갑>  강정실 회장장님의 평설로 신선하게 소개하여 주시니

홍용희 작가님 문향이 5월의 라일락 향기처럼 매혹적입니다.


나름대로 평설에서 느낀대로 옮긴다면

잃어버린 것을 잊어 버리는 일도 없지만,

잃어버린 것이 소중한 지갑이라서 지갑 속에 5월이란 사연은 지금까지 버틴 젊음이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지갑으로 자신을 찾아나서는 길을 찾게 한다.


홍용희 작가님의 용기있는 열정 "Never Stop Expedition" 응원합니다.


알래스카에서

서용덕 올림

홍용희

2016.09.12 10:26:47
*.240.233.194

서용덕 시인님

말씀이 멋집니다.

"잃어버린 것을 잊어버리는 일도 없지만..."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기억은 아마도 끝까지 가겠지요.

잊어버리고 살 수 있는 사연은 그리 아프지 않는 사연이겠지요.


감사합니다.

"Never Stop Expedition"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멈추지 않는 Expedition!

이훤

2016.09.12 01:13:38
*.50.7.58

쓰시는 수필들처럼 회장님의 평론에는 글을 뚫어보시고 그 안의 정서를 읽어내시는 혜안이 있으시군요.

홍용희 수필가님의 당선 소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평을 읽고 나니 보다 더 작품을 처음부터 읽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홍 작가님께서 펼쳐가실 세계를 기대해 마지 않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홍용희

2016.09.12 10:53:19
*.240.23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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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훤 시인님



앞으로 펼쳐나갈 세계가 어떤 것이 될지 저 자신도 기대됩니다.

아직 시작이라 눈도 어둡고 길도 어둡습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 함께 가는 벗들이 있으니 서로 어깨동무하고 가면 되겠지요?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많이 감사합니다.

첨부

홍마가

2016.09.13 18:21:06
*.185.162.61

귀한 수필과 서평 모두 훌륭하십니다. 

잊혀진 추억이 새롭고 5월을 사랑하게 하는 수필입니다. 

회장님의 혜안으로 수필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위스콘신에서 홍마가 시인

홍용희

2016.09.13 20:59:13
*.240.23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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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마가 시인님


위스콘신에서 날아온 포근한 축하와 격려에 

힘이 불끈 솟습니다.

앞으로 쉽지 않은 이 길을 우리 모두 함께 걸어가길 바랍니다.

한국문협 미주지회의 저력이 보이는 장면입니다.


감사합니다. 

홍 시인님께서도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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