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렬 평론가

조회 수 858 추천 수 2 2019.05.01 12:12:35

                        

                                   의식의 코드화, 김정화의 문자학적 사유와 차연差延:differance
                                   
                                                                                                                                           한상렬
                                                                             
1. 들어가는 말
1953년 어느 봄날, 헉슬리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자기 집에서 부인 마리아와 한 친구에게 과학적 관찰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메스칼린을 직접 복용한다. 그리고 1시간 동안 그는 놀라운 세계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빛줄기가 춤추고 형체가 움직이는 환각이었다. 그에게 있어 이런 체험은 일상의 일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식탁에 놓인 장미와 카네이션이 그날따라 표면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면의 빛까지 감지되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아담이 그가 창조된 아침에 본 것을 보았다. 순간순간 발가벗은 실존의 기적이었다.”라고 그는 토로했다. 그에게 있어 뇌와 신경계통이란 ‘축소판막이’였던 것이다.
이렇듯 언어란 축소된 의식을 코드화 하는 데 있다. 즉 언어는 우리에게 축소된 지혜와 경험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예를 들어 어떤 사물에 이름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는 존재할 수가 없다. 실재를 상징이나 언어로 해석하는 고정관념이다. 이런 관념을 벗어버리면 발견의 신선함을 누릴 수 있다고 그는 보고 있다.


과학적 인식이 ‘인식론적 단절’ 위에서 시작한다고 한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지적은 혜안이었다. 과학뿐이 아니다. 철학과 예술도 이런 단절 위에서 수립된다. 그러나 참된 인식은 인식론적 회귀에서만 완성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담론이나 수학적인 함수, 예술적 재현 등 모든 형태의 글[文]은 이런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 비로소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문맥으로, 글의 시공간적 지표로 회귀했을 때, 그 완전한 의미를 찾게 된다.


≪지식의 고고학≫에서의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언명처럼 언표의 개념을 새롭게 규명함으로써 사유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마련된다. 단순한 존재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문자들을 의미의 문턱을 넘어 의미의 왕국을 마련하는 셈이겠다. 여기서 의미의 문턱을 넘어선 기호들의 집합을 ‘언표’라고 한다. 이런 언표의 층위는 명제나 문장 등 우리가 평소에 문제로 삼는 기호의 집합체들보다 더 하위의 층위를 형성하며, 모든 담론적 형성 규칙에서 과학적 담론을 이루는 규칙으로 ‘언표적 장’이라는 역동적인 장, 일테면 무한히 열려진 가능성의 열린 장으로 우리를 이끌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J.Derrida가 생각한 지혜의 본질은 들을 귀를 가진 영혼의 철학과 그 지혜보다는, 이 세계를 눈으로 보고 읽으려 한 철학과 지혜를 담고 있다. 전자를 말중심주의 Ie Iogocentrisme로 본다면, 후자는 문자학이나 차연差延의 철학이다.(김형호, ≪21세기 문학≫ 1997, 29쪽.) 여기서 데리다는 “문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자가 부조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부조리라는 개념도 형이상학적인 의미와 함께 언제나 체계를 이루었다. 단지 문자는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숨넘어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충실하게 노력하고 애쓰고 시도해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앞의 책, 30쪽.)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의미의 미결정상태를 차연差延으로 보아 철학적 논리의 확실성으로 무장하였다.


수필작가 김정화의 수필집 ≪가자미≫는 이런 의식의 코드화, 문자학적 사유와 차연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경남 김해 출신인 그는 2006년 <겨울 소리>로 ≪수필과비평≫의 신인상을 수상하였으며, 2015년에는 <‘나마스테’ 탈식민주의적 경계 허물기>로 ≪광남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기도 한 작가이다. 그의 해적이에는 저서로 ≪새에게는 길이 없다≫, ≪하얀 낙타≫, ≪가자미≫그리고 선집으로 ≪장미, 타다≫가 등재되어 있다.


한국수필계의 그의 등단은 어쩌면 한 획을 긋는 의미심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등단 이후 발표된 작품들은 한국수필문단에 문제작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앞서의 미셀 푸코의 언명처럼 언표의 개념을 새롭게 규명함으로써 사유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였는가 하면, 문자학적 사유의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이른바 언어를 통한 축소된 의식을 코드화를 통해 한국수필의 외연을 확대함으로써 본격수필의 경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국수필의 지평을 확인하게 하는 함의와 아울러 미래 한국수필의 출구전략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일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 논의에서는 그의 최근의 발표 수필집인 ≪가자미≫에 나타난 수필세계한 단면을 고구함으로써 한 작가의 내밀한 작품세계의 파악만이 아니라, 한국수필의 지평을 확인하고자 한다.


2. 문자학적 사유와 통섭
문자학적인 사유는 데리다만의 전매특허는 아니었다. 동서고금에 예외 없이 나타난 비일의적非一義的이고, 비단자적非單子的인 상호 얽힘의 애매모호성을 생각했던 모든 지혜는 그것이 어떤 명칭으로 자신의 철학을 포장했든 문자학의 사유논리를 이미 창출하였다고 하겠다. 여기서 문자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통상적인 문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유가 지닌 문자학적인 사고방식의 선험성에 의거해서 생긴 하나의 보편적이고 경험적 현상이라 하겠다. 이는 “모든 문자는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 자체 쐐기처럼 홈이 새겨져 있기에”라는, 라캉Lacan의 말처럼 ‘입벌림’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문자학의 세계에서는 데리다가 ≪철학의 여백≫에서 밝혔듯, “같음은 다름의 다름이고 다름은 자기와 다르면서 같음”이 된다. 이렇듯 데리다가 문자라는 용어를 그의 철학의 기본특징으로 삼은 까닭은 문자를 말에 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문자학의 인식론적인 성격 규명은 시인 발레리Valery의 표현을 빌리면 ‘내적복합성’일 것이다.


김정화 수필의 문자학적 사유는 그의 작품 서두 한 행에서 출발한다. [“납작 엎드렸다.” -<가자미>. “저녁 바다는 대서사시다.”-<붉은 온점>, “구른다.”-<봄이 구른다>, “깝북, 숨넘어가는 소리다.”-<오리에게 길을 묻다>, “괴어 있는 돌이다.”-<찬란한 무덤>] 이는 제1부의 ‘봄이 구른다’에서 무작위로 취택한 서두의 1행이다. 다시 2부를 넘겨본다. [“지나던 발걸음을 멈춘다.”-<오뎅끼데스까>,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덥다.”-<몽골 빵이 그리운 까닭은>, “그냥 좋았다, 그때는.”-<압언 1>, “천하가 봄이다.”-<유쾌한 기행에 대취하다>] 필자의 시선을 다시 3부로 옮긴다. [“타닥, 꽃이 핀다.”-<성냥>, “삼색등이 빙글 돌아간다.”-<이층 이발소>, “궁둥이를 빼고 앉았다.”-<요강>, “특별한 집이다.”-<우물>, “온몸을 붉혔다.”-<붉은 우체통>, “정좌하고 있다.”-<깡깡이 아지매>] 그렇다면 제4부는 어떠한가. [“검다.”-<별이 내리네>, “초침이 발을 뗀다.”-<보낸다는 것은>, “낯선 이름이다.”-<이름 성형>, “대사를 토한다.”-<허공으로 날아간 화살>, “영화는 느리다.”-<영화 이야기, 하나>가 그 증거가 된다.


작가의 문자학적 사유의 단서는 여기서 포착하게 한다. 이는 작가정신이자, 그의 수필이 어디에 놓여있는지를 파악하게 하는 창작의 출발점 행동일 것이다. 그의 문자학적 사유는 이렇게 간결하고 압축된 기의와 기표를 사용하고 있다. 산문체의 문장에서 이런 언어적 미감은 화자의 깊은 사유에 터하고 있으리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김정화의 표제수필 <가자미>는 문자학적 사유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둠 속에 갇혀 있다. 그것이 언어의 창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인식될 때 비로소 빛을 받고 그 윤곽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설득력을 갖는다.


수필 <가자미>는 문자학적 사유와 철학적 함의를 지닌다. “납작 엎드렸다.”는 가자미의 속성을 한마디로 표상한 추상체다. 그가 있을 곳이 “옹색한 길바닥 좌편이면 어떤가. 널조각 자리가 왕후금침도 부럽지 않다.” 이렇게 화자는 골목 시장에 놓여 있는 가자미에 대한 사유의 단서를 포착하고 있다.


이어서 가자미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전개된다. [나를 두고 사람들은 넙치와 견주기를 즐긴다. → 도미 같은 귀족도 아니고, 늘씬한 몸매도 아니지만, 어력만은 진귀한] 하지만, [외눈박이로 여기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 살다 보면 대접도 받고 호강도 하는 법 → 문학소재로 삼을 때 가자미만 한 것이 있을까 싶다.] 여기까지의 화자의 시선은 가자미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를 유감없이 전개하고 있다. 소재의 외연만이 아니라 내적 감각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종의 통섭적 사유다. 자연 생태학에 인문학적 성찰을 접합한 이런 통섭은 그의 수필을 낯설게 한다.

더 바짝 몸을 낮추어본다. 마른 잎이 땅에 떨어지고 나무 그림자도 길게 몸을 눕힌다. 때가 되면 지상의 모든 것이 아래로 엎드린다. 바닥의 삶이라도 어떤가. 생을 먼저 깨우쳤다고 위로하면 괜찮다. 이만하면 가히 됐다.
-<가자미>의 결미


이 수필은 비록 소재는 가자미라는 어류를 부려쓰면서도 존재인식이라는 철학적 틀에 가두고 있다. 그래 그의 수필은 1차 언어를 뛰어넘어 “문학작품이 갖는 의미라는 것은, 말이 갖는 상식적인 의미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뜯어고치는 데 힘을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듣거나 읽는 사람 쪽에서도, 또한 말하거나 쓰는 사람 쪽에서도, 주지주의主知主義 따위의 추측할 수 없는, 말 속의 사고思考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메를로 퐁티M. Merleau-Ponty의 제2차적 언어를 지양하고 있다.


이런 낯설게 하기는 <헛발질>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이 작품은 일종의 실험수필류로 화자는 축구경기를 떠올리고 있다.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처럼 맞선 자리의 심리를 축구 용어로 풀어나가고 있다. “글이 가라앉지 않도록 문장을 톡톡 차올렸다.”라는 화자의 창작의 변은 이 수필을 이해함에 도움을 준다. 때문에 “그라운드의 선수는 헛발질이 고통스럽지만 상대편 관중은 신이 나듯, 이 글도 독자에게 유쾌한 웃음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화자의 언술이 가슴에 와 닿는다. 권대근의 평설에서 나타나듯 이 수필은 ‘세상보기’이다. 축구경기장에서 양측 선수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레프리와 경기해설자의 눈에 포착된 풍경(권대근의 해설, ≪에세이포레≫ 특집, 앞서가는 수필, 김정화의 수필집 ≪가자미≫ 발문, 181쪽.)을 설득력있게 묘파描破해 내고 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운행하고 있는 이 수필은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을 문자학적 사유를 통해 인문학적 성찰에 기여하고 있다.

두 사람을 화해시켜볼 요량으로 술값을 자청하여 자리를 만들어 봤으나 양측은 헛발질만 할 뿐 상대방 골네트를 흔들지는 못했어. 기대했던 양장 한 벌은 물 건너가고, 일여 년 동안 두 사람은 승부 없는 탐색전만 펼쳐나갔어. 그러던 어느 겨울날, 안 선장은 꽁치선 배를 타고 다시 출국하였고, 하 여사는 서울 오는 교회의 반주자로 선인 받아 부산을 떠나버렸다.
-<헛발질>에서


소재는 ‘중매’지만 이 수필은 통상적 문법을 거부하고 있다. 언감생심 양장 한 벌쯤 얻어 입을 요량으로 오지랖을 편 중매가 양자 간의 밀당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 소소하고 식상함직한 담론을 화자는 축구경기에 빗대 축구 용어로 풀어나가고 있다. 한마디로 평면적 스토리를 입체적으로 내밀화하여 굴절과 변용을 통해 언어가 지닌 미감을 살린 작품이다. 위 인용문과 같이 결미에 가 하프타임으로 진행되는 축구경기의 법칙을 삶에 비유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해학과 기지 그리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미적 변용은 소재의 운용에 따라 마치 사유의 악보처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정말이지 중매는 함부로 할 게 못되더군. 인생이란 승부가 나지 않는 게임이라는 것. 오직 긴 하프타임만 있을 뿐….” 이란 문자학적 사유가 문학화에 기여하고 있다.


“저녁 바다는 대서사시다.”로 시작하는 수필 <붉은 온점>은 저녁 바다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전개된다. 화자의 시선에는 저녁바다가 그야말로 한 편의 대서사시다. 강과 바다가 만나고 바다와 하늘이 경계를 허문다. 그리고 낙동강이 품고 온 흙은 모래섬을 만들고 하늘을 훑던 새들도 갈대숲에 깃을 내리는 저녁 바다. 게다가 노을빛도 파도 소리에 섞여 바람과 함께 모래톱을 휘감아 돈다. 모두가 하나 되어 광대한 자연의 화폭 위로 모여든다,고 했다. 그 공간은 바로 ‘다대포’다. 이는 수필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서서시다. 시적이미지가 한껏 날개를 편 언어적 미감이 반짝인다. 그러나 이 수필은 서정으로만 충일된 게 아니다. 서정과 서사의 결합, 정서적이면서도 지성적인 작가의 영감과 미적 감수성이 전편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절제된 시적 이미지에 배어 있는 화자의 정서적 질감이 노을과 함께 시작되는 땅거미 속에서 서성이는 중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 “생의 한때도 멈춘다. 모든 것이 한 순간이다.”라는 화자의 독백은 그쯤 세상을 살아온 이의 존재인식이요, 존재규명일 것이다. 저녁바다는 화자가 살아온 삶의 반추요, 자기 관조가 된다.

다대포는 노을의 땅이다. 을숙도에서 강변길을 지나 바다로 이어지는 길이 선셋로드이다. 그 해넘이 길을 따라가면 포구 끝자락에 노을도 쉬어가는 몰운대가 있다. ‘구름[雲]이 바다에 잠긴다[沒]’는 몰운대는 일몰이 아름다운 언덕이다. 불덩이 되어 떨어지는 석양과 수레바퀴같이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번갈아 맞이할 수 있는 비경의 장소이다. 온몸으로 바닷바람과 강바람을 맞으면 눌렸던 숨통도 트이게 된다.
-<붉은 온점>에서


서정이 서사와 조우하여 이렇게 문자학적 사유의 길이 트인다. 화자는 그 바다를 둘러본다. 홍게 한 마리가 백사장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낚시꾼은 팔뚝만 한 숭어를 길어 올리는 시간. 그렇다. “찰나의 순간은 기다림의 끝에 있는 법. 낙조 또한 염원하는 이의 비손 위에 머문다.”고 했다. 하늘과 바다가 뜨겁게 만나는 시간. 장엄한 신방이 차려지면, 시나브로 석양이 내린다. 이런 정서적 미감이 지성으로 변환하려는가. 문학적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내용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구비한 작품이어야 한다.


사물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이렇게 열려 있다. 바로 자기 관조다. 화자의 시선이 대상에서 자기관조로 귀환한다. “지는 것은 모두 쳐다만 봐도 눈물이 난다. 서럽지 않은 이별이 어디 있으랴. 낮출수록 길어지는 불 그림자. 붉은 바다가 붉은 파도를 재운다. 물결이 멎고 붉은 바람이 따라 눕는다. 사람도 물든다.”라고. 그러므로 존재인식은 관조와 자기화를 통해 동화되고 의미화에 이르게 한다. 그리곤 “마침내 해가 진다. 붉은 온점을 내리찍는다.”라는 절정에 이르면 “인간도 한없이 겸허해진다.”는 문자학적 사유와 차연差延의 의미를 읽게 한다. 이윽고 오롯이 하루에 완경完景에 침묵하는 존재의 의미에 다가서게 한다.
김정화의 수필은 이렇게 기호가 갖는 문학적 ‘낯설게 하기’의 실체를 그의 언표장을 중심으로 하여 탐색하게 한다. 이런 실험적 수필쓰기는 필연적으로 고도의 상징성을 요구하며, 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3. 의식의 코드화와 차연差延:differance
김정화의 수필에서의 의식의 코드화는 문자학적 사유를 중심으로 모두의 언급과 같이 의미의 미결정 상태, 끊임없는 유예상태를 이르는 ‘차연差延’에 위치한다. 여기서 차연은 ‘차이’와 ‘연기’의 뜻을 동시에 담은 의미어다. 각 단어의 첫글자를 합성하여, 어떤 단어나 문장이 확정적이고, 고정적인 의 맥락을 담지하지 못하고 그 뜻을 끊임없이 유예시키는 현상을 일컫는다.
데리다Derrida가 언명한 차연은 곧 의미의 유예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엄밀함과 논리적 확실성으로 무장했다고 주장하는 철학이 데리다가 보기에는 은유적 수사와 문학적 비유와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을 따른다면 철학 자체가 의미심장하고 모호한 텍스트라는 함의를 지니게 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제2부의 압언壓言 1~3이다. 김정화의 이들 수필 <압언壓言>은 낯설다. 각기 독립된 세 작품이지만 이들은 ‘그냥 좋더라’, ‘계속 가거라’, ‘뼈째 삼켜라’의 연접連接으로 되어 있다. 이 수필의 문자학적 사유는 소재에 대한 화자의 시선이 탁월하다는 데 있다. 메타문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보듯 변화의 한 축을 실감하게 한다. 이런 작법의 변화는 전통에 대한 파괴와 전도, 고정관념의 해체일 것이다. 이 수필은 전통적 문법과 문자학적 사유의 결합을 보이는 일종의 혼성모방적 수필이다. 데리다의 문자학적 사유를 수필의 전형적 형식에 직조한 이 수필은 본질찾기라는 작가의 의도에 닿아 있다.


이 수필은 언어가 지닌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본질에 천착한다. 고전적 언어의 의미와 해석에서 자유롭게 인식의 외연을 넓혀간다. ‘좋더라 → 가거라 → 삼켜라’라는 단순한 언어의 기표가 아니다. 이들 언어가 지닌 해석의 진중함과 함께 ‘압언壓言’이란 의미가 그러하듯, 작가는 언어의 경제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 내밀한 언어의 속성에 시선을 정박하고 있다. 이는 데리다가 생각한 지혜의 본질과 접맥된다. 즉 데리다의 지혜의 본질은 들을 귀를 가진 영혼의 철학과 그 지혜보다는 이 세계를 눈으로 보고 읽으려 한, 문자학적 사유에 귀결된다.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Gilles Deleuze의 ‘차이와 반복’과 동일선상에 있음을 간파하게 한다.


<압언壓言 1‒그냥 좋더라>은 “그냥 좋았다. 그때는.”이란 선언적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이 수필 전편을 이끌어 가는 지렛대이다.

방앗간 긴 줄 속에 서서 온종일 가래떡을 기다리고, 삼등품 밀가루의 붉은 면발이 지나가던 천장 아래로 이삭 국수를 집어 들던 시절이 있었다. 읍내 술도가에서 받아오던 양은주전자 속 막걸리의 텁텁한 냄새, 아랫목 콩나물시루에서 물 떨어지던 소리. 약식 고두밥을 한 움큼 집어먹던 찐더운 서리 맛. 정짓간 시렁 위에 차곡히 쌓여 있던 보시기들….
-<압언 1>에서


애초 정서적 분위기를 차단한 이 수필의 서두는 주제에 직핍直逼한다. 고난의 긴 터널, 가난을 숙명처럼 이고 ‘그냥 좋았다. 그때는’으로 부양浮揚시키고 있다. 이런 화자의 내적 감각의 사유는 바로 ‘차이’와 ‘반복’ 속에 ‘연기延期’라는 의미를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바로 데리다의 차연差延이다. 어떤 단어나 문장이 확정적이고 고정적인 의미맥락을 담지擔持하지 못하고 그 뜻을 끊임없이 유예猶豫시키는 현상이다. 이 수필의 구체화된 예시는 “참고, 기다리고, 눈감고, 듣고, 생각하고.”에서 “놔두고, 입 다물고, 믿고, 내어 주고, 지나가고”라는 기의의 언표장을 통해 다시금 “그냥 좋더라.”에 귀결되고 있다. 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에서 보듯 존재의 의미에 대한 선언적 귀결이다.


이에 연결하여 <압언壓言 2-계속 가거라>에서 보듯 화자는 “계속 가거라”라고 명령한다. 우스꽝스러운 비옷을 입고 등교하는 아이. 화자 자신의 자전적 예화는 가난한 시절 우산 대신 아버지가 요소비료 포대로 만들어준 우의雨衣를 키워드로 하고 있다.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표 자루 우의를 입고 비닐 모자를 푹 눌러써야만 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 아버지의 “계속 가거라.”라는 준엄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아버지는 요소비료 포대로 우의를 만들어 주었다. 직사각형의 포대 자루 위에 단을 만들고 검정 고무줄을 끼워 마치 비닐 도롱이를 연상시켰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표 자루 우의를 입고 비닐 모자를 푹 눌러써야만 했다. 그리고 너부죽이 고개를 숙이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압언 2>에서


이 역시 전자의 ‘그냥 좋았다’와 대등하게 연접되어 있다. 언어 기표가 지닌 이런 내포와 함축이 문자학적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일종의 ‘깨어 있음’ 곧 존재인식일 것이다. 이런 유사성Ahnlichkeit은 다음에 연접된 수필 <압언壓言 3-뼈째 삼켜라>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노릇한 갈치구이가 입맛을 돋운다. 도톰한 갈치 살을 발라 갓 지은 흰밥에 얹어 먹으면 산해진미도 부럽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어릴 때 나는 갈치를 먹지 못했다.”고 했다.

어릴 때 나는 갈치를 먹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갈치 맛을 몰랐다. 어머니의 시정 망태기에 갯내음이 풍기는 날은 손님이 온다는 징조였다. 들판 시골집의 빈객에게 갈치구이는 최고의 대접이었다. 아궁이 짚불에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냄새는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구워진 갈치는 손님상에만 올랐다.
-<압언 3>에서


가난이 병이었다. 갈치는 손님상, 5촌 아재 밥상에나 있었다.
그런데 “아재를 배웅하고 온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다시 갈치 한 토막을 구우라는 주문을 했다.” 그리곤 직접 갈치구이 먹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뼈째 먹지 않으려면 그만둬야 한다는 아버지의 엄포가 서운했지만, 그는 생선 먹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는 회억이 곤고困苦했던 과거의 시간을 반추하게 한다.
‘뼈째 삼켜라’라는 아버지의 엄명은 갈치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밥그릇의 한 톨 밥알도 남기지 않는 세심, 두꺼운 고전을 끝까지 읽어내는 끈기, 마라톤을 완주하는 집념, 무슨 일이든 온 힘을 다해 야무지게 하라는 말임을 이제야 깨닫는다.”는 화자의 성찰과 관조가 마음에 와 닿는다. 이렇게 김정화 수필의 문자학적 사유는 언어기표의 차연을 보여준다.


4. 나가는 말
지금까지 수필작가 김정화가 최근에 상재한 수필집 ≪가자미≫를 중심으로 그의 수필에 나타난 의식의 코드화, 문자학적 사유와 차연差延에 포커스를 맞춰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는 김정화의 수필이 지닌 기호가 갖는 문학적 ‘낯설게 하기’의 실체를 그의 언표장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본 단편적인 논의에 불과하다. 제3부의 ‘사라지는 것들’이나 제4부의 ‘그대에게 가는 길’과 같은 또 다른 작가의 얼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1부와 제2부의 대표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 것은 그의 수필이 보여주는 실험성을 주시하였기 때문에서였다.


이로써 수필가 김정화에게는 수필 짓기가 마치 헉슬리의 체험과 같이 “축소된 의식을 코드화”하는 일임이 확인된다. 아니 김정화의 수필은 철학적 담론이요, 예술적 재현이다. 그래 그는 한마디로 앞서가는 작가라 단정해도 충분하다.
한마디로 김정화의 수필은 언표의 개념을 새롭게 규명함으로써 사유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하였는가 하면, 문자학적 사유의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이른바 언어를 통한 축소된 의식의 코드화를 통해 한국수필의 외연을 확대함으로써 본격수필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이는 한국수필의 지평을 확인하게 하는 함의와 아울러 미래 한국수필의 출구전략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일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이런 실험적 수필쓰기가 필연적으로 고도의 상징을 요구하며, 해석을 필요로 함은 물론이요, 수필작가나 일반 대중들에게는 작품의 해석상 그와 같은 과정이나 요소가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도 유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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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렬│『현대문학』에(1987-8) 수필 발표로 데뷔하여 이후, 『시대문학 』(1989,수필), 『문예한국』(1993, 평론) 으로 등단하였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수필시대』주간, 『월간문학』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한국문협 자문위원이다. 저서로는 수필선집《신화를 꿈꾸다》《비움과 없음》, 평론집《존재사태 그 사유의 악보》, 창작론《수필문학 강독》, 《인천문학사》,《한국수필문학사》등 70여 권이 있다. 인천문학상(1992), 인천문화상(1995), 신곡문학상(1996), 한국문학비평가협회문학상(2002), 구름카페문학상(2010), 산귀래문학상(2015)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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