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무리
정순옥
“감사합니다. 인생을 갈무리할 수 있는 시기를 허락해주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나의 기도다. 사람의 일생을 농부가 농사짓는 시기로 나누어 본다면 유년기는 씨뿌리는 시기이요, 청년기는 가꾸는 시기이요, 장년기는 거둬들이는 시기요, 노년기는 농한기에 속할 것이다. 내 인생의 계절은 결실의 농산물을 거둬들이고 이젠 갈무리하는 시기라고 말 할 수 있겠다. 농번기가 지나고 농한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내가 아무리 싫다고 실랑이해도 마음과는 달리 세월은 이미 나를 노년으로 끌어 드리고 있다. 이젠 농한기에 들어가기 전 주위를 깔끔하게 갈무리해야 할 시절이 왔다. 뜨겁던 태양이 서서히 열기를 빼면서 아름다운 저녁놀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나는 이제 내 인생을 아름답게 갈무리해야 할 시기임을 느낀다.
내 인생의 소원과 성취는 무엇들일까. 인생의 마지막 계절을 앞둔 갈무리 시간에 조용히 생각에 잠겨본다. 유년기와 청년기 그리고 장년기를 보내면서 때에 따라 이루고 싶었던 수많았던 꿈들이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지만 그래도 이젠 미련 없이 갈무리해야만 함을 느낀다. 버리는 아쉬움이 있지만 비워내는 시원함도 함께 맛볼 수 있는 시기이기에 평온할 수 있다. 인생살이에서 내 가슴에 박혀 있는 슬픈 옹이, 하늘나라에 먼저 간 아들이 마지막 계절을 앞에 두고 있는 나를 이렇게도 안위시킬 줄이야! 노년의 시기를 맞이하는 갈무리 시절에는 인생살이에 여러 가지 색을 입혀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 시켜가는 단계가 아닐까 싶다. 부족한 인생살이 작품이라 하더라도 신비로운 한 예술품이 될 수도 있을 테니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갈무리 시절에는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짐 같이 불필요한 것들을 떨구어 내야 할 일이다. 아무리 좋은 열매라도 세월이 가면 맛이 변하고 그 열매가 떨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새로운 열매가 그 자리에서 열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꼭 원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떨어져 새로운 시절의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농부들은 농작물을 거둬들이면서 실한 종자들을 골라 잘 저장하여 새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농사철이 지나고 함박눈이 내리는 농한기가 되면 그냥 시간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새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다. 나의 인생살이를 갈무리하면서 좋은 삶의 씨앗들을 골라 후세들에게 남겨줘야 할 텐데 딱히 없어 안타까운 심정일 뿐이다.
나는 반느질고리를 정리하다가 실꾸리에 눈이 멎자, 어린 시절에 보았던 명화보다도 더 아름다운 추억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실오라기 하나도 귀하게 여기던 가난한 시기가 있었다. 그 시절 어머니는 밤이면 가물거리는 호롱불 밑에 앉아서 식구들의 해어진 옷이나 양말을 손으로 기웠다. 그때 필요한 것은 가느다란 바늘과 실이었는데 참으로 귀한 물건이었다. 어머니는 시골 오일장에 가셔서 실타래를 몇 개씩 사 오셨다. 나에게 양손을 벌려 실타래를 펼치게 하시고는 실꾸리에 실을 감으셨다. 그래야 실이 꼬이거나 엉키지 않고 다 쓸 때까지 그대로 반듯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무명실이 여러 실타래에서 한 실꾸리로 옮겨지니 아주 깔끔하고 사용하기에도 편리하고 영구 보존하기에도 좋았다. 어머니는 실이 곱게 감긴 묵직한 실꾸리를 보시면서 무척 흡족해하시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셨다. 손에 갈무리된 실꾸리를 들고 행복해하시던 그 아름다운 표정이 떠오르자, 실타래 같은 내 인생도 깔끔하게 정리하여 인생 실꾸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여나 차세대들이 내가 만들어 논 인생 실꾸리를 사용하고 싶을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추억을 한둘씩 꺼내어 본다. 때로는 기쁘고 즐거웠고 때로는 가슴 아프고 슬픔으로 응어리진 가슴을 부여잡고 살았고 때로는 가슴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마음속의 상처로 뜨거운 눈물에 젖어 하염없이 걸었던 옛길은 그래도 낭만이 있었던 시절로 회상되어 괜찮다. 날마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수놓듯이 걸어온 나의 인생길을 펼쳐보면 뒷면에는 매듭도 많았지만, 앞면은 그런대로 알록달록한 색깔과 무늬로 아름다운 한 폭의 인생 그림이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생 농사를 마치고 결실을 거둬들이고 갈무리하면서 농한기를 앞둔 내 모습을 본다. 세월 따라 자꾸만 늘어나는 주름은 내 삶의 무늬이기에 나는 담담히 거울 앞에서 훑어보며 서 있을 수가 있다. 성형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형시켜 줄 수 있겠지만, 희로애락을 품고 보낸 세월의 흔적 같은 주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질 뿐이다.
한 날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감각을 가지고 산다면 성공한 인생살이가 아닐까 싶다. 지혜로운 말과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과 사랑하며 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 된 일인지를 살아가면서 더욱더 느끼게 된다. 하나의 종합예술품 같은 내 인생의 아름다운 열매는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맺어졌을 것이다. 인생의 사계절 중 마지막 계절을 눈앞에 두고 삶을 갈무리하고 있는 나. 얼마큼이나 나의 인생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었을까, 헤아려보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선물 받은 하루하루를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갈무리하고 싶은데---. 바닷가 수평선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는 둥글고 붉은 태양이 황홀하리만큼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