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비극을 증언하는 노래 중 서울과 가장 가까운 지점의 상흔이 서려 있는 것으로는 이해연의 <한 많은 미아리고개>를
들 수 있다. 1950년 9월 26일의 서울 수복과 1951년 1월 4일의 중공군 서울 재점령은 수많은 인사들의 납북 사태를 초래했다.
<한 많은 미아리 고개>는 북으로 끌려가는 남편을 바라보며 아내가 울부짖는 노래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삿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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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단 현대식의 요즘 부산역.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 남긴 이미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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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남인수가 향년 45세로 타계했을 때 그의 장례식장에는 장송곡이 아니라 <애수의 소야곡> 음률이 울려퍼졌다. 그만큼
<애수의 소야곡>은 남인수를 대표하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애수의 소야곡>은 1938년에 태어났다. 지금부터 대략 75년도 더 지난 옛날 노래인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오늘도 나이
지긋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노래방 애창곡'으로 열창되고 있다.
부산을 떠올리게 하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
남인수의 노래 중에서 <애수의 소야곡>만큼이나 유명한 것으로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들 수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이후 피난지 부산의 풍경을 묘사한 이 노래는 당시 시대 상황과 맞물려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노랫말의 내용을 보면 서울에서 피난을 온 청년과, 본래 부산 토박이인 아가씨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 청년은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잊지 못할'이라는 표현을 보면 영원한 이별은 아닌 듯하지만, 당장은 헤어져야 하니 '슬피'
울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기적'이 우는 기차를 볼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부산역사 건물 또한 최첨단 현대식으로 변화한 탓에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더라도 어느 누구 하나 이별을 슬퍼하지 않는다. 물론, 서울까지 가는 데 하루 종일 걸렸던 1950년대 증기 기관차와 차원이
다른, 한글 이름으로 하면 무슨 뜻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 KTX라는 고속 열차가 운행되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흥남의 비극을 증언하는 <굳세어라 금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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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6월 24일의 부산 청사 모습(부산근대역사관 게시사진). 전쟁 중임응 알리는 격문과 포스터 들이 빼곡하다.
ⓒ 부산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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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무대인 부산역을 답사해볼 수 있는 노래다. 그에 비해 현인이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어떤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비극을 실감나게 노래했지만 <굳세어라 금순아>의 현장은 우리가 도저히
가볼 수 없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흥남 부두' '일사 이후' 등의 표현이 노래의 시대적 배경을 말해준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나 홀로 왔다'는 절규는 사건의 처절성을
상징한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중공군의 개입에 밀려 1950년 12월 12일부터 성탄절 전야까지 1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배에
실어 남쪽으로 피난시켰던 흥남 철수 작전의 슬픈 사연을 노래하고 있다.
한반도의 허리에는 '휴전선'이 남아 있다. 군사경계선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실제로 종전이 되고, 평화와
통일이 찾아와 흥남부두에 가볼 수 있는 날은 언제 오려나. 그날이 오면 아마도 <이별의 부산 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등은 정말 '흘러간 옛노래'가 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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