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의 잘못된 표기, 문제 심각
SBS 주말 예능 프로그램인 <런닝맨>이 좋습니다. 앉아서 말로 하는 것보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은, 보는 사람마저 들썩거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거든요. 앉아 있지 않고 걷고 싶고, 걷지 않고 뛰고 싶고, 뛰지 않고 마냥 달리고 싶은데,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우리에게 그 프로그램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이지요. 그들과 함께 걷고 뛰고 달리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달아나 버리거든요.
아는 게 병이라고나 할까요. 책상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런닝맨'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거예요. '달리는 일'을 러닝(running)이라고 한다면 '달리는 사람'은 당연히 '러닝맨'이어야 할 텐데, 왜 '런닝맨'일까? 가까이는 러닝셔츠부터, 러닝슛, 러닝패스 등 온통 러닝으로 쓰는데, 맞아 맞아, 학생회장 선거에서 회장과 함께 나오는 부회장도 러닝메이트라고 부르는데, 왜 러닝이 아니라 런닝일까, 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 SBS ‘런닝맨’ 로고 스트레스를 날리는 데는 그만인 프로그램인데, ‘런닝맨’이 스트레스를 주네요.
ⓒ SBS
'외래어 표기법'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더니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독서와 문법' 교과서를 살펴보았지만, 간략하게 언급만 하고 넘어가서, 속 시원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국어 어문 규정집>도 사고, 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로 일한 적이 있는 박용찬의 <외래어 표기법>도 사서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런닝'이 아니라 왜 '러닝'이라고 표기해야 하는지는 그 어디에서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국어 어문 규정집'의 '외래어 표기법' 제1장 제2항 "외래어의 1음운은 원칙적으로 1기호로 적는다"라는 조항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1음운 1기호'! 바로 그것이었어요.
'running'에서 철자는 'n'이 두 번 쓰였지만 소리, 다시 말해 음운은 'n'이 한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r?niŋ])이 눈에 들어왔어요. '음운'은 표기 단위가 아니라 소리 단위이고, 따라서 한 번만 소리 나면 한 번만 표기해야 한다는 사실. … 등잔 밑이 어두웠어요.
생각해 보니, 모음 사이에서 동일한 비음(콧소리)이 겹쳐 있는 'mm', 'nn'은 각각 'm'과 'n'으로 소리 나므로 비음이 겹치지 않은 것처럼 적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습니다. 그래서 '햄머'가 아닌 '해머'(hammer)이고, '딜렘마'가 아닌 '딜레마'(dilemma)이며, '턴널'이 아닌 '터널'(tunnel)이고, '런닝'이 아닌 '러닝'(running)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running'을 '런닝'으로 고집하는 것은, 외국인이 우리말 '사랑해'를 '살랑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잘못입니다.
▲ 외래어 표기법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외래어 표기법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답한 것은 응답자의 25%밖에 되지 않았어요.
ⓒ 한이지
"외래어(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외래어 표기법 제1장 제4항)
이제는 '짜장면'이 표준어가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장면'만이 표준어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인은 '홍길동전'에서 길동이 호형호부(呼兄呼父)하지 못하는 설움에 빗대,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어문 정책을 비꼰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어문 정책이 정말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우리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해 보니,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데도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말과 외국어의 음운 체계가 다른 데서 빚어진 일이었습니다. 우리말에서 '[ㅂ], [ㄷ], [ㄱ]' 등은 목청이 울리지 않는 무성 파열음인데, 이러한 예사소리(평음)는 된소리(경음) '[ㅃ], [ㄸ], [ㄲ]'과 거센소리(격음) '[ㅍ], [ㅌ], [ㅋ]'과 서로 짝을 이루어 '3항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 [뿔], [풀]을 전혀 다른 말로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외국어는 평음, 경음, 격음의 구별은 없고 단지 무성음([p], [t], [k])과 유성음([b], [d], [g])이 '2항 대립'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불], [뿔], [풀]'은 소리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고, '[ㅂ], [ㅃ], [ㅍ]'이 무성음이니까 같은 무성음인 [p]와 연결지어 '[pul]'로 인식할 뿐입니다.
▲ '자장면'이 '짜장면'이 되었다고 '가스'를 '까스'라고 할 수는 없지요. 거리에서 시민 139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2%가 '돈까스', 91%가 '런닝맨'이 옳은 표기라고 답하였습니다.
ⓒ 이주원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은 [pig]과 [big]을 [p]와 [b]의 원래의 소릿값에 맞게 각각 무성음과 유성음으로 듣는 게 아니라, 무성음인 'ㅍ'과 'ㅂ'으로 인식합니다. 우리말에는 [b], [d], [g] 등의 유성음을 소리 낼 수 없는 데 따른 것이지요. 그래서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p], [t], [k]'는 거센소리 '[ㅍ], [ㅌ], [ㅋ]'로 적고, '[b], [d], [g]'는 예사소리 '[ㅂ], [ㄷ], [ㄱ]'로 적기로 한 것입니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나라에 따라 '[p], [t], [k]'가 '[ㅃ], [ㄸ], [ㄲ]'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지만, 나라별로 일일이 따져서 발음하는 것이 너무 불편해서 된소리를 쓰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나아가, 마찰음과 파찰음의 된소리인 [ㅆ], [ㅉ] 등을 원칙적으로 외래어 표기에 쓰지 않기로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원칙'이 '관용'에 무릎을 꿇는 것이 언어 생활입니다. '자장면'이 원칙인데, 사람들이 '짜장면'을 많이 쓰면 '짜장면'이 인정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원칙은 원칙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보다는 '관용이 인정될 때까지는' 가급적 원칙대로 표기하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자장면'이 '짜장면'이 되었다고 '버스'도 '뻐스'로 '재즈'도 '째즈'로 표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돈가스'도 [돈까쓰]로 소리가 나더라도 표기만은 '돈가스'로 하는 것이 우리말에 대한 예의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사인펜'도 '싸인펜'으로 적어서는 안 되고요.
"방송매체에서 혼란 가져오는 건 우려스러운 일"
▲ 우리나라 ‘국어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우리가 우리말을 함부로 쓰면 아무도 우리말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 이주원
양옥승 선생님(여수중앙여고 국어교사)은 부드러웠지만 단호했습니다.
- SBS <런닝맨> 제작진에게 '런닝맨'이라는 틀린 표기를 써야 할 나름의 이유가 존재하는지 묻기 위해 여러 차례 인터뷰를 시도하였으나, 답변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다들 왜 이럴까요?
"대다수의 국민들이야 외래어 표기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고, 때문에 외래어 표기를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교육기관을 자처하는 방송국에서 그렇게 표기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문규정의 근본 취지는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함인데, 이를 바로잡고 이끌어야 할 방송매체에서 오히려 언어생활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 '런닝맨'처럼 틀린 표기임에도, 고유명사인 경우에는 잘잘못을 따지기 어렵다는 말도 들었는데요. '파리바게트'가 맞는데 '빠리바게뜨'로 하는 경우도 있다면서요. 이러다 보면 '관용'이라고 우겨서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까요?
"엄밀히 말하자면 '런닝맨'은 외국어이지 외래어는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말의 반열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 다시 말해 국어사전에 실리지 않은 말이지요. '빠리바게뜨'는 상호이니까 재론할 필요도 없고요. … 그건 그렇고요, 외래어 표기규정 제5항에 따르면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원칙에 어긋난 표기 임에도 이미 일상 생활화된 것에 대해서는 관용 표현으로 인정해 준다는 거지요. 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다시 말해 관용 표현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전에는 어문 규정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외래어 표기 관련 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사회 교육이 이를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도, 우리말에는 고유어와 한자어만 있는지 알았습니다. '한글 맞춤법'의 대상에서 외래어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취재를 하다가 외래어도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어야 하는 '표준어가 있는 우리말'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외래어는 그 성격상 좀 복잡해서 우리글인 한글로 적는 규칙인 외래어 표기법을 따로 정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되다니, 누구에게 손가락질할 것도 없었습니다.
▲ 방송매체는 우리에게 ‘선생님’이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방송 매체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지점이었습니다.
ⓒ 장이슬
☞ 자주 틀리는 외래어 표기, 기억해 두세요!
1. [f]도 [p]처럼 'ㅍ'으로 표기합니다.
화이팅 →파이팅(fighting)
후라이팬 → 프라이팬(frypan)
화일 → 파일(file)
환타지 → 판타지(fantasy)
2. 현지 발음을 고려하여야 합니다.
부페 → 뷔페(buffet)
롭스터 → 로브스터(lobster)
악세사리 → 액세서리(accessory)
액센트 → 악센트(accent)
3. '슈'는 되는데, '쥬'는 안 됩니다.
수퍼마켓 → 슈퍼마켓(supermarket)
쥬스 → 주스(juice)
미니어쳐 → 미니어처(miniature)
캐쥬얼 → 캐주얼(casual)
4. '쉽'이 아니라 '십'입니다.
브러쉬 → 브러시(brush)
잉글리쉬 → 잉글리시(English)
리더쉽 → 리더십(leadership)
멤버쉽 → 멤버십(membership)
5. 불필요한 음운은 없애야 합니다.
맛사지 → 마사지(massage)
밧데리 → 배터리(battery)
뱃지 → 배지(badge)
컨닝 → 커닝(cunning)
6. -et은 [잇]으로도 발음합니다.
캐비넷 → 캐비닛(cabinet)
팜플렛 → 팸플릿(pamphlet)
자켓 → 재킷(jacket)
보넷 → 보닛(bonnet)
7. 'ㅣ'로 표기할 것이 있습니다.
소세지 → 소시지(sausage)
바베큐 → 바비큐(barbecue)
코메디 → 코미디(comedy)
메세지 → 메시지(message)
초콜렛 → 초콜릿(chocolate)
8. 함부로 줄이지 말아야 합니다.
레크레이션 → 레크리에이션(recreation)
스텐레스 → 스테인리스(stainless)
스탭 → 스태프(staff)
케? → 케이크(ca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