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무
이어령
인간이 강철로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대립을 이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칼과 바늘일 것이다. 칼은 남성들의 것이고 바늘은 여성들의것이다. 칼은 자르고 토막내는 것이고 바늘은 꿰매어 결합시키는 것이다. 칼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 있고 바늘은 생명을 감싸기 위해 있다.
칼은 투쟁과 정복을 위해 싸움터인 벌판으로 나간다. 그러나 바늘은 낡은 것을 깁고 새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 깊숙한 규방의 내부로 들어온다. 칼은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하고 바늘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대립항의 궁극에는 칼의 문화에서 생겨난 남성의 투구와 바늘의 문화에서 생겨난 여성의 골무가 뚜렷하게 대치한다. 투구는 칼을 막기 위해 머리에 쓰는 것이고 골무는 바늘을 막기 위해서 손가락에 쓴다. 남자가 전쟁터에 나가려면 투구를 써야 하는 것처럼 여자가 바느질을 하려고 일감을 손에 쥘 때에는 골무를 껴야 한다.
골무는 가볍고 작은 투구이다. 그것은 실오라기와 쓰다 남은 천 조각과 그리고 짝이 맞지 않은 단추들처럼 일상의 생활을 누빈다. 골무 속에 묻힌 손가락 끝 손톱이 가리키는 그 작고 섬세한 세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여자의 마음속에 입힌 무장이다. 남성의 오만한 명예욕도, 권력의 야망도 없는 조용한 세계, 골무가 지배하는 것은 넓은 영토의 왕국이아니라 반짇고리와 같은 작은 상자 안의 평화이다.
반달 같은 골무를 보면 무수한 밤들이 다가선다.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민첩하게 손을 놀리던 우리 어머니, 그리고 우리 누님들의 손가락 끝 바늘에서 수놓여지는 꽃이파리들, 그것은 골무가 만들어 낸 마법의 햇살이다.
모든 것을 해지게 하고 넝마처럼 못쓰게 만들어버리는 시간과 싸우기 위해서, 그리움의 시간, 슬픔의 시간, 그리고 기다림의 온갖 시간을 이기기 위해서 손가락에 쓴 여인의 투구 위에서는 작은 꽃들이 피어나기도 하고 색실의 무늬들이 아롱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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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李御寧, 1934년 1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소설가이자 작가 겸 저술가, 사회기관단체인 겸 사회운동가, 정치가, 문학평론가, 시사평론가이다. 아호(雅號)는 능소(凌宵)이다.
1956년 서울대학교 국문학 학사와 1960년 서울대학교 국문학 석사, 1987년 단국대학교 국문학 박사 등을 취득하였다. 신문 논설위원과 대학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1990년 1월 3일부터 1991년 12월 19일까지 문화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본관은 우봉(牛峰)이고 충청남도 아산 출생이다. 그의 7촌 숙부는 교육자 겸 역사학자이며 저술가인 이병도(李丙燾)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