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치마포의 춤사위 / 강정실

조회 수 1203 추천 수 0 2017.09.10 17:40:31

                                               


                                                 백색 치마포의 춤사위 / 강정실



백색 치마 춤사위 2.jpg



  포드극장 입구에 갔다. 8월 초, 도시를 달군 해가 빌딩 숲으로 넘어가는 나절, 정차된 많은 차량과 인파 속을 뚫고 무대로 다가가니, 이미 가야금 산조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진학 강의와 함께 바닷가의 일몰과 궤적 촬영을 해야 하지만, 이날 해금 연주자인 벗의 촬영이 우선이다. 그는 이번 무대가 마지막이라면서, 입장권 두 장을 내게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많은 공연을 했지만, 번듯한 공연사진 한 장 없다면서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급히 차를 몰았으나 조금 늦었다.


  포드극장은 1.000석 정도의 야외극장으로 연극과 관현악 공연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국악 동호인들과 한국에서 온 국악인들을 합해 120여 명 정도가 연주한다. 관객들은 주로 흥취를 돋우는 한국사람들인데 대부분 젊은 층이고 간혹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신기한 듯, 무심한 듯 풍물놀이를 보고 있다. 하지만, 노년들은 익숙한 꽹가리와 장구 소리에 빠져, 미구에 찾아올 종말의 시간을 짐짓 외면한 듯 보였다. 어쩌면, 해토머리에 조좀조촘 다가오는 형형색색의 불빛과 어릴 때의 기억이 사위스러워 이렇게 빠져드는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때 침탈되었던 조국의 풍물놀이가 미국 중심부의 야외극장에서의 기개는 차라리 파란만장했다. 궁중무용인 처용무의 파랑, 빨강, 하양, 검정, 노랑의 오방색은 애조 띤 음률로 은은히 흐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어느 덧 남사당의 풍물놀이는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상쇠의 가락 고름에 따라 법을 유행으로도 쩍말 없이 살아왔음짐한 양장구 소리가 가마솥 동지팥죽 끓듯 하는가 하면, 턱에 찬 가락을 '둥둥 둥더쿵' 북소리가 맥을 잡는다. 누가 불러낸 것도 아니련만, 객석의 꼬마는 덩실덩실 춤을 춘다. 남도농악이 판굿으로 바뀐 것이다. 언제 왔는지 맞은편에서 고향 선배가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으쓱 춤 흉내를 낸다.


  농악을 연주하는 풍물꾼과 구경꾼의 눈이 방글방글 돌아가는 손놀림에 빨려든다. 쇳소리의 격랑, 그 소용돌이 속에서 쇠는 몸으로 떨고 장구는 공을 올린다. 영육이 하나가 된 신명의 극치다.


  풍물소리에 휘말린 소용돌이가 잠시 너누룩해질 무렵이었다. 줄광대가 공중에 맨 춤 위에서 삼현육각의 연주에 맞추어 어릿광대와 함께 재담과 춤, 소리, 발림을 섞어가며 갖가지 잔재주를 부린다. 중년여성이 사뿐히 발걸음을 떼며 살굿빛 한복 자락을 현란하게 움직이는 진도북춤에서는 새우젓이 곰삭는 전라도 해변의 바다 내음이 풍겼다. 그리고 농요에 맞춰 일꾼들을 격려하며 흥을 돋우어주던 두레굿에서 소박한 농촌의 만조가 아련히 그려졌다.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밋밋한 분지 위에 물결 짓는 순백의 아우성!  계곡으로부터 거슬러 온 바람결 따라 하얗다 못해 푸른 기마저 감도는 옥양목에 굽이굽이 청풍이 출렁인다. 해변에서 철썩이는 파도는 수평선으로부터 밀려와 대안에서 사그라지는데, 산정에 이는 파도는 능선을 안고 있는 창천의 품속으로 쏴아 쏴 밀려 나갔다. 육신을 떠난 영혼의 유랑같이......


  타고 남은 잿불을 다독임인가. 풍장소리는 휘모리장단의 다급한 가락에서 세마치장단으로 서서히 고개를 넘는다. 숨결을 추스르는 풍물잡이나 덩실대던 잡색들의 머리칼 위에 백색 치마포가 너풀거린다. 그렇다. 하늬바람에 꺽일 듯 꺽일 듯 나근거리며 춤추던 경기민요 정상에서 물결치던 그 백색 치마폭의 춤사위다. 무대는 경기민요로 끝이 났다.


  거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밀물져 오는 젊은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그 생기발랄한 웃음소리에 뒤풀이로 접어든 풍장소리가 귓가에 아스라이 잦아들었다.


  뜨거운 팔월인데도 저녁에는 으스스 추위가 밀려온다. 네온사인이 빌딩숲에서 타는 듯 곱다. 마치 사라져가는 것처럼 아름다운 건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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