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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에 대하여 / 맹난자

 

 

 

봄이 이울자 성급한 덩굴장미가 여름을 깨운다.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다가 담장 밑에 곱게 피어난 장미 꽃송이와 눈이 마주쳤다. 투명한 이슬방울, 가슴이 뛴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통증이 한 줄기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이다. 6월의 훈향이 슬며시 다가와 관능을 깨운다. 닫혔던 내부로부터의 어떤 확산감을 느끼게 되곤 하던 것도 그러고 보면 매양 그 무렵이었다.

약속한 대로 나는 ‘예술의 전당’ 앞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뮤지컬 <포에버 탱고>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내가 탱고를 보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순순히 동의해 주었다. 순순히라는 말 속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담겨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흔히 탱고를 관능과 외설, 즉 단정치 못한 어떤 것과 연관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능과 외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가지각색이다. 팔뚝에 붙은 거머리 떼어내듯 말은 모질게 하면서 속으로는 내심 그 진한 유혹의 잔에 취하게 되기를 원하며, 궤도 이탈을 꿈꾸기도 하고 심지어는 파괴적 본능까지도 일으키는 이들이 있었다. 이렇게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며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미화되고 대상에 따라서는 인간적이라는 지지까지도 얻어내고 있는 것이다.


《악의 꽃》을 쓴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의 수간(獸姦)에 얽힌 이야기나 알듈 랭보와 베를레느의 동성애 사건, 19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여사와의 계약 결혼. 이들의 자유 선언에도 불구하고 성(性)에서 끝내 초월적이지 못했던 보부아르 여사를 떠올리면 성은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그러면서도 꼭 알고 싶은 것이 성의 정체이다.


성의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 조르주 바티유는 “우리 인간을 그런 열정적 충돌과 무관한 존재로 상상한다면 우리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열정적 충돌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존재, 사실 그것으로 해서 우리의 성이 동물적 성행위와 구별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감각 기관을 통해 일어나는 우리의 욕망과 열정적 감정들이 빚어내는 갈망, 그리고 심리적 추구가 일으켜 내는 프리즘의 굴절 작용 같은 에로티시즘에서 동물의 것과 다르게 구분되는 인간의 성(性)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성(性), 나는 그 자체보다 성에 대한 심리적 반응에 더 관심이 모아진다.

감각의 비늘을 일으켜 세우는 우리 몸의 관능이 어떻게 하여 일어나며 어떻게 스러지는가? 생명의 에너지를 성의 에너지로 환치한다고 해도 다를 바 없다는 그 에너지의 본체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한때는 내게 화두였다. 백골(白骨)을 떠올리며 거기서 애욕(愛欲)의 공무(空無)함을 상상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목숨이 있는 한, 성(性)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며칠 전 조간신문에서 ‘관능적 몸짓, 유혹의 노출’이라는 큰 제목 아래 소개된 <포에버 탱고> 댄서들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열정과 관능의 댄스라고 세계의 언론도 극찬한 바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솔직하고 아름다운 섹슈얼리티의 무대라고 한 그 선전 문구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사실상 섹슈얼리티에서 한 발자국쯤 멀어진 나이가 되어서인지 섹슈얼리티의 무대가 궁금해졌다. 기다리고 있던 무대에 조명이 들어왔다.

 

아르헨티나의 고유 악기인 반도네온(아코디온의 변형 악기)이 상징물처럼 무대 중앙에 설정되어 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하늘에 슬픔의 고함처럼 울리던 그 반도네온의 선율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울려 퍼지면서 댄서들의 춤이 시작된다.

말끔하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남성 댄서는 올백으로 붙여 빗은 머리에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검정 구두를 신었다. 그런가 하면 여성 댄서들은 터질 듯한 앞가슴의 풍만함을 엿보이도록 깊게 패인 드레스를 입고 될수록 몸의 곡선을 강조한 타이트한 실루엣, 높고 뾰족한 하이힐. 거기다 내면의 외로움을 무시하듯 함부로 치장된 금속성의 액세서리와 머리에 꽂은 가벼운 깃털과 구슬핀의 섬세한 장식. 대각선으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남녀 댄서의 얼굴은 정지 신호에 걸린 듯 잠시 무표정하다. 투우사가 소를 겨냥할 때의 그것처럼 긴장감마저 든다. 그러나 빠르고 경쾌한 탱고 리듬의 스텝이 몇 번 어우러지더니 급한 회전을 이루며 이내 타오르는 장작불처럼 격렬함에 이르고 만다.

여성 댄서의 손이 남성 댄서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입술이 닿을 듯 밀착된 가슴, 상대방을 갈구하는 듯한 눈빛, 마침내 남자의 손이 여자의 몸을 훑어 내리기 시작한다. 정교하면서도 감성적인 터치, 허벅지까지 깊게 터진 스커트 속으로 공격적인 다리의 움직임이 자유롭다.

탱고는 원래 ‘만진다’는 뜻의 라틴어 ‘탕게레’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이 춤은 파트너 간의 밀착, 혹은 좀체로 끊어지지 않는 터치에 그 중점을 둔다고 말한다.


새로운 삶을 찾아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흘러들어온 이민자들.

아프리카나 유럽 등지에서 떠나온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스스로의 애환을 달래기 위해 밤이면 핸슨 클럽에 모여들었다. 거기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춤이 시작된다. 국가는 춤을 법으로 금지하기에 이른다.

탱고는 관능을 고조시키는 북의 단순 반복음? 원시성이 깃든 북의 반복음으로 시작된 룸바나 삼바의 기원에 그 뿌리를 둔다. 브라질계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아르헨티나에 전한, 그러니까 칸돔베스라는 춤이 탱고의 모체가 되는 것이다.


몸만큼 정직한 것이 있을까? 감정이 추운 것을 그들은 몸으로 부볐다.

아라베스크의 문양만큼이나 이국적이고도 음울한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좁다랗고 긴 골목의 회랑을 따라 걸어들어 가면 불 켜진 ‘탱고 바’ 앞에서 소리쳐 손님을 부르는 한 젊은 호객꾼과 마주치게 된다. 중국 영화 <해피투게더>에서의 야휘(양조위 역)이다. 동성애자인 그는 보영(장국영 역)과 이과수폭포를 보러 아르헨티나에 여행왔다가 돈이 떨어져 이곳에 억류되고 만다. 이민자와 다름없는 생활이 시작된다. 첫번째 고통은 허기와 외로움, 그리고 분노와 섹스. 그들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영화가 끝날 즈음에 한 사람은 고국으로 귀향하는데 한 사람은 그냥 주저앉고 만다. 손을 쓸 수 없는 질병처럼 되어 버린 자신의 삶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대목에서도 긴 가락의 흐느낌, 반도네온의 탱고 선율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탱고는 남녀가 추는 춤이다. 유랑민의 허름한 방 안 구석, 두 마리 짐승처럼 사내 둘이 부둥켜안고 추는 춤은 탱고가 아니라 차라리 슬픔이었다. 그들은 영화의 제목처럼 행복하지 못했다. 나는 몸으로 풀어내는 그들의 언어를 읽어 내려가며 목 안이 아려옴을 어쩌지 못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낯선 항구, 적막한 그 마지막에 기대 선 것 같은 인생들로 해서.

“욕망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우아하고 솔직한 작품이 있을까?”《뉴스위크》는 <포에버 탱고>를 이렇게 평했다.

욕망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스스로의 발열(發熱), 고양(高揚)된 감정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그럼으로 해서 더욱 외로워지고 마는 탱고는 결국 외로운 몸짓의 형상화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화려한 복장과 경쾌한 음악, 에로틱한 율동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탱고를 관능의 허무와 동렬(同列)에 두고 바라보게 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무대 뒤에서 화장을 지우는 배우의 심정처럼 처연해지는 것이다. 가면을 내려놓은 뒤 거울 속 자신의 얼굴과 마주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물의 뒷모습은 때로 앞모습보다 훨씬 본질적일 때가 있다.


그리하여 열광과 갈채, 그것이 사라진 텅 빈 객석이거나 아니면 소모해 버린 뒤의 육체적 욕망의 쓸쓸함 같은 것.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얼굴을 탱고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관능의 열락(悅樂)과 축제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울고 있는 자신을. 그래서 탱고는 둘이 추면서 혼자인 춤. 무표정한 얼굴의 속마음, 그 더듬이가 촉수(觸手)로 짚어 내려가는 내성적(內省的)인 요소가 탱고의 본령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믐달보다도 더 매운 계집의 눈썹 같은 스타카토, 그 스타카토의 분명한 선(線)을 기점으로 하여 안으로 파고드는 수렴(收斂)의 감정, 보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내성적(內省的)인 춤으로서의 탱고를 나는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무대에서는 성장(盛裝)을 한 노년의 커플 댄서가 탱고를 보여 주고 있다. 경륜만큼이나 원숙하고 호흡이 잘 맞는 춤이다. 맞잡은 손을 풀어놓고 잠시 멀어지는가 했더니 다시 공격적으로 다가와서는 폭력적인 정사(情事)라도 벌이는 것만 같다. 그러나 마음을 주지 않고 돌아서는 여인처럼 여성 댄서는 곧 분리된다.


오케스트라의 리듬에 맞춰 그들은 썰물과 밀물처럼 끌어당김과 떨어짐의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긴장과 이완. 철썩거리며 해안가에 밀물처럼 굽이쳐 들어왔다가는 휘돌아 나가고, 나가고 나면 다시 그 자리. 어찌할 수 없는 본원적인 자리일 터이다.

그럼에도 다시 거듭되는 단순 반복의 해조음(海潮音), 관능과 외로움의 합주(合奏). 제 몸에서 일어나는 조수(潮水)의 파고(波高)와도 같은 탱고 리듬, 그 슬픈 단조(單調)의 내재율(內在律)을 듣게 하는 것이다.

실체는 찾을 수 없으나 제 몸에 깃든 녹[鐵]처럼 다시 피어나는 관능의 노도(怒濤)와 해일(海溢).

그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맞닿을 수 없는 어느 허무의 벽을 짚게 하고야 말리라. 한 발자국 다가서면 또 한 발자국 비켜나는 자신의 그림자처럼, 어쩌면 몸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지점도 끝내는 허구(虛構)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파 껍질처럼 한 겹 한 겹 다 벗겨지고 나면 끝내는 망실(亡失), 바로 그 발밑은 죽음의 계곡이 아닐까?


가서 맞닿지 못하는 허무(虛無). 그리하여 나는 현란한 불빛, 탱고 음악의 물결 바다, 섹슈얼리티의 무대라고 한 거기 노련한 동작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에로티시즘을 만날 수 없었다. 다만 서러운 포말(泡沫)과 다시 일으켜 세워지지 않는 관능, 노댄서의 이마에 돋은 힘줄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나를 스산하게 하였다. 탱고, 그 관능의 쓸쓸함이 나를 쓸쓸하게 하였다. 한 차례 탱고의 물결이 어렵게 지나갔다. 옆을 돌아보니 남편의 얼굴도 묵묵하다. 웬만한 일에는 좀체 고양되지 않는 우리들의 요즈음처럼.

객석에 불이 들어오고 나서도 우리는 한참만에 그 자리를 떴다.

밤공기는 가을 하늘처럼 삽상하다. 돌층계를 막 내려서는데 불쑥 릴케의 시구(詩句)가 발등에 와 닿는다.

 

 

오! 장미여.

순수(純粹)하나마

서러운 모순(矛盾)의 꽃.

(중략)

이제는

누구의 것도 아닌 외로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움이여.

 

나는 낮게 부르짖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외로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움이여!”

만약 릴케 선생의 허락이 있다면 이 시구를 탱고에게 헌시(獻詩)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내 자신에게 보내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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