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는 가능성 / 장영희
지난여름 이런저런 고지서들을 정리하다가 꽤 비싼 보험료 청구서를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올해 미국에서 1년 안식년을 보내면서 그리고 유학하는 6년간 남의 나라에 낸 의료 보험료가 꽤 많은데 크게 아파 본 적이 없으니 한 번도 제대로 혜택을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밑천을 뽑기 위해 건강진단을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버드 메디칼 스쿨이면 세게 최고 의료기관이고 내로라하는 세계 굴지의 부자들이 떼돈을 내고 일부러라도 온다는데 나는 이왕에 여기 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얼마 전에 아는 수녀님이 유방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특히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하니 적어도 암 검사는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화로 예약을 하니 석 달 후인 2주일 전에야 겨우 검진 날짜가가 잡혔다.
담당 여의사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가슴 검사부터 했다. 언제 마지막으로 유방암 검사를 했느냐는 질문에 매년 학교에서 하는 간단한 검진만 했을 뿐, 이제껏 한 번도 정식으로 유방암 검사를 안 해보았다고 대답하니 의사는 조금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짓더니 가슴에서 꽤 큰 돌기가 잡히는데 몰랐느냐고 물었다. 의사가 가리키는 곳을 만져 보니 확실하게 뭔가 덩어리가 잡혔다.
소위 ‘자가 진단’이라는 것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난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암일 가능성이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바로 다음 날 ‘메모그램’이라는 검사를 하라면서 검사 결과 암으로 판명 날 경우 만나야 할 전문의 이름까지 적어 주었다. 검사 결과를 보기도 전에 벌써 담당 외과의까지 알려 주는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게다가 그냥 한번 읽어 보라며 의사가 내미는 책 제목이 ‘유방암 환자를 위한 지침서’였다.
학교로 돌아오는 내 마음은 착잡했다. 순전히 보험료 아까워서 검진 한번 받으로 간 건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족에게 알려야 하나, 확실한 결과가 나오면 알리자. 갑자기 ‘죽음’이라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며 절망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차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의사가 준 책을 펼쳐 보았다. 첫 페이지엔 굵은 글씨로 ‘당신의 탓이 아니니까 자신을 탓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내 탓이라니. 내 탓은커녕, 나만 빼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탓인 것 같았다. 나는 더 살기를 원하는데 다른 모든 이가 힘을 합쳐 감히 내 등을 떠밀고 있었다. 그 알지 못하는 가해자들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움이 솟았고, 내가 이 세상에서 더 살 자격이 없어 쫓겨나는 것처럼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철저한 고독감이 느껴졌다.
학교로 돌아오니 12시 수업 들어가기 전까지 시간이 좀 있어 도서관 밖 의자에 앉았다. 늦가을의 교정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온갖 오묘한 색깔의 단풍들 사이로 제각기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마치 내가 주인공을 맡았던 연극 무대에서 내려와 다른 사람들이 태연하게 내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있는 듯, 지독한 박탈감과 질투가 밀려왔다.
마침 옆에서 한가롭게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학생들이 영문학 전공인지 ‘비트 제너레이션’이 어쩌고 ‘잭 케로악’이 저쩌고 하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되었다. 벌떡 일어나 “야, 이 바보들아, 그 사람들은 다 죽은 사람들이야. 무덤 속에서 꼼짝 못 한다고.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나에 대해 이야기해 봐!” 하고 크게 욕해 주고 싶었다. 그것도 우리말로 하고 싶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남의 나라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비위가 상했다.
다음 날 매모그램과 초음파 검사는 나를 더욱 절망시켰다. 다른 여자들이 간단하게 검사하고 “모든 게 다 좋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돌아가는 동안 나는 이리저리 재촬영을 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 같으냐고 물어도 촬영사는 무조건 의사가 말해 줄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마침내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의 일거수일투족이 의미심장해 보였다. 의사가 내 목발만 힐끗 봐도 ‘이 여자는 다리가 이런데 또 암까지 걸렸네, 참 불쌍하군’하고 동정하는 것 같았고, 친절하게 미소를 띠면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웃음이나 지어 주나’ 하고 선심을 쓰는 것 같았다. 의사는 초음파 검사로 발견한 돌기는 한 개가 아니라 세 개이고, 확신할 수는 없어도 “암이 의심스럽다”는 표현을 썼다.
조직 검사를 하고 결과를 통고받는 날까지 나는 학교에 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평상시와 똑같이 생활을 했다. 내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양극으로 내달았다. 아마 괜찮을 거야. 설마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내가…. 살아오면서 난 불운보다는 훨씬 많은 행운을 누리며 살았고 틀림없이 행운이 내 편이 될 거야 하는 믿음과, 그러면서도 어쩌면 이제는 모든 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자포자기 같은 것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조직 검사 결과 세 개의 돌기는 모두 악성이 아닌 양성으로 판명되었다. ‘앞으로 철저하게 1년에 한 번씩 검사를 받으라’는 경고로 나의 열흘간의 고독이 끝나던 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학교 앞 선물 가게에 들렀다. 다시 삶의 무대에 올라선 나를 자축하고 싶었다. 선물 가게에는 벌써 크리스마스카드가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작가들의 명언 시리즈 카드가 있었는데 마크 트웨인의 말이 적힌 카드가 눈에 띄었다. ‘오늘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이라는 시간의 무한한 가능성 - 갑자기 하늘에서 돈벼락을 맞을 수도 있고, 떠나간 애인이 “내가 잘못했어”하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드디어 한반도가 통일되었다는 저녁 뉴스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무심히 길을 가다 고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벽돌에 맞을 수도 있고, 아무리 믿기지 않아도 눈앞에서 110층 고층 건물이 삽시간에 무너질 수도 있고, ‘암’은 남의 이야기라는 듯, 잘난 척하며 살던 장영희가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려 죽을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샘터> 2001년 12월호에 ‘열흘간의 고독’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은 계속되고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철저하게 혼자였던 ‘열흘간의 고독’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비싼 검사비를 내지 않았으니 보험료 밑천을 뽑아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해피엔딩으로 들은 끝났다.
물론 이것은 가증스러운 거짓말이다. 그때 나는 조직 검사 결과 왼쪽 유방에 2~3기 정도의 암이 있고, 곧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야말로 하고많은 사람 중에 내가 암에 걸렸고, 암 환자가 된 것이다. 마감일 때문에 글을 중간 정도까지 써놓고 검사 결과를 기다려 마무리를 지으려던 나는 이 글을 앞에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검사 결과 솔직하게 암에 걸렸다고 고백하면서 글을 끝낼까, 아니면 거짓으로 결국 암이 아니었다고 글을 끝낼까. 둘 중 나는 후자를 택했다.
‘왜?’라는 물음에 나는 별로 논리적인 답을 할 수 없다. 그냥 내 마음이 시켜서 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난 그때 무척 자존심이 상했던 것같다. 신에게 내가 불운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내 자유의지와 노력만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불공평하게 느껴졌고, 오로지 건강하다는 이유로 나에게 우월감을 느낄 사람들이 미웠고, 무엇보다 내가 동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내 병은 나와 가족만의 비밀로 하고 몰래 투병하기로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8년 전의 이 글의 마무리가 완전히 거짓은 아니다. ‘오늘의 가능성’에 대해 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라는 시간의 무한한 가능성 - 잘난 척하며 살던 장영희가 어느 날 갑자기 암에 걸려 죽을 수 있다. 하지만 병을 통해 조금 더 겸손해지고, 조금 더 사랑을 배우고, 조금 더 착해진 장영희가 바로 오늘 성공적으로 항암 치료를 끝내고 병을 훌훌 털고 일어날 수도 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면 헛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늘 반반의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열심히 살아간다.
장영희 (張英姬, 1952년 9월 14일 ~ 2009년 5월 9일)는 대한민국의 수필가이자, 번역가, 영문학자이다.
서울 출신으로 1975년에 서강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에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85년에 '19세기 미국 작가들의 개념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자아여행(Journeys between Real and the Ideal)'이라는 논문으로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85년부터 모교인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코리아 타임즈(1987년부터)와 중앙일보(2001년부터) 등 주요 일간지에 칼럼을 기고하였고 한국 호손학회(1995년부터)와 한국 마크 트웨인 학회(2003년부터) 등에서도 이사 및 편집이사로 활동하였다. 서울대학교 영문과 교수였던 영문학자 장왕록의 차녀이다.[1] 그 외에도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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