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우체통 / 유혜자

조회 수 1493 추천 수 0 2017.08.13 08:35:07

                                                       빨간_우체통_09.jpg                       



                                                                    꿈꾸는 우체통 / 유혜자

 

 

비오는 날 멀리서 우체통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분명 빨간 금붕어였다. 뽀글뽀글 물방울을 뿜어 올리며 물 속을 떠도는 어항 속의 금붕어.


진지한 편지를 써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아득하면서도 우체통 앞을 지날 때마다 잊어버린 답장빚이 켕겨서인지 얼른 지나쳐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비오는 날의 우체통은 물 속에서 먹이를 잡으려고 자맥질하는 금붕어처럼 사연을 재촉하며 입을 벌름거리는 것이었다.


무심히 지나칠 때 우체통은 아무런 의미도 관련도 없는 것. 그러나 사람들과의 교신을 위해 세워 놓은 안테나를 보며 우체통이 육성이 닿을 수 없는 언어가 저장되는 보석함이라고 느낀 적이 있다. 어떤 마음에서부터 스며와서 고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지하수처럼 많은 언어가 고여서 흐르고 있을 우체통.


숫자도 모를 때 빨간 우체통 모형의 저금통을 가졌었다. 나는 동전이나 지폐를 별로 넣은 기억이 없는데도 내게 소용되는 물건이 있을 때마다 어른들이 내 우체통 저금통을 헐면 제법 많은 돈이 쏟아져서 경이롭게 느껴졌었다. 소꿉기구나 인형·리본·핀을 우체통 저금통에서 나온 돈으로 갖게 되었기에 우체통을 보면 만능이라고 여겨지던 버릇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누구에게나 우체통의 문은 열려 있지만 나만의 은밀한 밀실일 수도 있다고 여기던 사춘기, 그리던 동경의 세계를 빼꼼히 열고 조금은 엿보게 해줄 창문이었고 꿈과 이상의 통로가 되어줄 것 같던 시절도 있었다.

열정·환희·그리움 등 땅에 떨어뜨리기도 아까운 사연이나 고뇌·불안·갈망 등 떫은 사연으로도 밤이면 호젓하게 불을 켜고 있는 듯하던 우체통.


실제로 우체통은 언제나 길의 가장자리에 서 있지만 우리 가슴 한복판에 놓인 듯이 확대해보던 날도 있지 않았던가. 한밤중엔 우체통 옆을 지나면서 어느 순간 머물다 간 꽃의 향기와 한숨 소리, 뜨거운 사랑의 의미를 찾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남의 귀함도, 소중한 인연도 저장되어 있어서 때로는 낮은 기침 소리로, 때로는 선명한 휘파람 소리로라도 기척을 할 텐데 우리가 듣지 못할 뿐.


어느 봄날 강물에 띄워보낸 꽃잎의 사연도, 철새의 피맺힌 울음과 조각난 꿈자리도 기억하면서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처럼 시치미를 떼고 다음 손님을 계속 기다린다. 우체통은 기다림의 자세이다. 달빛이 잠기다 가면 그것일 뿐. 흔적 없이 그리움의 테두리로 밀려나고 나면 우체통은 꿈을 꾸기 시작한다. 순수와 진실이 만나서 빛나는 의미가 되고 향기를 발할 수 있는 만남의 대합실, 여리디여린 꿈이라도 자신의 가슴속에서 성숙해지고, 서툴게 빚은 그릇일지라도 아름다운 도자기로 구워낼 수 있는 가마[窯]를 꿈꿀 것이다.


사람들의 서툰 대화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우체통은 어느 완전한 모습이나 사고를 소유하고 싶어하지 않고 토막말일지라도 심연에서 고인 영원한 말, 영혼에까지 닿을 소리를 반길 것이다.

녹음이 짙어지고 꽃이 난만한 가운데 서 있는 우체통은 하나의 나무가 되고자 하리라. 시들지 않을 삶의 뿌리를 내리고 끊임없이 푸른 수액을 빨아올려서 이파리들의 살랑거리는 대화를 듣기 위하여.


우체통 앞에 오래 서 있으면 신비한 세계에도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몸이 작아져서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소녀처럼 먼 나라에 다녀오는 환상을 가질 수 있겠다. 실제로 인간사의 한 단계를 건너뛰는 한 수 위의 정신세계까지도 기대해 보며. 그러나 불신과 좌절의 한낮을 보낸 불꺼진 밤길의 우체통을 보면 죽음의 흔적들이 모여 있을 것 같다. 시간에 의해 의미가 상실되고 빛바랜 기억의 파편들만 가득 차서 덜커덕거릴 듯하다.


비어 있으면 차라리 그리움으로나 채울 것을. 바람 부는 날이면 어느 이루지 못한 미완의 사랑이 울고 있는 환청에 빠지기도 한다. 침묵도 그리움의 말이고, 만나고 헤어짐도 그 인연이 선택된 것임을 일깨워주는 우체통 앞에서 소리없이 배웅해야 하는 법도를 배운다.


나는 언제쯤 기나긴 편지를 써서 나의 이름을 수신인으로 부쳐볼까. 어느 비오는 날,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듯이 우체통으로 밀어 넣을 편지에는 인생에 대한 의문부호가 줄어들고 겸허한 사랑과 구원의 소리만 길게길게 씌어 있으면 좋겠다.

 

유혜자
  <수필문학>(1972)으로 데뷔. MBC라디오부국장대우PD · 방송위원회심의위원 · 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역임. 현 격월간 <그린에세이>편집인.
 저서 : 수필집『사막의 장미』,『스마트한 선택』등 8권, 음악에세이 『음악의 에스프레시보』등 4권.  한국문학상(1992), 한국펜문학상(2002), 조경희수필문학상(2011), 흑구문학상(2013) 외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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