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필문학 무엇이 문제인가


                                                                                                                                     임 헌 영


1.수필에 대한 통념,이대로 좋은가


근대문학사 이래,특히 분단이후 우리 수필문학에 대한 인식은 누구나 피천득선생의 <수필>에서 비롯해왔다. 이 짤막하면서도 함축성에다 감수성과 상징과 은유를 포함한 명문은 피천득 개인의 문학적 감성의 차원을 넘어 현대한국 수필문학의 본질과 진로와 작법까지를 규정해버린 한 전범으로 작용해 왔다. 그런데 과연 그대로일까.
정말 수필은 “청자연적”이며,“난이요 학이요,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고,“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닌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스며있는 것만일까.


곰곰히 따져보면 이 글에서 정의하고있는 수필은 넓은 의미의 수필이라기 보다는 어딘지 좁은 뜻으로서의 수필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을 어쩔 수 없다.청초하고 우아하며 여유있는 삶의 향기로서 붓 가는대로 쓴 글이 수필임에는 분명할 것이나,그럼 피와 땀이 서린 참회록이나 학술논문에 못지않는 인생론과 종교론같은 것은 수필이 아닐까. 혹은 세속의 거짓과 속임수가 뒤범벅된 체세훈같은 것 역시 수필이 아니고 무엇일까.


감히 우리 수필문학의 새 진로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먼저 가장 통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수필>의 개념으로부터 해방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이 글은 역설적으로 모든 문장의 끝부분을 “....만이 아니다”로 고치면 그대로 우리 수필이 될 것 같다. 즉 “수필은 독백이다”가 아니라 “수필은 독백만이 아니다”로,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가 아니라,“써지는 것만이 아니다”로 하면 오히려 훌륭한 수필론이 될 것이다.


수필문학의 기능과 개념의 왜소화 혹은 축소화 현상은 다른 문학장르와 마찬가지로 현대 한국문학의 한 특징이기도 했다. 50년대 이후 한국문학은 “인생파 문학”이란 기치 아래 예술적인 형상성과 서정성을 일치시킨 채 사회와 역사로부터의 단절이 미학적인 최고가치로 인식되어 왔으며, 그간 수필문학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던 성 싶다.


물론 수필문학이 그간 쌓아온 공로와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우리도 수필의 지평을 새 시대에 맞게 확대시켜야할 시점에 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간 농경사회적인 정서를 바탕해온 우리의 독자들이 이제는 성큼 후기산업사회로 변화하여 보다 다양한 시각을 요구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지난날 식 수필문학의 감성만으로는 기갈을 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후기 산업사회의 독자들이 요구하는 것


근대문학사 이래 우리 수필문학은 다른 장르와는 달리 비교적으로 비평과 이론분야가 소홀한 편이었으며, 그 결과 아직도 뚜렷한 가치관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문학전집 같은 곳에 들어있는 수필편에는 이른바 피천득선생의 <수필>관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며,중고교 교재에도 그런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물론 그 장점과 저간의 공로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변화해 가는 사회 속에서 수필의 설 자리를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물론 시나 소설에도 해당되는 말이지만 지금 잘 팔리고 있는,독자들에게 인기있는(물론 인기가 본질이나 가치관과는 다르다는 것 쯤은 알지만!)수필분야의 글들과 그 이전의 글들을 비교해 보면 그간 우리 수필이 정조대처럼 간직해왔던 보수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수필문학사에 군림하고있는 김진섭.민태원.이양하 등의 글은 8.15이후가 되면 갑자기 설의식으로 상정되는 수필문학의 시선확대를 체험하게 된다.설의식의 산문은 가히 현대 수필문학사에서 명문급에 속하는데,이런 비판의식의 글은 이내 아카데미시즘으로 방향전환해버리고 만다. 즉 이희승.조윤재.양주동 등으로 상정되는 국문학적 수필의 명맥이 한 흐름을 이루면서 김소운과 같은 문단적 수필의 흐름이 병행하는 한편 피천득의 감성적인 수필이 제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탄탄히 그 뿌리를 내리게 된다.


60년대의 산업사회와 이에 따른 인생론과 처세론적인 대중들의 욕구가 김형석.김태길.안병욱 등의 명상.사색형 수필을 낳게 하여 한국 수필문학은 질적인 변모를 가져온다. 즉 문예적 수필에서 철학적(비문예적)수필로 그 지평을 확대하게 되며,이런 현상은 70년대이후 가속화하기 시작한다.


이규태로 상징되는 대중적인 스타탄생은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중산층의 형성이 확고해지면서 그들의 욕구에 충족하는 새로운 형식의 수필문학의 변신을 요구하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이어 80년대는 무수한 사회과학 지향성의 에세이,이른바 시사칼럼형 수필이 대성행하는 계기를 만들었는데,김중배.리영희.한승헌 등이 그런 유형에 속한다.


90년대를 전후해서 수필문학은 지극히 생활현장적으로 바뀐다.이시형.이나미 등 의사들의 글이 대중적인 구미에 맞게 등장하는 현상은 이채로우면서도 많은 문제점을 던지기도 한다.
물론 페미니즘의 유행에 다른 유사페미니즘적 수필과 감상적인 수필들(그 중에는 여류뿐이 아니라 남류도 있다)도 이 시기에 엄청난 확산을 보였으며,특이하게도 노장철학을 비롯한 동양고전을 풀어쓰는 글들이 상당한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요컨대 이런 수필문학 독자들의 변모현상을 고려할 때 수필문단은 내부적으로 얼마나 변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최근들어 시와 소설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를 냉담하게 문학적인 가치 운운이란 구실로 절단시켜 버리기에는 시대적인 상황이 너무 급격히 변해가고 있지 않을가 싶은 생각이 든다.


3.수필문학의 영역확대와 그 직능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글 쓸 소재와 주제도 많아지고 이에 따라 비전문적인 글쟁이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최근 한국 문단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수필계도 마찬가지이다.위에서 본 것처럼 이제 오늘의 독자들에게 문단적인 수필만을 강요한다는 것은 곧 수필문학의 직능 축소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수필의 위기론을 불러올 수도 있다.


한국수필은 우선 그 지평의 확대를 위하여 소재와 주제를 후기 산업사회와 발맞춰야 할 것이다.물론 그간 사회의 변모를 담아오기도 했지만 문단적인 수필계가 70년대이래 사회의 변모에 보여준 관심은 다른 분야(시나 소설)와 비교도 안될 지경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시선의 확대 다음에 우리 수필계는 단연코 비평활동을 활성화시켜 저속한 대중적 취향에 영합해 가는 현상에 까지도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하면서 수필문학계의 분명한 국경의식을 확립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수필문학계의 평가와 가치척도에 관계없이 사회적인 현상으로 시시각각 변모해가며 나타나는 독자들의 반응은 오히려 정통 수필문학에 도움이 안될 수도 있다.맹목적인 대중추수주의 보다는 기존의 수필문단이 내부적인 방향전환을 설정하여 거기에 알맞도록 일정한 수준으로 독자(사회)와의 타협도 필요할 것 같다.


마침 우리 사회는 수필문학의 전성기를 만들 대전환기를 맞고있지 않나싶다. 중고교생들 사이에 일어나기 시작한 독서증가 현상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수필이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으며 수필가야말로 가장 바쁘게 될 징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수필이 이런 시기에 한가한 것은 그간 수필문학이 안주해왔던 주제와 소재에서의 협소성을 간접적으로 반증해 주는 것이 아닐까.


수필은 문자 그대로 인생과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어떤 문제나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산문형식의 문학형태로 이것은 실로 백과전서적이며 인간의 모든 능력의 총화이기도 하다. 이런 수필문학의 기능과 영역은 산업화 사회로 인간사회가 풍요해질수록 더욱 번창할 것이 틀임없으며,그런 전망 위에서 우리 수필은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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