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 김규련

조회 수 1901 추천 수 1 2017.07.09 22: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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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새


               김규련
 
 
  동해안 백암 온천에서 눈이 쌓인 구슬령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곳이다. 이 고을 어귀에는 높고 가파른 재가 있다. 이 재를 한팃재라 한다. 이 한팃재를 분수령으로 하여 마을 쪽으로 내리는 눈은 왕피천으로 녹아 흘러 성류굴 앞을 지나 동해에 이르고, 재 밖으로 빗나간 눈은 낙동강으로 녹아 내려 남해로 흐른다.


  어쩌다가 나그네가 이곳을 찾게 되면, 그 우람한 태백산맥의 산세며 깊은 계곡, 한없이 펼쳐진 눈 덮인 울창한 숲, 맵고 맑은 공기, 얼음 바위 틈으로 흐르는 깨끗한 물,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우선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발길을 돌려 그냥 되돌아 간다면, 그는 무궁한 산정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없으리라.


  왕피천으로 흐르는 석간수를 따라 휘몰아치는 눈바람을 가르며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를 한 나절쯤 걸어가면, 화전민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天惠)의 절경이 많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따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기도 한다. 어쩌면 바보가 아니면 달관한 사람만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첩첩 산중의 마을이다


어느 해 봄, 이 마을에 뚯 밖의 황새 한 쌍이 날아 들어왔다. 꿩이나 산비둘기가 아니면 부엉이나 매 같은 산새들만 보아 온 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그 황새가 신기했다. 희고 큰 날개를 여유 있게 훨훨 흔들며 노송 위를 짝을 지어 유유히 날아다니는 폼이 정말 대견스러웠다. 붉은 주둥이와 긴 목, 새하얀 털로 덮인 날개 밑으로 쭉 뻗어 내린 검붉은 두 다리, 황새의 자태는 과연 군자의 모습이었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빗물처럼 쏟아지는 늦은 봄의 오후, 마을 사람들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황새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이들은 그 황새가 길조라고, 무엇인가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금년엔 찻길이 뚫리겠지, 올해는 꼭 전기가 들어오겠지.


  그런데, 변이 생겼다. 낙엽이 질 무렵의 어느 날 아침, 이 마을 지나가던 밀렵꾼이 그 황새를 보고 홍을 쏜 것이다. 총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아침을 먹다 말고, 황새 둥지가 있는 노송 숲으로 뛰어 모였다. 밀렵꾼은 도망을 가고, 황새 한 마리가 선지피를 흘리며, 마른 억새풀 위에 쓰러져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황새는 한쪽 날개가 못쓰게 될 만큼 다쳤으나, 죽지는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그 황새를 안고 돌아와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를 했다. 그리고, 날개의 상처가 아물고 힘을 되찾을 때까지 그 황새를 물레방앗간 옆 뜰에 있는 소나무 밑에 두고 보호하기로 했다. 이들은 곧바로 둥우리도 만들고 모이 그릇도 마련했다. 그러나, 황새는 쓰러져 움직이질 못했다. 그 날 밤 동장 집 사랑방에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밤이 이슥하도록 황새를 살려 볼 궁리를 했다. 그리고 밀렵꾼을 저주하다가, 드디어 인간의 잔인한 일면을 저마다 나름대로 매도하기도 했다.


그 며칠 뒤였다. 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지창에(紙窓) 갈잎이 날려와 부딪쳤다. 그런데 조금은 귀에 익은 황새의 울음 소리. 탁탁탁 타프프 탁탁. 사랑방에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가슴을 도리는 듯한 이 처절한 울음 소리를 듣고, 모두 말없이 마당으로 나왔다. 가을 밤, 밤 하늘에 찬란한 별들, 그 별빛에 흰 깃을 번쩍이며 황새 한 마리가 물레방앗간 주위를 이리저리 애타게 날고 있지 않은가? 총소리에 놀라 도망갔던 황새가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인제 황새는 인간이 두려워서, 쓰러져 누워 있는 자기의 짝한테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진 마을 사람들은 자리를 피해 주려고 저마다 묵묵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황새는 연신 부리가 멍들고 부서지도록 울어댔다, 탁탁탁 타르르 탁탁. 그 날 밤엔 늦도록 화전민 후예들의 지붕 밑에 호롱불이 꺼지질 않았다. 날이 밝자, 이들은 그 부상당한 황새를 그들의 둥지가 있던 노송 아래에 가져다 놓았다. 가련한 황새가 사람이 없는곳에서 서로 어울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며칠 뒤, 무서리가 몹시 내린 어느 날 아침, 기이하고 처참한 변이 또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도 알뜰히 보살펴 온 그 한 쌍의 황새가 서로 목을 감고 싸늘하게 죽어 있지 않은가? 마을 사람들은 이 슬픈 광경을 보자 숙연해졌다. 그리고 저마다 무엇을 느꼈음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황새도 영물일까? 산골의 날씨는 무섭게 추워지는데, 짝을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없었던 애절한 황새의 정, 조류에 따라서 암수의 애정이 별스런 놈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그들의 생태요 본능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찮은 본능이 오늘 따라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김규련 1929년 경남하동 출생. 영양군 , 고령군 영양군 교육장, 경상복도 교원 연수원 초대 원장 ,경상북도교육위원 지냄. 1968년 <수필문학>으로 등단.

영남수필문학회장 . 한국문인협회 구미시지부장. 형산수필문학회장 역임. 신곡문학대상. 산귀래문학상 수상. 저서<강마을> < 거룩한 본능> < 높고낮은 목소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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