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도와 100도의 차이 한비야

조회 수 1001 추천 수 1 2017.07.02 17: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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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도와 100도의 차이

 

                                                                                                                     한비야


   난민 담당 쥬디는 아마추어 사진작가다. 그녀가 모술 각 사업 현장은 물론 평범한 일상을 다양한 앵글로 순간 포착한 사진들은 우리끼리 보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어느 날 아침 사무실에 가려고 차를 타려는데, "비야, 잠깐만 거기에 서봐요" 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사진을 찍혔다. 그날 저녁 쥬디가 아침에 찍은 사진이 멋지게 나왔다면서 컴퓨터 화면으로 보여주는데 깜짝 놀랐다.

 오렌지색 차 앞에서 방탄조끼를 입고, 손에는 무전기를 든 채 환하게 웃는 얼굴. 당당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웃는 얼굴. 내게 이런 표정과 분위기가 있었나, 의아할 만큼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런 얼굴이었다. 정말 신기했다. 살인적인 더위와 모자라는 잠, 업무 스트레스, 불안한 치안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환한 얼굴이 나올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그 방탄조끼까지 입고서 말이다.


 사실 통풍이 전혀 안 되는 그 쇳덩이 때문에 온몸에 콩알만한 땀띠가 나 있었다. 땀띠 때문에 앞으로도 뒤로도 누울 수가 없어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서 자야만 했다. 게다가 이 방탄조끼를 입으면 벌겋게 성이 난 땀띠가 눌려서 벌에 쏘인 듯 따갑다. 거기에 땀이라도 나면 정말 죽음이다. 그래서 방탄조끼만 입으면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는데 어떻게 이렇게 만족스러운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세계 일주 하면서 찍었던 사진이 생각난다. 에티오피아 시골 마을에서 말라리아 예방약 부작용으로 머리카락도 매일 뭉텅이로 빠지고, 눈이 시려 하루 종일 눈물이 나고, 급기야는 간이 나빠져 이 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몸져누워 있을 때 찍은 사진. 사진 속의 나는 피골이 상접했지만 눈빛은 강렬하고 무엇엔가 아주 만족해하며 평안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내가 세계 일주 하며 찍은 수만 장 가운데 가장 아끼는 사진이다.

   그날도 사이다만 겨우 마시고 숙소 침대에서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영어도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라고, 이런 탈진 상태로 더이상 여행을 하는 건 무리라고, 일단 한국에 돌아가서 몸을 추스르자고. 또 무슨 일이든 도중에 그만두는 건 정말 싫지만 이번에는 불가항력이라고, 이 정도면 견딜 만큼 견딘 거라고, 내가 집에 간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다고.

 한번 집에 갈 생각을 하니까 한국에 가면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들이 줄줄이 생각나며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 내일 당장 아디스아바바로 가서 홍콩이나 방콕으로 가는 첫번째 비행기를 타면 이틀 안으로 한국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고생 끝이다. 이 괴로운 토증과 이 지저분한 여관방과 무거운 배낭에서 해방이다. 해방!

   헌데 다음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돌아가서 다시 홍보회사에 다니면 예쁜 옷 입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도 마음 한켠 그때 아프리카에서 그만둔 세계 일주를 끝까지 해볼 걸, 해볼 걸 하면서 살 것이다. 이 정도가 정말로 돌아올 만큼 못 참을 일이었나 의심도 할 것이다. 열 살 때부터 꿈꾸어왔던 세계 일주를 그렇게 쉽게 포기한 나를 용서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몸은 편해도 마음은 불편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몸은 고생하지만 하고 싶던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 훨씬 행복한 것 아닌가. 이렇게 더 이상 못 할 것 같아도 눈 딱 감고 한 번만 더 꾹 참으면 되는 것 아닌가. 이게 나의 최선이야, 이 정도면 나에게도 남에게도 떳떳해, 라고 생각할 때 그때 한 번 더 해볼 수 있어야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아닌가.

 그래, 그래, 지금 99도까지 온 거야. 이제 이 고비만 넘기면 드디어 100도가 되는 거야. 물이 끓는 100도와 그렇지 않는 99도. 단 1도 차이지만 바로 그 1도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가. 그러니 한 발짝만 더 가면 100도가 되는데 99도에서 멈출 수는 없어. 암. 그럴 수는 없지. 99도까지 오느라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말이야. 결국 그날의 결론은 '가기는 어딜 가'였다. 그 사진은 그런 기특한 결심을 하고 나서 기념으로 찍은 것이다.

  쥬디의 사진과 아프리카 사진에는 공통점이 있다. 몸은 괴로워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현장에서 찍었다는 점이다. 이곳 역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딱 맞아떨어지는 현장이다. 그러니 외적인 조건과는 상관없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로 예쁜 얼굴이 나올 수밖에.


   나도 집에 거울이 있는 사람이니 나의 객관적인 외모가 B+라는​ 거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얼굴로 살고 싶다. 부모님이 물려준 이목구비 예쁜 얼굴이 아니라 밝고 환해서, 당당해서, 쉽게 포기하지 않아서, 매사에 최선의 최선의 최선을 다해서 사랑스럽고 예뻐 보이는 얼굴로 살고 싶다. 쥬디가 찍어준 사진 속의 나처럼.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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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韓飛野, 개명 전 이름 한인순, 1958년 6월 26일 ~ , 서울 출생)는 대한민국의 국제구호활동가이자 작가, 전 월드비전 긴급구호팀 팀장. 오지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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